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아
2019.08.16
리사 심슨이 사는 법

누군가에게 이 책을 읽히고,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장을 말해보라고 하면 그 사람의 관심사에 대해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공저자들이 쓴 책이 대개 그렇듯이 이 책도 주제가 다양하고, 밀도도 일정하지 않다. 《심슨 가족》이 유발하는 폭소에 열광하며 좀더 지적이고 예리한 웃음의 지점들을 포착해내려는 사람이 고를 장이 있고, 가장 악하고 강한 사람에서 가장 선하고 약한 사람까지 모두를 가차 없이 비웃고 후려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한 이 쇼(와 세상)에 진력난 사람이 고를 장이 있다.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 고를 장이 있고, 생에 대한 사랑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고를 장이 있다.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자, 구조주의자…… 그 밖에 다양한 사람의 여러 관심사를 위한 장들도.

 

이 책을 만들며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에세이는 1장, 4장, 그리고 10장이다. 사실 저 에세이들에서 다룬 리사라는 인물, 그리고 리사를 중심으로 본 그 주변 캐릭터에 관심이 있다. 이 책에서나 《심슨 가족》 시리즈 전체에서나 리사가 차지하는 분량과 역할은 비슷할 것 같으니(지적인 여자애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그런 여자애에 대해 할 말도 딱 그 정도인), 여기서만큼은 리사의 곁에 서서 리사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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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사 메리 심슨은 초등학교 2학년, 여덟 살 소녀다. 가족 내에서는 호머와 마지의 딸·바트의 여동생·매기의 언니, 학교에서는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는 우등생에 색소폰 연주, 아이스하키 등 예체능에도 탁월한 수재다. 스프링필드라는 지역사회에서는 책임 있는 어린이 시민으로 활동한다. 고작 여덟 살인 리사에게는 벌써 도덕주의자, 진보주의자, 평화주의자, 환경보호주의자, 채식주의자, 세계시민주의자, 페미니스트, 반인종주의자, 과학의 신봉자, 풀뿌리 활동가 등 ‘윤리의 보루’를 상징하는 라벨이 한없이 붙어 있다. 이 모든 것을 짊어진 여덟 살 소녀의 내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뇌야, 좀 닥쳐! 친구가 생겼다고. 더는 네가 필요 없어.” 리사는 어느 날 자기 뇌를 향해 말한다. 많은 리사 팬들은 이 짧은 장면을 귀엽고도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다. ‘드디어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이 왔어(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 가능성은 어울릴 사람 하나 없이 늘 자기대화 속에서만 성장할 수 있었던 소녀에게 얼마나 커다란 해방감을 선사했던 것일까? 리사의 주변을 둘러보면 그의 고립감과 우울을 짐작할 만하다. 집이나 학교나 또래집단이나 지역사회나 어디 한 곳 마음을 의탁할 곳이 없다. 스스로 시에 적은 것처럼 리사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슬픈 초등 2학년” 같다.

 

 

리사에게는 사회에서 만났더라면 상종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아버지가 있다. “그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에요.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공휴일도 모조리 까먹죠. 입을 벌리고 음식을 씹어요. 도박을 하고, 지저분한 술집에서 게으름뱅이나 저질들과 어울리죠. 세수 수건에 코를 풀고 그걸 중간에 도로 끼워넣죠. 우유팩에 입을 대고 마시죠. 기저귀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잠들 땐 쩝쩝 소리를 내지를 않나, 일어날 땐 뿡뿡 소리를 내지를 않나. 아 맞다, 그리고 열쇠로 자기 몸을 긁어요. 대충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194) 아내 마지가 증언하듯 호머는 천박하고 추잡한 인물이다. 그는 이따금 지적이고 양식 있고 예의 바르며 고상한 것을 좋아하는 딸에게 수치심과 좌절감을 안긴다. 리사가 그로 인해 익숙한 낙담에 빠지면 호머는 딸의 내면에 귀 기울이기보다, 농담을 던지고 기분을 풀어주는 식으로 그 순간들―기나긴 역사의 토막들―을 모면한다(그러곤 아빠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생각한다). 혐오 발언을 포함한 문제적 발언을 내뱉을 때도 있지만, 리사는 좌절하는 와중에도 그 악의 없음까지 이해한다. 그래서일까? “너, 아빠 사랑하잖아”라는 바트의 말에 리사는 “그만큼 [그 사실을] 의심하기도 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오빠라고 나을 건 없어 보인다. 악동이라는 말만으로는 표현이 안 되는 바트는 못된 남자애의 전형이다. 거짓과 속임수를 일삼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후비고 뒤틀고 쥐어짜는 데 주저함이 없다(이 책의 어느 장에선 “소시오패스”라고까지 했다). “바트 심슨은 어쩌다 보니 항상 말썽에 휘말리는 귀여운 꼬마 개구쟁이가 아니다. 마음만은 순수한 반항아도 아니다. 그는 시건방진 말만 내뱉는 비행 소년, 새파란 바지를 입은 악동, 훼방꾼, 사탄의 졸개다.”(88) 나쁨을 위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바트는, 좋음을 위해 어지간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리사에게 좋은 오빠일 리가 없다. 세계와 타인, 나와 다른 존재의 안위를 걱정하는 리사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오빠는 늘 남을 등쳐 먹고,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곤란에 빠뜨린다. 견고한 정체성을 가진 리사와 모든 것에 반항하는 것 외에는 실존의 방법을 모르는 바트가 잘 어울리기는 어려워 보인다(물론 이건 리사에게 달린 문제이지, 바트에겐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젖먹이 매기에 대해서는 줄이기로 하고 보면, 그나마 마지는 나은 편이다. 그는 리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극한 상황에서도 최소한 도덕성과 양심, 용기와 자제력을 보여준다. 가끔은 마음에서 우러나, 리사에게 리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해주기도 한다. “항상 네 모습 그대로 행동하렴. 슬퍼하고 싶으면 그냥 슬퍼해. 우리가 같이 이겨내줄게. 슬픔이 다 끝났을 때도 우린 네 곁에 있어. 이제부터 엄만 우리 둘을 위해서 웃을 거야.”(232) 하지만 그런 마지도 어엿한 롤모델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여러 에피소드로 볼 때 마지는 어쩌면 리사와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리사에게 그는 사랑하는 엄마이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과거 세대이기도 하다. 사실 마지는 여러모로 아빠와는 다른 차원으로 리사를 실망시킨다. 우선 그는 “성인聖人의 인내심도 시험할 남자”(194) 호머를 남편으로 택했다. 호머가 불의를 저지르는 걸 보고 리사가 열을 내면, “누굴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결국에 가서는 옳은 일을 하리라고 믿어야 해”(80)라며 남편(자신의 선택)을 두둔한다.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어서가 아니라(심지어 자기 신념에 반할 때에도) 가족이기 때문에 마지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내한다. 알고 보면 꽤 훌륭한 인간인 그는, 그래서 대중매체가 그려온 천상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대변한다. 하지만 딸 리사에게 이것은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다. (리사는 학교에서 본 적성검사 결과가 ‘가정주부’로 나오자 “이제 내겐 꿈과 희망이 없어”라고 한탄하며 좌절에 빠진다. 그런 리사에게 엄마는 웃는 얼굴을 그린 아침 식사를 내밀며 살림도 창의적인 일이라고 격려한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데요? 아무도 몰라주잖아요.” 리사의 말대꾸를 증명이라도 하듯, 식탁에 앉은 남편과 아들은 말 한마디 없이 음식을 먹어치운다.) 이런 가정환경에서 “리사는 마지가 사는 방식을 드러내놓고 경멸하는데, 마지는 이 또한 체념하며 받아들인다.”(196)

 

학교 선생님은 “너 같은 여자들 때문에 나머지 우리 같은 여자들이 시집을 못 가는 거야”라는 말을 하고, 친구들은 “쟤한테 뭐하러 말 걸어? 또 괴상한 소리만 할 텐데”(231)라고 말하며 리사와 거리를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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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인류애와 감수성 때문에 리사는 가족과 친구와 모든 불운하고 한심한 이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리사를 리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그런 사람은 늘 나타났다 사라지거나, 나타나지조차 않는다. 나타났다 사라진 사람 가운데 리사가 처음으로, 어쩌면 유일하게 애정을 보인 인물인 임시교사 린드스트롬은 이런 처지를 (자기 경험으로부터) 예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의지할 데가 있으리라고 느낄 때마다, 그럴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다. 네가 알아야 할 건 이것뿐이야.” 리사 같은 소녀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는 어쩌면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선지 리사의 입에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끌어안아야 해Embrace nothingness”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리사는 무시할 수 없는 도덕적 원칙에 주의를 집중하며, 인습에 타협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대개 고립되고, 이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는다. 그는 존중과 우정에 목마르다. 또 인기도 얻고 싶고 사랑도 받고 싶다.”(226) 그런 여덟 살 여자아이가 끌어안아야 하는 후진 환경과 거기서 마주할 매일매일의 환멸과 고립감을 생각해보면 리사가 내면을 성장시키는 데 열중하고, 아름다움과 선함에 열광하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역시 얘가 나와 아는 사이라도 됐다면 존경심이나 대견함보다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둘 다 깊은 애정에서 우러난 것이지만). 스프링필드에 퓨리오사라도 보내주고 싶을 만큼. “내가 아예 세상에 없어도 뭐가 달라지겠어요?”(229~230) “왜 언젠가 이걸 정신과 의사 앞에서 설명할 것 같은 예감이 들죠?” 같은 대사는 리사의 내면이 경험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87년, 20대 때부터 리사의 목소리를 연기해온 이어들리 스미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볼 때 리사의 비극은, 작가들이 끊임없이 그런 상실을 겪게 한다는 거예요. 리사는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뭔가를 훌륭하게 해내면, 자기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요. 악전고투로 얻은 승리지만, 즐기는 건 잠깐이죠.”

 

도덕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캐릭터가 작고 힘없고 주변적인 여자아이인 점은 아마도 필연적인 설정이겠지만(호머, 마지, 바트, 매기, 밀하우스, 스키너, 번스, 머피 등 어떤 인물을 떠올려봐도 그런 역할을 해낼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리사는 후려치기도 많이 당한다. 확실히 다른 모든 캐릭터보다 월등한 도덕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리사는 사교성이 없다, 잘난 체한다, 가르치려 든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며 도덕적 우월감을 느낀다, 자기애적 취향을 보인다, 너드 성향이다, 그래봤자 야만적인 만화를 보고, 아이돌을 숭배하며, 멍청한 인형(말리부 스테이시)을 가지고 노는 똑같은 어린애일 뿐이다 따위의 경멸과 조롱을 받는다. 심슨 가족 팬 아카이브 사이트에서는 다른 더 부족해 보이는 캐릭터들을 명백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후하게 평가해주거나 적어도 웃기고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주는 너그러운 아량과 함께 리사에게는 유난히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완벽을 기대하는 이중성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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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리사가 “난 도마뱀 여왕이다!”라고 선언하거나, 선정적인 만화영화를 보고, 바트와 티격태격하는가 하면 젖먹이 매기한테까지 질투를 보이는 모습이 웃기는 건, 그게 리사이기 때문이다. 또 나는 이런 모습들을 리사의 결점이 아닌, 장점들의 결과로 이해할 때 튀어나오는 웃음이 ‘거봐, 어차피 너도 나을 것 없는 인간이면서’라는 식의 조소보다 더 웃길뿐더러 더 마음에 든다. 리사가 더 낫다는 것을 믿어야, 우리는 “학교에서 쇼핑을 가르쳤으면 좋겠어” “힘든 일은 딸기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다 잊자” 같은 말을 하는 말리부 스테이시를 가지고 노는 리사를 보고 웃으면서도, 그런 말에 열 받은 리사가 인형 제작사에 항의하고 ‘리사 라이언하트’ 같은 인형을 만들어 저 구호를 “자신을 믿는다면, 뭐든지 이룰 수 있어”로 바꿀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고, 그것을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으니까.

 

<채식주의자 리사Lisa the Vegetarian> <리사와 천사 화석(회의주의자 리사)Lisa the Skeptic> 등 몇몇 리사 에피소드의 핵심 작가인 데이비드 X. 코언은 말한다. “리사가 뭔가에 진정으로 관심을 쏟는다고 믿는다면, 그건 당신도 그럴 거란 뜻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