강성민
2020.02.17
기록의 의미

기록에 대하여: 상대성, 함정, 힘, 숙명
 

1.
얼마 전 내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는 서울 쪽방촌의 실태를 다룬 책을 한 권 펴냈다. 저자는 현직 일간지 기자로 직접 발로 뛰며 쪽방촌의 내밀한 모습을 취재한 르포를 몇 차례 내보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책은 신문에 싣지 못한 내용, 특히 저자가 겪은 어린 시절 가난의 경험을 덧붙이고 쪽방촌의 실태도 더욱 자세히 보강하여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험악한 상황이 많이 벌어졌다. 어떤 동네의 정보원이 있었는데 슈퍼마켓 주인이었다. 그녀에게 최대한 많은 내용을 캐내기 위해 저자는 갈 때마다 박카스를 비롯해 음료수를 박스째로 구입하는 등 공을 들였다.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왔다. 누구한테 가면 어떤 얘기를 들을 수 있다는 등의 얘기였다. 쪽방촌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잘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보는 유용했다. 찾아가서 만난 남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입이 가려운 사람이었다. 그는 같은 쪽방촌이지만 자기는 창문이 있는 방에 살고 있다며, 창문도 없는 방에 사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우월감도 드러냈다. 그렇게 취재를 해서 첫 기사가 나갔다. 얼마 후 찾아간 자리에서 슈퍼마켓 주인은 그녀를 향해 “꽃뱀 같은 년”이라며 자기를 속였다고 펄펄 뛰었다. 그녀는 사실 건물주에게 수고료를 받고 쪽방촌 사람들에게 월세를 걷고 독촉하는 관리자였던 것이다.
독자는 알 권리가 있고, 기자는 쓸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취재원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 경계선에서 르포는 탄생한다. 보호해줄 것은 보호해주고, 드러낼 것은 드러내고, 때론 협상하고 때론 배신하는 글쓰기가 바로 르포다. 우리는 르포를 통해 ‘기록’이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적’인 행위인지를 알게 된다. 기록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고, 많이 읽힐수록 기록의 가치는 올라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선의의 시도였을지라도 파생되는 상처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기록은 더욱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2.
또 하나의 사례를 볼까 한다. 얼마 전 우리는 출판 프로젝트 하나를 결국 접고야 말았다. 국내 한 시사주간지와의 공동 기획이었다. 주간지에 한국의 다양한 문제를 짚어보는 주제로 ‘논픽션’ 공모를 해서 지원을 받아 심사 후 몇 편을 뽑아 잡지에 일부 내용을 연재한 뒤에 단행본으로 펴내는 기획이었다. 3곳의 출판사가 잡지사와 함께 참여해 수상작의 상금도 공동 부담하기로 했다. 꽤 많은 기획안이 응모되었고 그중 3편이 선정되었다.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배정된 원고는 미투로 한국사회가 들끓었던 2018년 그와 관련된 한 집단을 심층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저자의 의도는 관련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인터뷰하여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을 넘어 그들의 일상에서 작동한 지배와 동조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드러내자는 것이었다. 흥미를 느낀 우리는 저자와 몇 차례 만나 회의를 진행하면서 구체적인 사항들을 논의했다. 그런데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법적인 문제가 사실은 상당히 위험 부담이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형사정책연구소의 연구원을 만나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대로 책을 낼 경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할 확률이 100퍼센트이며 재판이 진행중인 사안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패소할 가능성도 매우 높다는 자문을 받았다.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저자와 이 내용을 공유했고 결국 출판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기록은 사실 추구의 산물이다. 그러나 사실을 추구하는 행위는 그 과정에서 때로 누군가의 치부를 건드리게 되고 강력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위의 경우가 그렇다. 사실 추구의 의지가 감당해야 할 부담보다 높을 경우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나에겐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출판인으로서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도 자괴감이 몰려올 수밖에 없다.
 
3.
우리 출판사는 ‘걸작 논픽션’이라는 시리즈를 열아홉 권째 출간해오고 있다. 논픽션 중에서 걸작들을 골라서 펴낸다는 의미인데 빼어난 전쟁사 저작,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탐구 등을 통해 독자와 만나고 있다. 퓰리처상, 고단샤 논픽션상 같은 중요한 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선택했고, 1942년 허난 대기근을 다룬 책이라든지, 캄보디아의 어두운 역사 킬링필드 대학살을 주도한 책임자의 재판과정을 추적한다든지, 한국전쟁을 중공군의 관점에서 기록한 책이라든지 등 ‘기록의 의미’를 환기시킬 수 있는 책들도 소개해왔다.
나는 좋은 기록이란 판단 장애를 부추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판단이란 대체로 사태의 한두 측면만을 보고 내려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태가 전해주는 근원적인 의미를 스스로 소화할 수 없는 상황에서 판단이 내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흔들리기 쉽고 내성도 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이성을 단련시켜줄 수 있는 복합적이고도 다층적인 상황을 출판을 통해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요즘 tvN의 ‘책을 읽어드립니다’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이 있다. 나치 1급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방청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초지일관 태연하게 나는 조직의 일부였으며 위에서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일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출해낸 책이다. 책의 띠지엔 “사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간 이 책은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이들도 알고 보면 성실한 우리 주변의 이웃과 같은 이들이고, 조직에 속해 복무하다보면 윤리의식은 무뎌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강화해왔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 출판사에서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준비 중인데 이 책은 아이히만이 붙잡히기 전 숨어 있던 은신처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니 다소 충격이 느껴졌다. 우리는 그가 신분을 세탁하고 숨죽인 채 살았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곳 은신처에서 비밀리에 뜻을 함께한 동지들을 규합했고, 종족 우월주의와 나치 이념을 여전히 신봉한 채 새로운 국가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를 모색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법정에서의 아이히만의 모습은 철저히 연기된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철학자의 자격으로 법정의 현장을 지켜보고 그것을 사유로 연결시켜낸 데는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연기에 속아넘어간 것이 되고 말았다. 만약 우리가 아이히만이란 인물에게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한나 아렌트의 책은 물론,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다룬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판단 장애’란 이런 식의 깊이 읽기를 통해 만들어진다. 과연 두 권의 책을 읽고 우리는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악의 평범성과 악의 집요함 사이 어딘가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4.
최근 우리 출판사는 ‘아주 보통의 글쓰기’라는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시리즈도 ‘기록’과 관련해서 얘기해볼 만한 대목이 있다. 이 시리즈는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 쓴 에세이를 펴낸다. 여기서 ‘보통’이라는 말은 ‘전문가’와 상대되는 개념이다. 출판에서 전문가는 글쓰기의 면허를 갖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등단한 작가, 대학교수, 잘 나가는 각 분야의 직업인들이다. 거기에 속하지 않지만 살아온 내력이 독특하고 글도 잘 쓰는 이들도 많다. 요즘은 SNS 시대로 약간만 안테나를 세우면 이런 분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삶과 일상을 기록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을 떠올려보자. 정식 한의대를 나와 개업한 경우 말고도 독학으로 침을 배워 알음알음 찾아오는 이들에게 침을 놔주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침술을 쉽게 깎아내릴 수 없는 것은, 실제로 맞아본 사람들이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주 보통의 글쓰기’도 이른바 제도권 바깥의 글쟁이들을 대상으로 하지만 아마 읽어본다면 쉽게 아마추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껏 ‘아주 보통의 글쓰기’에서는 3권의 책을 펴냈다. 첫 번째 책은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저자이고, 두 번째 책은 우리에게 익숙한 KBS ‘인간극장’ 등의 프로그램에서 수십 년간 방송작가 일을 하고 얼마 전에 암수술을 받은 60대 초반의 여성이 저자이다. 세 번째 책은 전라도 광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평생을 엄마로 살아왔고 젊을 때의 꿈은 작가였던 60대 후반의 분이 저자다. 이들의 글을 읽다보면 보통 사람들이 큰 욕심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삶을 기술하는 일의 중요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 고만고만한 일들을 겪으며 비슷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많이 깨닫게 된다.
그에 잇대어 생각해볼 만한 점은 기록하는 순간 삶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형태와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좀 전에 언급한 60대 초반의 방송작가가 쓴 책의 제목은 『나의 엄마와 나』다. 이 책은 엄마와의 화해 시도이자 강력한 공격적 존재인 엄마 때문에 인생이 힘들어진 한 여성의 삶의 고백이다. 아마 독자들은 손쉬운 화해의 장면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그런 엄마가 죽도록 미웠지만, 나이가 든 지금은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는 그런 장면을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는 두 번의 자살시도를 하는데 한번은 열 살도 되기 전,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의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것이었고, 나머지 한번은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것이었다. 두 번 다 엄마의 지독한 폭력 때문이었다. 그녀의 엄마는 한국전쟁 때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이었고 두부를 팔아 가족을 건사한 가장이었다. 그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자신의 큰딸을 매일매일 샌드백처럼 때렸다. 배추를 다듬다가도 때리고, 자고 있는데 때리고, 함께 귀가하다가도 때리고 이유 없이 무지막지하게 때렸고 욕설을 퍼붓고 저주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엄마를 좋아했다. 함께 살 수가 없어 가출해서 우여곡절 끝에 방송작가가 되었지만 줄곧 증오하지 않았고 미워하지 않았고 엄마를 보고 싶어 했다. 이런 심리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번은 심리를 상담해준 전문가들이 그녀의 이런 태도를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엄마’라는 요인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가상의 용서, 가상의 화해를 하고 있다며 그런 것은 진정한 치유를 위해 가장 먼저 넘어서야 하는 장애물이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즉, 마음껏 엄마를 미워하고 욕하고 증오하는 과정을 거쳐야 엄마와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정말 엄마를 사랑한다고. 거짓말이 아니고, 감추고 피하고 외면하고 뭐 이런 게 아니라고. 당신들은 이론과 사례가 전부인줄 아는 헛똑똑이들이라고.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저자 편에 서게 된다. 우리 현대사에는 임상학을 귀납적으로 보편화한 심리학 일반이론으로 포괄될 수 없는 특수한 심리적 현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이다. 그 심리적 현실은 때로 폭력의 병리학이 말해낼 수 없는 인간 자아의 매우 강력한 한 모델을 제공하기에, 개인들의 직접적인 기록은 심리학자들과의 상담만큼 충분한 자료적 가치를 갖는 것이다.
 
5.
기록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많이 망설였다. 나는 출판인으로서 2007년부터 지금까지 600여 종이 넘는 책을 펴냈다. 기록이란 측면에서 나의 정체성을 정의하면 사회라는 종이에 책이라는 글자로 무언가를 기록해나가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게 볼 수 있다면 내가 그려낸 그 기록의 무늬를 시간이 지나 거리를 두고 조감해보았을 때 단조롭고 기계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록의 상대성 및 기록의 함정과 싸워나가면서, 기록의 왜곡과 기록의 권위와 기록의 중심에 맞서서 소외된 기록, 작은 기록들을 선택하고 그들과 호흡하면서 그것을 소재로하여 우리 시대에 맞는 기록의 권위와 기록의 중심을 만들어내다가, 다시 허물어지는 일. 기록하는 자의 숙명에 대해 생각해본다.

 

<월간 국회도서관> 2월호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