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 조선의 양반 문화 1
  • 지은이 | 권오영
  • 옮긴이 |
  • 발행일 | 2011년 06월 20일
  • 쪽   수 | 368p
  • 책   값 | 28,000 원
  • 판   형 | 175*250
  • ISBN  | 9788993905632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조선을 이끈 가문과 족보의 내밀한 이야기
지식까지 독점한 지배세력은 세계에서 조선 양반이 유일했다
조선시대 연구자들이 명백히 밝힌 조선의 가문권력과 그 전통 

 

이 책의 출간 의의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행동과학자 혹은 경제심리학자가 조선시대를 파고든다면 무엇보다 먼저 가문의 족보와 그 계보에 얽힌 다양한 변수들을 묻고 따질 것이다. 조선을 이끌어간 양반들의 행동을 가장 근저에서 규정한 것은 바로 ‘가문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그간 조선시대를 다룬 역사 연구는 이 ‘가문의 논리’에 소홀했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조선시대 대표 가문의 계보가 어떻게 설정되고 서로 얽혀들었으며, 각 가문을 지탱한 가문의 철학, 인적 구성, 문화적·경제적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조선시대 역사를 움직인 ‘실질적인 변수’이자 잘 드러나지 않는 ‘내재적 변수’의 한 측면을 파헤치고자 한다. 이성무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이끄는 뿌리회 및 뜻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은 현지답사와 문헌 연구를 토대로 하여 전체 4권 분량으로 조선을 이끈 명문가에 대한 계보학적, 인문학적 탐색을 해나갈 예정이다.

 

문치의 나라 조선, 그리고 양반

‘문文으로 빚고 예禮로 다듬은 나라’ 조선은 이 땅에 문치文治의 꽃을 만개시킨 역사적 무대였다. 조선의 설계자들은 반듯한 나라, 학문을 좋아하고 예의를 숭상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주자학의 이론과 가치를 국가 경영에 적용·주입시켰고, 이런 가치는 양반들에 의해 생명력을 지속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다. 양반은 국가 경영의 주체였고, 주자학을 떠받드는 이념의 수호자였으며, 문치를 앞장 서 이끄는 향도嚮導와 같은 존재였다. 이 점에서 양반은 관료이자 학자였으며, 격조 높은 문화를 디자인하고 다듬는 문화예술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식을 독점하며 정치권력을 오로지했고, 사회·문화 전반에서 양질의 삶을 향유했다. 지식과 권력의 독점, 사회문화 영역에서의 배타적인 삶의 품격은 양반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기득권이었다.

전통시대 한국에는 혈통을 근간으로 하는 다양한 ‘집안’이 존재했다. 신라시대에는 세습적 특권층인 성골?진골이 있었고, 고려 귀족사회에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 불리는 권력 가문이 있었다. 성골?진골은 사회신분적인 속성이 강한 게 분명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집안’이나 ‘가문’과 별개의 것은 아니었다. 재상지종은 왕실과 혼인할 만한 격을 갖춘 집안이라는 점에서 고려시대 권력 가문의 실체였다. 성골과 진골의 존엄이 신이 내린 신분에 가깝고, 재상지종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어도 사가史家들은 이들을 명가라 평하지 않았다.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창은 단순히 왕조의 주인이 바뀌는 역성혁명에 그치지 않았다. 불교에서 유교로 이념과 사상이 바뀌었고, 귀족에서 양반으로 지배층이 교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반은 주자학으로 무장한 지식인,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관료, 탄탄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지닌 재력가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 자신들의 시대를 열어갔다. 세계 역사상 정치권력과 부를 가진 지배층은 수없이 존재했지만 지식까지 독점한 정치권력 집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조선의 양반이 유일했다. 이 점에서 조선시대와 양반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시대와 존재였다.

 

양반의 부각과 가문권력의 등장

조선 사회에는 가통家統, 학통學統, 대통大統이라 하여 이른바 3통이 존재했다. 학문적 전수의 계통과 질서를 담은 학통이 ‘학문권력’을, 왕통의 계승을 뜻하는 대통이 ‘정치권력’을 상징한다면 가계의 계승을 뜻하는 가통은 ‘가문권력’의 상징이었다. 가문권력은 다시 혼인을 매개로 여러 문벌이 결합된 ‘혈연권력’으로 확장되어갔다. 조선의 양반들은 이를 세의世誼 또는 세교世交로 순화시켜 표현했지만, 혈연권력은 조선조 양반의 정치사회적 존재 원리 또는 양태를 설명하는 핵심어의 하나임에 분명했다. 우리는 ‘집안’ 또는 ‘가문’을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家의 의미는 생각보다 법제적이다. 제후에게 나라가 있는 것처럼 원래 ‘가’는 대부가 되어야 형성할 권리가 주어졌다. 엄격히 적용하면 가문은 조선의 양반 중에서도 고급관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며, 원칙적으로 ‘선비 가문’, ‘중인 가문’, ‘평민 가문’과 같은 용어는 설정될 수 없다.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가문의 존재가 부각되고 그 영향력이 강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이런 변화가 나타난 것은 혼인 및 상속제도의 변화와 관련이 깊었다. 혼인에 있어서는 남귀여가혼男歸女嫁婚을 제한하는 대신 친영親迎이 강조되고, 상속에 있어서는 자녀균분에서 봉사조의 강화를 통한 장자 중심으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특히 횿란 이후 예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고, 『소학』 『가례』 등 주자학적 실천윤리나 예제가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세상의 모습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예학禮學의 시대’ ‘종법宗法의 시대’가 그 서막을 열게 되었으니, 그것은 곧 부계친 중심의 ‘남자의 시대’ ‘가문의 시대’를 뜻했다.

16세기 이전의 조선사회가 인재를 평가하고 등용함에 있어 집안보다는 당자當者의 역량과 성취를 중시한 측면이 강했다면, 그 이후는 개인의 가치와 존재성도 가문의 틀 속에서 계량화되고 평가되는 경향을 보였다. 전자가 현실주의 혹은 국가주의적 발상의 적용이라면 후자는 집안이라는 창을 통해 그 구성원을 바라보고 등위를 규정했다는 점에서 관념주의나 가족주의적 사고의 산물로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이 17세기 이후를 문벌의 시대로 규정하는 배경이고, 또 이 시기의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문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이다.

 

양반 문화의 창, 가문

가문을 아는 것과 어떤 집안을 칭송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가문을 아는 것은 그들의 존재 양태와 인적 네트워크, 사상과 문화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사회와 국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진단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양반 기록이 누군가에 의해 걸러지고 축약된 결과를 담은 것이라면 그 원인이나 전개의 적나라한 모습은 개인과 가문, 가문 상호간의 관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 많다. 이런 요소를 망각한 역사 연구라면 참신한 결론을 도출하기 어렵고, 이런 면모를 도외시한 이해 방식은 당대인의 삶과는 동떨어진 허상일 뿐이다.

가문에 대한 이해는 족보에 대한 학습에서 시작된다. 족보를 죽은 자의 명첩일 뿐이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지만, ‘사자死者의 명첩’에서 생동하는 역사적 정보를 채집하는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족보와 보학이 사랑방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는 누구의 외외증손인데, 무슨 벼슬을 지냈고, 그 아버지는 어디 현감 시절에 무슨 비리를 저질러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 서자를 몇이나 두었는데 지금 아무개가 그 자손이다’는 식의 언급은 호사가의 재담일 뿐 보학의 본질일 수 없다. 우리가 관심을 둘 것은 양반들이 어떤 대상과 어떤 방식으로 피를 나누었는지 아는 것이고, 그런 방식을 통해 구축된 가문이나 혈연권력이 양반의 정치·사회·문화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진단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래정씨 임당 정유길 가문과 안동김씨 청음 김상헌 가문의 400년 세교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역시 장인과 사위 관계였던 안동의 의성김씨 김진 가문과 전주유씨 유성 가문은 혈연적 유대를 학문사회적 연대로 발전시키면서 양가 모두 영남의 양반사회에서 굳건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천금수류川金水柳’로 불리며 주변 양반들의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가문을 통해서 보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가문 간의 연대는 정치·학문·사회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숙종대 소론의 3대 영수 남구만·박세당·윤증은 서로 혼맥으로 얽혀 있었는데, 남구만과 박세당은 처남-매부 사이였고, 윤증은 박세당의 아들 박태보의 외삼촌이었다. 혼맥에 기반한 양반의 세교는 내외 자손의 현달과 더불어 벌열성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양주조씨 출신 조방좌의 내외 자손 중에는 정승 6명(이산해·이덕형·유성룡·최석정·서문중·최석항), 판서 6명(조언수·조사수·송언신·김신국·이경전·조존성)을 비롯하여 1명의 부원군까지 배출되었으며, 해주오씨 오희문吳希文의 내외 자손 중에서도 정승 5명(오윤겸·신익상·오명항·신완·심수현), 대제학 1명(오도일), 판서 6명(오도일·오명준·오언유·이기조·이규령·정제두), 감사 4명(구봉서·심연·김시걸·김몽신)이 배출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혈연권력의 실체인 것이다.
학문적 영역에서의 가문적 연대 양상 또한 이채로운 것이 많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16세기 사림파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한 이연경은 사위 셋을 문인 가운데서 골랐다. 노수신, 강유선, 심건이 바로 그 주인공인데, 이들과 그 자손들은 혈연과 학연의 중첩관계를 바탕으로 탄수학맥灘?學脈의 요체로 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남명학파의 종사 조식은 애제자 곽재우와 김우옹을 외손녀 사위로 맞았고, 한려학파의 두 거두 정구와 장현광은 질서와 처삼촌의 관계였으며, 낙론학파의 모태를 이룬 이단상과 김창협은 사제 간인 동시에 옹서관계였다. 특히 이황―김성일一―장흥효―이현일―이재―이상정―유치명―김흥락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은 피와 학문의 교차성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현일은 장흥효의 외손자, 이재는 이현일의 아들, 이상정은 이재의 외손, 유치명은 이상정의 외증손이고, 김흥락은 김성일의 11세손이었다.

가문을 알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사료를 해석하는 맛도 달라진다. 송시열이 한 살 터울의 13촌 아저씨인 송준길을 형으로 부른 것은 사계 문하 동문으로서의 평칭일 수도 있지만 선외가 쪽으로 6촌 형제간이라는 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영조연간 영남남인 우복 정경세의 집안에 송사가 있었을 때 기호학파의 명유 도암陶庵 이재가 진정서에 연명한 것 또한 그가 정경세의 외현손이란 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고, 단양군수가 한산이씨 집안에 대해 면세조처 한 것은 이 집안이 숙종비 인원왕후의 외외가였기 때문이었다. 사료 어디에도 서로간의 척분을 언급한 대목이 없지만 가문을 알고 혼맥을 꿰뚫어보면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다. 양반 가문들 상호간에 유대관계가 이러한 것을 보면, 가문을 모르고 족보를 따지지 않고 어찌 조선시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한편 양반들은 가문의 전통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조직을 운영했고, 다양한 행사를 통해 가문의식을 고양시켜나갔다. 문계門契나 종계宗契를 조직하여 친족 간의 결속을 도모한 것은 물론이고, 의성김씨 청계가문의 경우처럼 내외 자손들을 아우르는 황산계黃山契를 조직하여 혈연적 유대를 강화한 예도 많았다. 특히 서울 및 경기지역에서는 정치 및 사회 결사체적인 계모임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반남박씨 박세당 가문, 전주이씨 이경직·경석 가문, 달성서씨 서종태 가문, 연안이씨 이만상 가문이 중심이 된 세강계世講契는 이른바 ‘근기소론 13가문’의 결속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특별했다.
양반들에게는 놀이와 행사도 중요한 교류와 단결의 장이 되었다. 안동 고성이씨 집안의 이종악李宗岳이
남긴 그림첩에는 뱃놀이라는 유람을 통해 선조의 유적을 돌아보며 혈족 간에 친목을 다지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고, 1679년(숙종 5) 김성일의 ‘시호잔치延諡宴’에는 내외 자손 수백 명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특히 불천위를 모신 가문의 종족의식은 더욱 특별했다. 흔히 ‘큰제사’로 일컬어지는 불천위 제사는 집안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여겨졌고, 종손은 흡사 군주와 같은 존재로 추앙되었다. 종손의 상을 당하면 온 지손이 상복을 입은 것도 이런 인식의 반영이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양반에게는 놀이조차도 집안과 별개인 것이 없었고, 선조 관련 뜻 깊은 행사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긴요한 일이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인간적 가치와 사회적 입지를 향상시키는 가장 본질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의 면면들

조선왕조 500년은 한 나라의 성쇠의 과정인 동시에 수많은 가문이 명멸을 거듭하는 역사적 시간이기도 했다. 잦은 정변은 한 가문의 운명을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했고, 뛰어난 능력 하나만으로 교목세가의 발판을 다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집안도 태종에게 숙청을 당하는 것이 현실의 냉혹함이었고, 왕조 초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이 있었던 훈구 가문은 사림파의 끈질긴 도전 속에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가문의 명운도 시대를 비껴갈 수 없음을 뜻한다.

가문을 보전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조선의 명가들은 슬기로움과 지혜를 바탕으로 집안을 유지·발전시켰고, 저마다의 가풍을 이어주며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러면 명가의 기준은 무엇인가? 양반 사대부에 있어 왕조 500년을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는 역시 벼슬이었다. 양반이라는 용어 자체가 벼슬에서 기인함은 다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학자보다는 관료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마련이었고, 16세기 이후 도학을 숭상하여 학자를 존중하는 시대에 이르러서도 양반들은 벼슬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명가의 일차적 요건은 벼슬이라 하겠지만, 벼슬만 이어진다고 그 조건이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명가가 되려면 가풍과 저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당대인에게 모범이 되거나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무언가여야 했다. 가령 청백이나 효열이 그런 예일 수 있고, 도학이나 문한 혹은 절개나 의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책에 소개된 10개 가문은 어떤 집안들인가

이 책에 소개된 10개의 가문은 이러한 경향을 망라하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가들이다. 용인에 기반을 둔 포은 가문은 충절의 상징이자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로 추앙된 정몽주의 후손답게 절의와 학문의 전통을 지키며 사림사회의 본보기가 되었고, 학문과 경세經世를 강조했던 동고 가문의 가풍은 공직자의 올바른 도리는 어떤 것이고 공직자 가문이 지향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동방의 주자로 일컬어지는 퇴계 가문은 학문의 위대함과 생명력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고, 호서의 명가 사계 가문에서는 지행합일, 즉 배움(학문)과 실천(벼슬)의 조화를 추구하며 시대를 헤쳐가는 힘을 느끼게 한다. 근기남인의 명가 분봉 가문에서는 위기를 극복하는 저력, 청신淸愼과 중용中庸에 바탕한 너그러움의 리더십을 읽을 수 있고, 남명·퇴계학을 절충한 각재·송정 가문은 행신行身과 치가治家 그리고 학문에 힘쓰며 선비정신을 꼿꼿하게 지켜나가는 영남 양반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호서를 대표하는 학자관료 집안인 탄옹·유회당 가문은 초당적 학맥과 혼맥을 지향하면서도 예학, 출처, 경세, 효우에 있어 독특한 가학 및 가풍을 창조하며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힘을 발견할 수 있고, 양명학자 하곡 가문에서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신념과 열정을 바탕으로 진실한 학문을 갈망했던 학자정신이 읽혀진다. 외암 가문에서는 보수의 땅에서 싹튼 진보적 사고와 학술과 문화의 전통을 소담스럽게 이어가는 호서 양반의 아정한 정서가 생동하고, 화서 가문에서는 학문에 대한 무서운 열정과 진지함을 바탕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나라를 사랑할 줄 아는 참된 유자 가문의 깊은 내면을 느끼게 한다.

이들 가문은 서울 및 경기, 호서, 영남 등 그 터전이 서로 달랐고, 학파나 정파 그리고 가치와 지향도 한결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사림시대를 살며 정치·학술·문화계의 리더로 활약하며 시대정신에 충실했고, 자가의 번영을 넘어 세상의 발전을 함께 고민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주역이자 선각자들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 삶의 환경과 조건들을 조화롭게 용해시켜 여느 가문과는 차별되는 가풍을 창조하고, 또 지켜옴으로써 전통시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그래서 이들이 남긴 삶의 자취는 특별한 집안의 이채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해야 할 역사적 자산이 된다. 이것이 이들 가문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삶의 흔적을 이 한 책에 담아 펴내는 이유이다.

목차

1장 오직 한 임금만 모셔 양반의 전범이 되다
– 영일정씨 포은 가문 | 이근호

2장 훈구파의 핵심 가문이 사림으로 전향한 까닭은
– 광주이씨 동고 가문 | 이성무

3장 조선 성리학의 뿌리를 내리다
– 진성이씨 퇴계 가문 | 김문택

4장 예학의 근간, 호서 사림의 주축이 되다
– 광산김씨 사계 가문 | 이영춘

5장 18세기 근기남인의 중심 세력을 형성하다
– 연안이씨 분봉 가문 | 김학수

6장 퇴계학에 맞서 남명학파의 맥을 잇다
– 진양하씨 각재 송정 가문 | 이상필

7장 조선 최고의 혼맥으로 기호남인의 학풍을 잇다
– 안동권씨 탄옹과 유회당 가문 | 성봉현

8장 극심한 당쟁에서 강화 양명학의 새 길을 열다
– 영일정씨 하곡 가문 | 이기순

9장 조선 3대 논쟁, 호락논쟁의 중심에 서다
– 예안이씨 외암 가문 | 임선빈

10장 비범한 주자학자로서 의병운동의 선봉이 되다
– 벽진이씨 화서 가문 | 권오영

미리보기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한국은 중국의 대륙문화에 예속되어 중국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문자도 한문을 썼고, 문화도 중국 것을 본떴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역사는 그늘에 가려졌고 중국 역사만 우뚝이 서서 그 중심 줄기가 되곤 했습니다. 이른바 중국화의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그러던 중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서세동점의 물결을 타고 서양의 해양문화가 닥쳐오자 대륙문명은 폐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전통적인 가치인 중화주의는 버려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고, 양반 유학자들도 나라를 망친 자들로 매도되곤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서구적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동양적 가치를 재발견해  제3의 체제를 참조할 방법은 없겠는가 하는 고민에서부터 ‘뿌리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즉 우리의 오랜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전통에서 현대에 맞는 종은 것은 재창조하고 나쁜 부분은 과감하게 고쳐나가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운동에는 한국 명가의 지도자들부터 동참 시켜야 한다는 뜻을 세웠습니다. _「본문」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권오영

영남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한국사학 전공)로 있다. 저서로는 『최한기의 학문과 사상연구』,『조선 후기 유림의 사상과 활동』,『혜강 최한기』(공저),『이재난고로 보는 조선지식인의 생활사』(공저)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최한기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현실인식」,「한주 이학의 전통과 그 사상사적 의의」,「19세기 영남학계와 면우 곽종석의 이학」,「백범 김구의 청소년기 사상과 애국활동」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