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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격의 고전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
  • 지은이 | 이진경
  • 옮긴이 |
  • 발행일 | 2016년 03월 07일
  • 쪽   수 | 520p
  • 책   값 | 22,000 원
  • 판   형 | 145*217
  • ISBN  | 9788967353049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격格이라는 틀을 깨고 평가의 척도를 부수며
파격破格의 독법으로 읽은 고전소설들

효심 깊은 심청이 아닌 ‘반인륜적’ 심청,
다른 세상을 꿈꾼 길동이 아닌 기존 세계 질서 속으로 들어가길 꿈꾸었던 길동,
신데렐라의 미모가 아닌 ‘탈영토화 능력’을 가졌던 콩쥐…….
‘고전’이라는 확고한 자리로부터 끌어내려 다시 읽다

 

고전소설, 잃어버린 매력을 찾아서
19세기 말 조선을 방문했던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은 우리 고전소설에 대해 이렇게 평했습니다. “한국의 고전소설은 두세 권만 읽으면 전부 읽은 거나 다름없다. (…) 그러하니 우리네 아동용 우화 가운데 가장 졸작보다도 오히려 재미가 없다.”
정말 그런가요? 한번 봅시다. [심청전] [콩쥐팥쥐전] [홍길동전] [허생전] [장화홍련전] [흥부전] [숙향전] [전우치전] 등 우리에게는 익히 들어온 수많은 고전소설이 있습니다. 이들을 읽을 때 어떻던가요? 재미있던가요? 아닐 겁니다. 저 자신의 경험도 그랬으니까요. 책 읽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고전교양’이라며 주어졌던 소설들은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딘 소설이라면 인기가 있었던 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수많은 이본異本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주지 않습니까. 인쇄술은 물론 저작권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잘 알려진 텍스트를 새로 찍거나 필사하는 과정에서 개작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지요. 이리 개작되고 저리 개작되어 널리 유통되었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고전소설이 지루한 소설로 인식되는 건 너무나 엄숙한 해석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가령 [심청전]을 보지요. 이 작품을 읽을 때 우리에게는 해석지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심청이 제 몸을 던진 것은 눈먼 아비를 위함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심청전]은 제 한 몸 아끼지 않는 효孝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것이지요. 허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제 몸을 던지는 것이 과연 효인가요? 작품에서 보듯이 공양미 삼백 석을 다른 방법으로 얻을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홍길동전]도, [콩쥐팥쥐전]도, [허생전]도, [흥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읽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고정된 해석지가 있지요. ‘도덕’이나 ‘윤리’와 연결지은 해석지 말입니다. 효나 충·열을 강조하는 권선징악적 도덕이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겹도록 듣는 이야기이고 다들 잘 아는 내용이니 재미있다고 느끼긴 어려운데, 작품이 그걸 명시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해석 역시 그러하니 흥미를 가지기 힘들지요. 저는 거기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독해를 시도해볼 작정입니다. 가령 [심청전]을 ‘반인륜적’ 텍스트로 읽을 것이고, [홍길동전]을 혁명적인 텍스트가 아닌 보수적인 텍스트로 읽을 것이며, 그 작품들을 ‘고전’으로 만든 틀을 깨고, 그 틀을 직조하는 의미와 가치의 격자를 찢을 겁니다.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파격破格, 즉 격을 깨는 것, 기존의 해석 틀을 부수는 것입니다.

 

심청전에서부터 왕수재전, 금방울전, 옥소선전, 유우춘전, 최고운전까지
이 책은 크게 12장으로 구성됩니다. 각 장은 5-7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지요. 장마다 [심청전]이나 [숙영낭자전] 등 한두 편의 중심 텍스트를 다루고 있습니다만, 소제목에서 다른 텍스트를 끌어다가 논의를 보충했습니다. [왕수재전] [금방울전] [환관의 아내] [옥소선전] 등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소설을 주로 썼고, 이름부터 낯선 소설들인지라 내용도 함께 요약했습니다. 읽다 보면 이런 소설이 다 있었던가 싶어 놀랄 겁니다. 가령 [환관의 아내]는 17세기 야담집인 [천예록] 저자의 손자인 임매가 쓴 것인데, 그 내용이 우리가 익히 아는 ‘고전소설’과는 많이 다릅니다. 짧게 요약해보지요. 양갓집 규수였으나 조실부모하여 외숙모와 함께 살던 주인공은 환관에게 시집을 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야밤에 담을 넘습니다. 운영과 김진사가 그러했듯(운영전), 사랑 때문이 아닙니다. 성욕 때문이지요. 집을 나온 그녀는 결심합니다. 첩이 되어 정실과 다투는 처지가 되기는 싫으니 중을 골라 따라가야겠다고. 그것도 무조건 처음 만난 중을 말이지요. 이처럼 사랑은 내게 다가온 누군가로 인해 담을 넘게 하지만, 성욕은 아직 누가 다가오지 않았는데도 담을 넘게 합니다. 사랑과 달리 대상이 ‘누구인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녀는 바로 그렇게 합니다. 도망치려는 중을 “아내도 얻고 재산도 얻게 되니 좋은 일 아니냐”며 붙잡아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교합하지요. 여기까지만 봐도 흥미진진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더합니다. 이제 그녀의 남편이 된 중이 절에 가 사정을 털어놓자 놀란 스승이 집으로 쫓아와 소리 지릅니다. 그러자 그녀는 스승의 뺨을 후려치며 이 사람은 본래 자기 남편이라고 욕을 하지요. 연신 뺨을 치자 애처롭게도 그 스승은 “이 여자 사납구나! 이 여자 못됐구나! 이 여자 정말 무섭구나!” 하며 도망쳐버립니다. 어떻습니까? [삼강행실도]며 [열녀전]을 철저히 따르는 소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지요? 심지어 이 작품은 이런 성욕을 부정하지 않으며, 부정적 결과로 저주하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국가가 “환관의 집에 둔 여인들을 모두 풀어주어 젊은 승려의 배필로 삼게 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 책에서 하려는 것은 ‘숨은 고전소설 찾기’가 아닙니다. 인지도가 낮은 고전소설을 소개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익히 알려진 고전소설들을 중심 텍스트로 삼지 않았을 겁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저는 기존 해석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독서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고전소설 속 인물들이 갑갑한 해석 틀에서 뛰쳐나오게 만들 겁니다. 이를테면 앞서 언급했던 [환관의 아내]는 제10장에 나옵니다. 제10장은 [변강쇠가]를 중심으로 풀어간 장입니다. 옹녀나 변강쇠라는 이름이 익숙하시지요? 이 중에서도 옹녀는 좀 독특한 인물입니다. 같이 잔 남자가 수없이 죽어나가는데도 남자와 자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말 그대로 ‘성욕의 화신’이지요. 옹녀와 변강쇠가 음란하게 노래하는 장면을 보면 성욕을 익살스럽게 긍정하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자기만 하면 남자를 죽게 하는 옹녀를 보면 실은 그런 성욕에 대해 저주를 내리는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저는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는 성욕, 특히 옹녀로 상징되는 여성의 성욕에 대해 처음부터 ‘청상살’이라는 저주를 들씌워놓고 시작하여 가족이니 남편이니 구분 없이 넘나드는 성욕을 남성적이며 가부장적인 양식에 따라 익살스레 조롱하는 텍스트일 뿐만 아니라, 변강쇠라는 부랑하는 ‘잡놈’을 비난하는 텍스트로 보입니다. 이는 [변강쇠가]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과 상반되는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읽었는지는 [심청전]을 어떻게 읽었는지 답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심청전]이든 [변강쇠가]든 기존 해석 방식에서 어떻게 다른 독해를 이끌어냈는가/이끌어낼 수 있는가가 이 책의 주제이니까요.

 

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다시 [심청전]을 보지요. 앞서 제가 던졌던 질문을 기억하시겠지요. ‘아비를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 진정 효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먼저 지적할 점은, 심청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장승상 댁 부인이(심청을 수양딸로 삼고 싶어했던 분이지요) “쌀 삼백 석을 이제라도 다시 내어줄 것이니 뱃사람들 도로 주고 당치 않은 말 다시는 [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심청입니다. 한데 거절하는 이유가 더 이상합니다. “부모를 위해 공을 드릴 양이면 어찌 남의 명분 없는 재물을 바라며, 쌀 삼백 석을 도로 내어주면 뱃사람들 일이 낭패이니 그 또한 어렵고, 남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뒤에 다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 그 말씀을 따르지 못하겠”답니다. 승상 부인이 먼저 말 꺼내는 것을 보면 쌀 삼백 석을 내어주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과의 약속이 중하다는 이유로 거절하다니요! 더욱이 “늙으신 아버지를 홀로 두고 죽는 것이 불효인 줄” 잘 알면서도 또 자신이 죽은 뒤 아버지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을 알면서도 그리할 수는 없습니다. 심청은 왜 피할 수도 있었고, 효를 위해서라면 피하는 게 좋았을 자신의 죽음을 향해 고집스레 밀고 나갔을까요? 아니, [심청전]은 왜 심청을 그런 방향으로 밀고 갔던 것일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쩌면 [심청전]은 절대적 명령(효)에 순종하는 심청을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그 명령의 지고함이 아닌 황당함을 드러내는 역설적 텍스트가 아닐까요? 자식을 야단치다 ‘나가 죽어!’라고 했는데 그놈이 정말 나가 죽는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이 경우 ‘절대적 복종’은 항의입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극단의 항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 명령의 부당성을 드러내는 항의 말입니다. 이것이 과한 해석처럼 보인다면, 또 하나 지적할 점이 있습니다. 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효심이 깊었던 심청이라면 용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집에 가 심봉사를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심청은 그렇게 하지 않지요. 임당수에 몸을 던진 순간 절대적 명령에 복종하던 심청은 죽어버렸으니까요. 용궁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심청 안의 다른 누군가가 다시 태어났으니까요. 그렇게 다시 태어난 심청은 눈먼 아버지와 눈먼 도덕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눈먼’ 삶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심청전]은 맹목적 효를 설파하고 강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효이기를 중단한 효’를 통해 효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입니다.
덧붙여서 [홍길동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풀어놓을까요. 부제가 ‘심청은 보았으나 길동은 끝내 보지 못한 것’이니 심청이 이야기만 들으면 반쪽만 들은 셈이 아닙니까. 이미 말했듯 심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본 게죠, 자신이 따랐던 맹목적인 효가 실은 눈먼 효였음을. 눈을 뜬 겁니다. 그렇지만 길동은 어떤가요? [홍길동전]은 흔히 서얼로 태어나 이 세계의 질서에 불만을 품은 길동이 활빈당 활동을 펼쳐나가고 ‘율도국’을 세우기까지 하는 가히 혁명적인 텍스트로 해석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그런가요? 길동은 끝끝내 ‘호부호형’할 수 있는 지위를 원하지, 자신의 처지가 부당함을 호소하지 않습니다. 부당하다 느꼈다면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신분제를 철폐했어야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지요. 그는 오히려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도 기존 질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그는 ‘왕’이 되길 원했던 것이지, 신분제로 뒤덮인 이 나라를 뒤엎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길동은 끝끝내 보지 못합니다, 자신이 ‘호부호형’할 수 없었던 한恨의 진짜 이유를.

 

팽팽한 긴장 속에서 고전소설 읽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요. [심청전]을 읽을 때 단 하나밖에 없었던 해석지가 이제는 어떻게 보이시나요. 저는 제 해석만이 옳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고전소설은 제가 공부하던 사회과학이나 철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고,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수많은 책과 논문을 참고했습니다. 그것들은 고전소설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읽게 해주었지요. 저는 다만 ‘다른 해석지’를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들을 가능한 한 뜻밖의 작품으로 만나게 하고, 약간의 당혹 속에서 정말인지 확인하고자 그 작품을 다시 찾아 읽게 하고 싶었습니다. 감히 흥분이라고는 못 해도 어떤 최소한의 흥미를 통해 그 작품들이 여러분의 사유 속, 혹은 삶 속으로 들어가길 바랐습니다. 그리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다르게 사고하고 세상을 달리 볼 수 있는 파격의 힘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또 다른 파격의 시도들이 그 작품들을 찾아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 작품들이 여전히 ‘고전’의 자리 주변을 맴돌게 된다면, 그것이 파격의 힘을 가동시키는 ‘파격의 고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효심 깊은 심청이 아닌 반인륜적 심청,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길동이 아닌 기존 세계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했던 길동을 보러 함께 가지 않으시렵니까.

목차

머리말

제1장 심청, 마조히스트?: 윤리적 소설과 ‘반인륜적’ 독서
작품을 어떻게 ‘절단’할 것인가?│고전소설, 잃어버린 매력을 찾아서│〈심청전〉과 소설의 윤리│심청, 마조히스트?: 〈심청전〉의 역설적 전략│연꽃 속의 심청은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심청전의 ‘반인륜적’ 윤리학

제2장 콩쥐의 신발과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환원론적 해석과 내재적 분석
콩쥐와 신데렐라는 같은 인물인가?: 환원론적 해석의 문제│콩쥐의 능력과 팥쥐의 음모: 내재적 분석│숙향전=바리공주?: 유비적 해석을 넘어서

제3장 천상의 숙향과 지상의 숙향: 이중적 사건화와 ‘모른다고 가정된 주체’
상이한 세계의 연계│신화적 사건화: 〈숙향전〉의 경우│두 세계의 비대칭성과 암묵적 서사 규약

제4장 구미호와 용왕의 대결: 동물과 인간의 경계, 혹은 왕의 자리에 대하여
두 가지 변신술│용과 구미호는 무엇을 두고 싸우나?: 〈왕수재전〉│인간화된 동물과 인간을 침범하는 동물│변신능력과 왕의 권력

제5장 전우치 대 홍길동: 변신술과 도술의 상이한 유형들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전우치는 어디에서 변신하는가?: 변신술의 위상학│인간의 도술과 물질성의 도술: 〈박씨부인전〉과 〈금방울전〉│유희적-반국가적 도술: 〈전우치전〉│도구적 도술과 국가적 도술: 〈홍길동전〉과 〈박씨부인전〉│술법의 유형들

제6장 동냥하는 심청과 날품 파는 흥부: 공동체의 능력과 무능력
공동체와 돈│공동체의 힘: 〈심청전〉│공동체가 줄 수 없는 것│축장과 잉여인간: 〈흥부전〉│생명의 순환계와 탕진의 경제학│〈흥부전〉의 ‘근대성’과 놀부의 ‘진보성

제7장 〈허생전〉의 경제학과 〈토끼전〉의 생태학: 경제적 순환계와 생명의 순환계
공동체와 돈: 〈허생전〉│잉여들의 공동체│개체의 신체는 모두 공동체다│속임수의 교환: 〈토끼전〉│생명의 평등성│토끼는 어떻게 ‘삼강’을 능멸했는가?│공동체의 두 가지 외부

제8장 장화·홍련은 보았으나 사정옥은 끝내 보지 못한 것: 가족, 혹은 인륜 속의 구멍
‘계모’, 가족 내부의 적?│낙장불입의 ‘이념 소설’: 〈옥낭자전〉│윤리에 의한 윤리의 파탄: 〈사씨남정기〉│반복과 변복: 〈김씨열행록〉│가족 안의 구멍: 〈장화홍련전〉

제9장 운영의 사랑과 양소유의 사랑: 사랑의 매혹, 담장 너머로 이끌다
사랑과 매혹│때아닌 욕망은 더 멀리 간다: 〈옥소선〉│매혹과 휘말림의 힘: 〈운영전〉│가족을 초과하는 사랑의 욕망: 〈구운몽〉

제10장 변강쇠의 죽음과 숙영낭자의 죽음: 죽어서도 넘지 못한 것과 넘어서기 위해 죽는 것
담을 넘는 성욕의 흐름: 〈환관의 아내〉와 〈변강쇠가〉│자유로운 성욕의 추방과 유랑하는 삶에 대한 저주: 옹녀와 변강쇠│‘잡놈’ 변강쇠마저 옹녀의 정절을 요구하다!│‘운명’의 명령마저 위반하게 하는 것: 〈숙영낭자전〉│의심의 시선과 치울 수 없는 주검│구멍과 심연

제11장 〈금오신화〉와 〈최고운전〉: 이계와의 만남, 혹은 외부를 본 자의 고독
세계의 외부, 혹은 외부세계│은둔자와 외부: 〈유우춘전〉과 〈설생전〉│다른 세계를 본 자의 고독: 〈금오신화〉│다른 세계로부터의 탄생: 〈최고운전〉│매혹과 두려움 사이의 동요│황제의 수수께끼, 혹은 비밀의 세 유형│반어의 논리학, 외부자의 정치학

제12장 홍길동의 분신들과 허생의 ‘잉여’들: 상징적 전쟁과 탈주의 정치학
‘사회소설’과 저항?│호칭의 문제와 인정욕망: 〈홍길동전〉│증상적 기호의 상징적 전쟁│상징적 전쟁의 귀착점│침입의 정치학과 진입의 기호학│허생의 경제학적 실험: 〈허생전〉│이탈의 정치학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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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등의 학문에서도 그렇지만, 문학이나 예술에서 ‘고전’이란 탁월하다고 간주되는 확고한 자리를 뜻한다. 누구나 마땅히 읽고 배워야 하는 것. 이로써 사물이나 세상을 보는 올바른 틀을 습득하게 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이다. ‘고전’을 공부함으로써 나를 ‘바로잡아’ 바른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이다. ‘문학사’는 이런 ‘고전’들을 질서 있게 배열한 것이다. 문학사를 연구하는 것은 ‘바른 고전’들을 찾아 합당한 자리를 주고, 그 ‘고전’들에 바른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이다. 종종 어떤 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것은, 그것에 주어질 자리가 어디인지를 둘러싸고 다투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역사, 그 역사가 배열한 ‘고전’들을 통해 우리는 바른 문학, 바른 삶에 대해 배우게 된다.
_「머리말」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이진경

본명은 박태호인데, 1987년 출판한 첫째 책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뜻하지 않게 허명을 얻으면서 본명은 잃어버렸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이고 지식공동체 수유너머104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박사학위논문은 서구 주거공간의 역사와 주체생산방식에 대한 것인데 나중에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으로 출판되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코뮨주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삶을 위한 철학 수업≫, ≪파격의 고전≫, ≪불교를 철학하다≫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