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 늙어갈 용기 자유롭고 행복해질 용기를 부르는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
  • 지은이 | 기시미 이치로
  • 옮긴이 | 노만수
  • 발행일 | 2015년 06월 25일
  • 쪽   수 | 388p
  • 책   값 | 16,000 원
  • 판   형 | 145*215
  • ISBN  | 9788967352165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왜 남의 인생을 사는가?
왜 몸말(병)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왜 늙음을 젊음의 완성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왜 늙어갈수록 허영심·권력욕에 휘둘리는가?
(……)
왜 늙음·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가? ‘
사는 날까지=죽는 날까지’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죽음 뒤에 삶은 계속되는가?
마지막은 어떤 풍경이어야 하는가?

 

마흔, 아들러를 읽어야 할 시간
간절한 것은 ‘동안 성형’ ‘노화 방지’ ‘연명 치료’와 같은 기술이 아니라 ‘멋지고 곱게 나이 들기 위한 용기’ 같은 ‘마음의 힘’일지 모른다. 자꾸 깊어지는 시간처럼 삶도 ‘나이 들 용기’로 깊어가고 아름다운 가치를 지닌 채 흘러간다.

서른이나 마흔 이후에 대한 생각의 대반란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아픔·늙음·죽음·잘삶에 대한 아들러의 유일한 교양심리학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동생·모친의 요절, 치매 걸린 부친 간병, 죽을병·대지진·원전사고를 경험한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가 지금까지의 사생死生철학을 근본부터 뒤집은 자전 심리학 에세이로서 최고 베스트셀러 저자가 쓴 필생의 역작이다. 아마존 일본에 올라와 있는 다음 독자 서평을 보면 이 책의 차별성이 잡힌다.

“자칫 고민하는 청년들의 인생지침서로만 비치기 십상인 게 아들러 심리학이다. 그러나 남은 삶이 불안하거나, 병에 시달리거나, 나이 들수록 죽음이 두려운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이 책은 병·늙음·사멸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한정된 시간 속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용기’를 어떻게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과 이를 축으로 한 지은이의 사색이 요체다. 아들러 심리학은 젊은이의 전유물이 아닌 것이다.”

이 평가대로, 반려견의 이름마저 ‘아들러’로 지을 만큼 아들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최고의 아들러 전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꺾인 일흔’ ‘꺾인 여든’ 무렵 이후 세대를 위해 지은 ‘아들러의 유일한 생로병사 심리학 대중교양서’다.
모두 5장으로 나뉘었다. 장별로 ‘타자(대인관계)·질병·나이듦·죽음·잘삶well-being’이라는 “인생의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대화할 용기’ ‘몸말에 응답할 용기’ ‘늙어갈 용기’ ‘책임질 용기’ ‘행복해질 용기’를 제각기 호명하고 있다. 내용은 지은이의 개인·가족·사회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더불어 아들러의 정신의학 임상 사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과 같은 여러 소설에 나오는 일화들을 통해 인생의 과제에 대처하는 방안을 사변적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혹은 냉정하게 때로는 숨이 멎을 듯 단도직입적인 화법―아들러 심리학의 특징이다―으로 모색하고 있다.
지은이는 유년 시절 조부와 조모, 동생을 차례로 잃었고, 모친은 마흔아홉 살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얼마 뒤 요절했으며, 알츠하이머 치매로 고생하다가 사망한 부친을 오랫동안 간병한 경험을 갖고 있다. 2006년에는 지은이 자신에게 심근경색이 찾아와 죽음의 문턱에서 관상동맥 우회수술을 받았으며(아이러니하게도 아들러 역시 남동생의 죽음과 어머니의 지병이 삶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자신은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목격하고 아들러 심리학으로 조망하는 ‘질병·노화·죽음’에 대한 책을 혼신의 힘으로 집필해나갔다. 아들러의 원전을 접해본 독자라면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이 책에는 아들러의 말이 직접 인용되지 않더라도 아들러의 사상이 직간접적으로 응축되어 있다. 지은이의 말은 곧 아들러의 말이나 진배없다는 점을 유념해달라는 부탁이다.

 

염통처럼 팔딱거리는 직설 담론
“용기는 한 스푼의 물약처럼 떠넣어줄 수 없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훈련과 용기를 갖는 훈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완전히 표리일체를 이룬다.” 아들러는 관념적·종교적 해석을 배제하고 인간 심리와 실존 및 사회 현실로 질병과 늙음, 죽음을 파헤쳤다. 그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삶, 공감능력, 타자 공헌에 배고프고 목마른 자의 편에 서 있다.

프로이트, 융과 함께 ‘심리학의 3대 거목’으로 불리는 아들러는 영혼과 신체, 이성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 나와 타자, 개인과 공동체의 분할 등 모든 이원론적 가치관에 반대했다. 자신의 심리학을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이라고 명명한 까닭이다. ‘개인’은 라틴어individuum에서 유래한다. ‘분할할 수 없다in-dividu-um’는 뜻이다. 이것만으로도 아들러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짚인다. 아들러는 인간은 본래 “사회적 동물(아리스토텔레스)”이니 “대인관계가 문제의 출발점”이고, 따라서 타자/사회와 공존의 관계를 맺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되풀이하며 강조했다. 이는 ‘자기계발서의 아버지’ 데일 카네기가 삶의 행복을 위해 역점을 둔 ‘우호적이고 원활한 인간관계 구축 논리’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들러 심리학의 근본 개념은 ‘열등감’과 ‘보상’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아기 때부터 싹튼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열등감은 불리한 신체 조건, 열악한 사회 환경, 경제적 궁핍, 무시와 모욕감 등에서 비롯된다. 똑같은 조건과 환경일지라도 누구는 열등감에 빠지는 반면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런데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노력, 즉 ‘보상’은 두 갈래로 펼쳐진다. 하나는 우월감/자만심/권력욕으로 탈바꿈하며 또 한편으로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 인간다움, 연대감으로 실현된다. 열등감은 건강한 자아 형성과 사회 연대감을 유도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반사회적인 태도를 갖게 하거나 병적인 권력 행사 욕구와 우월 욕구에 찌들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들러는 열등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대하는 왜곡된 심리적 태도가 잘못이며, 모든 인생의 과제(질병·노화·죽음마저도)는 ‘나(개인)의 용기’로 주체적으로 해결하며 “자기가 자신의 인생에 부여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용기’라는 심리 기제가 없다면 본질적으로 삶의 가치를 실천하거나 삶의 기쁨을 누릴 원천을 스스로 뿌리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불안감이나 절망감,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성찰과 성장의 일차적인 원동력인 ‘용기가 있기에’ 인생의 과제에 도전하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렇게 그는 ‘개인의 용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심리학의 가장 큰 의무라고 설파했다. 그가 ‘용기의 심리학자’이고 그의 학설이 ‘용기의 심리학’인 이유다. 아들러도 어려서부터 작은 키, 구루병과 후두경련 같은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용기’로 극복했다.
아들러 심리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두 가지 생활 방식, 즉 ‘키네시스’와 ‘에네르게이아’다. 키네시스적인 인생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효율적으로’ ‘빨리’ 목적을 이루는 게 가장 시급하다. 반면 에네르게이아는 “지금 하고 있는” 것 그 자체를 그대로 “해냈다”고 본다. 에네르게이아적인 인생은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으로, 모든 움직임은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면 그 자체로 풍족하다. 아들러는 아프거나 늙었거나 죽어가는 그 인생의 절박한 과제에 직면한 사람일수록 ‘지금 여기서 살아가고 있다는’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이라는 에네르게이아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아들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자유롭고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만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구나 마흔 즈음을 넘기면서도 늘 타자의 인정에만 목말라한 채 어른의 주체성을 갖지 못하면, 그로 인한 공허감 탓에 무얼 하든 풍성한 만족감이나 호젓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럴수록 비주체적인 어른은 세간의 고루한 고정관념이나 남들의 목표를 따라 하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타자의 시선에 저촉되지 않기 위해 부자유스런 행동을 하며, 사회(정부) 조직에 종속되기 위해 개성·인격을 마모시킨다.
아들러는 이때야말로 참자기가 되기 위한 첫째 조건, 즉 용기를 내라고 부르짖는다. 외부가 자신의 내면을 “속성화=종속화”해서 어느덧 자신을 심판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목소리, 외부 권력, 타자의 인정과 사회적 통념에 굴복하지 않는 ‘미움받을 용기’ 말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초자아’는 본능과 파괴 충동에 휘둘리기 쉬운 자아를 견제하는 정신 작용이다. 초자아 덕분에 개인의 내면에는 양심과 윤리의 목소리가 공명한다. 차세대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상징계’라는 용어를 썼다. 언어와 관습 등 제도적 상징체계를 내면에서 받아들이며 그 사회에 유용한 자가 되는 과정을 성장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정신분석학에 대항한 ‘실존주의 심리학의 창시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욕구 5단계론―생리·안전·소속감·자기 존중·자기실현 욕구―을 정립했다. 아들러의 제자였던 매슬로는 ‘자기실현’ 개념에 ‘도덕적 숭고함’을 포함시켰다. 융도 내면적인 신성이 충족되는 지점을 자기실현으로 보았다. 이는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는 숭고하고 풍성한 삶에 대한 욕구와 사회 구성원이 추구해야 할 ‘공동선’이 실현되어야 가능하다.
아들러에게는 이것이 바로 ‘공동체 감성’이었다. ‘사회적 공감 능력을 키울 용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치는 이타적인 행위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아들러의 말은 “인류의 길잡이별(공동체 감성)”이 내면에서 빛나고 밖으로 실천되어야 ‘잘삶=행복’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한 사람의 용기는 커진다”는 말은, 모든 용기는 전염될 수 있고 그 어떤 용기든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확장되는데 “나 혼자만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나부터 행복해질 용기를 갖되, 공동체 감성으로 타자 공헌을 하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웅변이다. ‘개인심리학’이 ‘공동체 심리학’으로도 불리는 까닭이다. 우리 모두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고 따라서 ‘타자/공동체 공헌’이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열쇠라는 아들러의 이러한 논지는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에게 영향을 미쳐, 드러커는 기업 조직이 사회에 공헌하는 게 이익과 직결된다는 경영 이론을 확립했다. 또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의 ‘사적 성공―공적 성공 주체성 모델’, 즉 사적 성공(내면적 인격의 완결함)이 공적 성공(사적 성공을 바탕으로 사회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외면화)으로 잇대어지는 길, 요컨대 의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바꿈으로써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난 뒤 적절하고 건전한 대인관계를 구축해야 공동체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이론으로 이어졌다.
아들러는 “불안에는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불안(원인)하기 때문에 인생의 과제를 떠맡을 수 없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회피(목적)’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짜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물론 병이 들면 불안하다. 그러나 병들었다고 해서, 노화와 죽음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서 인생의 과제를 피할 수도 없고, 인생의 진행을 멈출 수도 없다. 하물며 병들기 전부터 누구나 불안에 떠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인생의 과제를 가능한 한 늘 어떻게든 기피하고 싶어하는사람은 병들었을 때, 또한 그 전에도 불안의 감정을 만든다. 아들러는 이런 ‘불안 덩어리’ 타입을 “평화를 깨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세상을 비탄의 골짜기로 묘사하고 작은 어려움도 크게 과장하며, 굳이 삶의 어두운 면만 찾아낸다. 아무개가 질병을 대하는 방식은 그이가 지금까지 다른 인생의 과제들에 대처해온 방식과 같다고 본 아들러는, ‘내 안의 타자(병)’도 다른 인생의 과제처럼 ‘용기 있게’ 맞이해 ‘응답하라’고 호소한다. 지은이는 병을 “몸(의)말”이라고 정의한다. 몸이 아픔, 즉 병은 ‘자신과 신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다. 몸말에 응답할 용기를 내어 치유되었을 때에도 “운이 좋았다”거나 “살아났다”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말은 건 언어(병)’에 응답한respond 것이고, 쾌유는 바로 그 몸의 말에 책임responsibility을 다한 것이다. 과민하게, 또는 강박적으로 병에 걸릴 거라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평소에 제아무리 건강한들 병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둠으로써 ‘신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준비’, 곧 ‘몸말에 응답할 용기’를 내면, 설령 몸말이 신체적 회복이 아니라 생으로부터의 이탈을 요구할지라도, 아들러는 아픈 사람 그 존재 자체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융통성 없는 노옹老翁이 되지 말자
자만심·야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황혼의 늘그막 무리’를 볼 수 있다. “융통성 없는 사람”이다. 익생益生-억지로 삶을 도모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무릇 성찰·절제로 ‘자기중심적 욕망을 비우는 과정’이 ‘곱게(잘) 늙어감well-aging’의 핵심이다.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며 ‘가령加齡(나이듦) 위기 담론’이 넘쳐나고 동안童顔 열풍이 불며 실버 산업이 번창할 거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자꾸만 희어지는 털을 검게 염색하거나 아예 뽑아버린들 늙음 자체를 물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처럼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얻는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팔기라도 하면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레이는 자연현상(늙어감)을 초상화 기술로 막으려는 어리석음을 범
했다. 그런 그에게 우리는 아들러의 말을 빌려, 인간이 인간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단 한 가지는 ‘늙어가고 죽어가는 생명체의 필연성’이고, 이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는 노우老友가 젊은 벗들보다 삶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老人一快事]이란 시에서 보여주듯, 늙음을 오히려 긍정하며 나이듦의 옹색함.추레함.궁상맞음을 유쾌하게 인정하고 ‘늙음 자체를 순리대로 수긍하는 여유로움과 넉넉함’이야말로 “늙어갈 용기”라고 지은이는 전언한다. 예로부터 노방출주老蚌出珠, 곧 늙은 조개가 진주를 낳는다고 했으니 늙은 벗에게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적 지식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랄까, 젊은 벗이 지니지 못하는 완숙함이 있을 법하니 말이다.
그렇게 유쾌하게 늙은 벗이 있다. 나이를 무려 백 세나 잡수었지만 영혼만큼은 생기발랄한 알란 영감님 말이다. 그는 백 세 축하연 준비가 한창인 양로원을 창문 너머로 탈출하며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고 되뇌기보단 ‘인저리 타임injury time(추가 시간)으로 접어든 인생을 마구 즐긴다. 소설이니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려우나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상상력이 풍부해서 옴팡지게 재밌다. 그런데 왜 백 살이 넘은 후에도 알란의 삶은 ‘백 살 전처럼’ 고달플까? 그러함에도 왜 이 영감탱이는 여전히 18세 청춘인 양 웃고 짓까불고 꿈꾸며 삶을 자유로이 노닐 수 있을까? 어떻게 이따위 철딱서니 없는 짓이 가능할까? 아들러에게 물어보자. 그는 “갱년기는 위기가 아니다”라고 호언하며, 나이 든 벗부터 먼저 생산성이나 젊음과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기준만이 인간의 가치를 재는 절대 기준인 양 단정짓는 버릇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고, 또한 자신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레이처럼 잃어버린 젊음을 한탄하며 타락할 게 아니라 ‘알란처럼’ 어떤 형태로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중·장·노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필수 요소라고 피력한다. 누구에게나 다 들어맞는 인생의 의미란 애당초 없으니, 자기가 스스로에게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란다.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있지 말란’ 말이다. 자신의 삶이 설령 몇몇 타자에게 미움을 받을망정 알란처럼, 나잇살 들었더라도 천진함·활달함·유쾌함·여유로움으로 저마다의 길을 ‘자주적으로’ 걸으며,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부각되어야 할 것은 저마다의 자유와 행복임을 증명해 보이라고 주문한다. ‘꺾어진 백 살’이 되기도 전에 제가끔 노년의 귀양살이 가시울타리를 둘러치고 그 뒷방에 누워 자발적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당하지 말고, 알란처럼 천방지축일지라도 그레이처럼 영혼이 타락하지 않으며 “도도한 긍정과 당돌한 낙관주의”로 무장한 채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으로 한눈을 팔다”가도 “타자 공헌”을 할 기회를 늘리면 자유롭고 행복한 여생을 사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확언한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가장 튼실한 사과나무는 “돈도, 사업도 아니고 바로 ‘저마다의 생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이 든다고 소속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자신이 여기 있어도 좋다’고 느끼는 소속 감정은 공동체적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태어나면서 하늘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아들러는 “인간은 개별적으로는 모두가 열등한 존재이기에 오로지 공동체 안에서 생존할 수 있고, 이는 공동체 감성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적 생활이 절대 진리라는 걸 증명”한다고 말한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고립되지만, 공동체 감성을 발휘하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아들러는 그래서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자신감을 잃은 사람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자신감을 되찾은 사람은 누구나 다시 유능한 사회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명예퇴직 혹은 정년으로 회사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빠져나왔다고 갑자기 폭삭 늙어버리는 게 아니라 더 큰 공동체, 즉 지역사회·나라·삼라만상·우주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지면 소속감은 한층 더 확장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회분업 속에서 그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을 맡음으로써 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들러의 이 말은 나이 불문이다. 특별히 명예감이나 우월감이 돋보이지 않더라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일로 자신의 가치가 조금도 줄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길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게 ‘늙어갈 용기’라는 입장, 이것이 바로 아들러의 가령관加齡觀인 셈이다.
파스칼이 고백했듯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도 두렵고,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에 갇혀 속절없이 늙어가다 죽는 존재라는 것도 ‘원초적’으로는 두렵다. 아들러 말대로 이는 “인간 감정의 근본적인 기능”이거늘 어쩌란 말인가? “살아서는 하늘에 순응하고 죽어서는 편안하리/ 시름에 잠겨서 근심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存余順事沒余寧, 慽慽愁怨果何濟”라는 성호 이익의 [세안행歲晏行] 구절처럼 말이다. 아들러는 그래서 자연법칙인 ‘가령 현상’에 화들짝 놀라 이를 지나치게 의식하면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되고, 그 일은 다시 강한 열등감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또한 마흔 너머 이윽고 쏜살처럼 나이를 먹어갈수록 ‘가령의 가속도 위기’라는 불안감에 휩싸이는 까닭을 인정 욕구에서 찾는다. 인정 욕구가 거세질수록 심리적 긴장이나 초조함의 강도도 세어진다. 더구나 시기심, 우월감, 명예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려고 아등바등하며 “권력욕”에 목매어 살게 된다. 장자는 ‘외부의 사물―물질욕, 명예욕, 권력욕 등 본래적인 자아 밖의 것―로써 자신을 해치지 않아야不以物害己’ 늙어가면서 온전히 그 생명을 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했다. 아들러가 보기에도 이러한 후천적인 욕망에 휘둘리며 ‘곱게(잘)’ 늙어갈 수 없는 사람은 객관성과 (사회) 현실 감각을 상실할 위험성이 크다. ‘잘못’ 늙은 벗들은 늘 자기가 타인에게 어떤 인상을 줄까, 타인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인정 욕구 질문’에 함몰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활동의 자유가 구속받는다. 아들러에 따르면 이때 고질화되는 성격상의 특징이 허영심, 자만심이다. 곱게 늙지 못한 사람은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남다른 성공을 필요로 하고, 그것으로 인정 욕구를 가득 채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과연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회의감에 늘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며 나이가 들수록 반성하기는커녕 뭔가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며 세상의 불공평함을 따지는 버릇을 갖게 된다. 공격적, 신경질적인 태도를 갖는다. 때론 논리적으로 자기의 외골수적인 정당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가령加齡(나이듦)’을 긍정하는 여유로움과 넉넉함
늙음은 자연의 섭리이기에 그것을 따르면 두려울 리 없고 ‘나이듦의 종착역’인 죽음이란 “삶을 완성하는 기회”이니 기피의 대상이 아니다. 후대 사람에게 물려줄 가장 튼실한 사과나무는 돈도, 사업도 아니고 ‘저마다의 생애’다. 나이 든다는 것은 사과나무가 자라는 과정이다.

이쯤해서 지은이는 여느 공동체에서나 자만심, 야심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황혼의 늘그막 무리’들을 볼 수 있다고 일갈한다. 아들러 식대로는 “융통성 없는 사람”이 그러하다. 조지 오웰의 말마따나 쉰 살에는 누구나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거늘, 젊었을 적의 원칙을 나이 들어서도 고수하려고 애면글면한다. 늙어갈 용기가 없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불안을 작위적으로 만들어낸다. 인생을 자신의 규칙과 공식에만 끼워 맞추려 하거나, 청년의 공식을 중·장·노년의 공식에 억지로 아물리려는 탓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혹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미리 규칙을 숙지하고 있어야 인생의 과제와 맞설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회피한다. 누군가가 자기 규칙에 맞지 않게 행동하면 불쾌감과 모욕감을 느낀다.” 오로지 나이 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세계관, 라이프스타일, 행위 규범을 젊은이에게 강요하는 상황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아들러에 따르면 나이 든 어르신네의 “권력 행사”에 다름 아니다. 설사 그들이 성실하게 살더라도, 이런 융통성 없는 태도는 자신의 잇속에 묶여 있는 유별나고 변덕스러운 성격에 불과하다. 변화된 상황에 잘 적응하지 못한 탓에 자발성이나 공동체 감성이 요구되는 일을 거의 하지 못한다. 지은이는 그래서 융통성 없는 노옹老翁이 되지 않으려면 나이듦은 허영심, 자만심, 명예욕을 내려놓는 용기의 여정이란 걸 깨우치라고 간청한다. 익생益生―억지로 삶을 도모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니, 무릇 성찰과 절제를 통해 ‘본성을 가로막는 자기중심적 욕망을 비우는 과정’이 ‘곱게(잘) 늙어감well-aging’의 핵심이라는 노장사상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생로병사 잠언의 향연
소크라테스, 플라톤, 키케로, 니체, 도스토옙스키, 에리히 프롬, 비트겐슈타인, 시몬 베유, 서머싯 몸, 마르틴 부버, 슈바이처, 스티븐 호킹, 수전 손택, 무라카미 하루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들의 오싹하도록 덧없고 눈물겹도록 살가운 생로병사의 잠언들이 육체의 애틋함과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지혜의 파피루스를 펼쳐놓고 있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하이데거식으로는 “현존재(인간)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다. 이것만은 만인평등하다. 하나 마나 한 소리지만 절대적 사실이다. 아들러는 낙마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깨어난 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깨달음을 얻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낸 몽테뉴처럼, “삶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자각에서 시작되며 죽음은 생의 일부”라고 정언한다. 결국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가변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편재성이 오히려 그 애잔한 삶을 사랑하게 한다는 패러독스다. 카프카도 “삶이 소중한 까닭은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예순일곱 살에 “나는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죽는 법을 배워왔다”고 털어놓았는지도 모른다. 죽음은 선험적 경험이 불가능하고, 피할 수도 없는 것이거니와 오히려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철학적 깨달음의 대상이라는 뜻일 게다. 오늘 ‘지금 여기서’ 충실한 삶을 살면 내일모레 하직하더라도 행복이라는 아들러의 에네르게이아적인 삶의 낙관주의도 그래서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공자의 역설과 비스름할 터이고.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인생의 과제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빌미거리로 이용하려는 라이프스타일이 있다. 이런 것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런 일이 안 된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이죽거림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이 좋은 예다. 아들러가 보기에 ‘예기豫期 불안=죽음의 공포’를 즐기면서 자주 입방아를 찧는 이의 목적은 분명하다. “죽음과 질병을 마냥 두려워함은 무위도식하기 위해 구실거리를 찾는 자가 일삼는 ‘인생의 거짓말’인 경우가 드물지 않다. 모든 것은 헛되고, 인생은 너무 짧은 것, 또는 무엇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이렇게 “예기 불안=가짜 죽음”을 과장하는 사람은, 아들러에 따르면 늙을수록(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종교에 빠지기 쉽다. 특히 내세 기복 신앙은, 마치 과거의 기억이 ‘추억’이라는 형식으로 현재와 함께하듯 미래(죽음)를 ‘현재’로 다스리기 위해 ‘죽음 이후의 천국’을 지상으로 끌어내린다. 이런 “인생의 거짓말”은 타자만이 아니라 자기도 속이려는 목적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바라는 바는 진짜로 죽는 게 아니라, 예기 불안을 빌미로 인생의 과제들을 회피하기 위한 심리전에 불과하다. 아들러는 그래서 죽음은 타자처럼 적이 아니라 ‘나를 완성하게 하는 벗’이고 ‘나를 성숙하게 할 마지막 기회’라는 데 방점을 찍는다. 죽음 그 자체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죽음도 다른 인생의 과제처럼 ‘책임질 용기’를 내고 마주하는 것이, 요컨대 내세만을 목 놓아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서’의 삶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공동체 인간을 잘 살게 하는 ‘길잡이별’이란 뜻이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뤄졌다고 하는 기독교의 이원론적인 사생관은, 죽음을 (지옥/연옥/천국의) 또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죽음을 완전한 소멸로 인식하고 두려워만 하는 허무주의적 단멸斷滅론도 있고, 죽음을 외면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사생관도 있다. ‘이원론주의자’ 데카르트는 육체를 ‘태엽 감는 시계’에 비유하고 죽음은 이 기계의 종말이기에, 죽음은 인간의 영혼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는 죽음을 보편적으로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 단정했다. 이들과는 다르게 지은이나 아들러는 ‘나는 육체인가 영혼인가, 영혼이 육체 없이 존재한다거나 육체가 사멸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이분법적인 주장을 펼치지 않으며 죽음을 인생의 보편적인 과제로 다룬다. 죽음을 ‘삶의 조건, 과정, 계기, 부분’으로, 즉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마음(영혼)과 신체를 상호연관 속에서 하나의 통일적인 현상으로 보는 전일적 세계관을 밑바탕 삼고 늙음과 죽음은 자연의 섭리이고, 봄·여름·가을·겨울처럼 되풀이되는 자연의 운행이기에 그것을 따르면 두려울 리 없고, 나이듦은 결코 심신의 쇠락에 따른 쓸모없음이 아니라 숙덕宿德(덕이 깊어짐)의 과정이며, 또한 나이듦의 종착역인 죽음이란 “삶을 완성하는 기회”이니 흉하고 망측한 기피의 대상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생로병사를 자연의 순환질서로 바라본 동양의 죽음학과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이 얼추 통한다는 방증이다(비록 아들러는 신교도였지만).
유가와 도가의 현자들은 청춘의 시간이 흘러가며 불가피하게 맞닥뜨리는 생물학적인 늙음, 죽음을 심신의 쇠망으로 안쓰러워하면서도 그것을 사계절의 순환 고리처럼 자연스런 변화로 받아들이고 그 여정을 인격과 덕의 완성을 향한 과정―공자가 70세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고 한 말을 떠올려보라―으로 인지했다. 나이 든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낡음이나 사라짐이 아니라 젊음의 완성이었다. 유한한 존재에게 죽음은 불가항력적인 것이므로 죽음은 되레 삶의 거울이고, 죽음이라는 이 거울을 응시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꿈꾼(삶의 완성)” 소크라테스의 죽음관도 이러했다. 아들러 역시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죽음이라는 필멸을 이기는 것은 담대한 용기로 그것을 인정하고 ‘지금 여기서 사는 동안 행복하라, 행복하라 그리고 또 행복하라’고 권유한다.

 

용기의 곱셈 심리학
“자신이 용기를 갖는 것이 타자가 용기를 갖도록 도울 수 있는 출발점이다.”
“한 사람의 용기는 커진다.”

이 책은 기대수명이 높아지고 고령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는 한국사회에서 인생을 어떻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그리고 ‘나이듦’과 ‘죽음’이라는 인류 보편의 결말에 어떻게 용기 있게 응답할 것인지에 대한 길라잡이가 될 듯싶다. 또한 이 책은 생로병사를 철학·심리학·사회학 렌즈로 투시하며 개인, 가족, 사회적인 사건들을 ‘n분의 몇’씩 비비고 섞은 뒤 다양한 인용구로 양념을 하고, 현자들의 지혜를 몇 줌 뿌린 후, 유한한 인간의 36.5도씨와 인류의 길잡이별(공동체 감성)이라는 무한한 별빛으로 작열하듯 데웠다.
독자들은 아마 지은이―아들러―의 통찰 및 인간이해에 대한 따뜻한 마음씀씀이와 안쓰러운 탄식을 느끼며 슬며시 아득한 눈살을 모으기도 하고 들숨날숨을 몰아쉬기도 할 것이다.
지은이의 글투는 아들러의 문체가 그렇듯 유려하지는 않으나, 구어체 같은 소탈함과 직설법을 겸비했다. 아들러는 먹물끼리만 소통하는 ‘납처럼 무거운’ 논리적 기호 언어를 선호하지 않았다. 지은이도 자신이 배운 아들러 심리학을 거리낌 없이 술회하되, 이는 절친 앞에서 왠지 허전한 마음으로 중얼거리듯―자기 한탄적인 고백도―편안하면서도 술자리인 것마냥 ‘내친김에’ 단순명쾌하게 털어놓는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척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라고 한 루소의 말투이다가도, “세상을 떠나는 게 정말 싫소!”라고 한 아흡일곱 살의 버트런드 러셀의 푸념 투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생로병사라는, 이 숨이 턱턱 막히도록 무거운(가장 중요하니까) 주제에 대해 엄밀한 탐구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삶이 얼마나 다채롭고 모순적이고 어설프면서도 영롱하고 짜고 매운지를 다채로운 접근법 또한 안쓰러운 목소리로 늙음과 죽음의 불가피성을 통렬하게 환기시킨다. 지은이가 왕왕 냉정하게, 또한 응당 섬세한 관찰과 때로는 페이소스pathos(연민) 어린 시선으로, 우리의 실존적 처지―생로병사―를 싸구려 감성으로 받아들이거나 신파적 혹은 나이브하게 서성거리는 태도를, 건조하나 곰살궂은 행간으로 콕콕 찌르는 이유다.
그러나 지은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변한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결국, 그것, 죽을 수 있다는 것(존 맥스웰 쿠시)”임을. 누구나 늙고 죽어갊에 머뭇거리다가도 ‘책임질 용기’를 내야 할 터이니 “용기는 한 스푼의 물약처럼 떠넣어줄 수는 없다. 책임을 받아들이는 훈련과 용기를 갖는 훈련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완전히 표리일체를 이룬다”는 아들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우리는 ‘지금 여기서’ 기갈飢渴―에네르게이아적인 최선의 삶의 과정―처럼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 배고픔과 목마름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과제일망정 이 책은 저 불가능한 영역―내세/신 혹은 불로장생 따위―의 편이 아니라, ‘실존/사회 현실 혹은 나약한 인간’의 기갈의 동아리가 되고자 한다. 지은이의 이 책 ‘아들러의 생로병사 심리학’은 실존주의적이고 인본적인 자유와 행복, 사회적 공감 능력과 타자 공헌에 배고프고 목마른 자의 편에 서 있는 ‘자전적 심리 에세이’이자 ‘인문·사회과학적 자기계발서’라는 말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패자부활전이 없는 승자독식사회, 과정을 생략해버리는 결과 우선 사회, 인격을 배제하는 성적 제일 사회, 미래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현재의 성과 중시 사회, 사회적 공감 능력을 거세하는 개인이기주의 사회, 사회적 고립을 외면하는 소통 부재 사회, 자아실현을 무가치로 해석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 양심을 무능력으로 치환하는 비상식적 사회라면 열등감, 과정, 인격, 미래, 소통, 용기, 주체적 자아실현, 공동체 감성, 타자 공헌에 방점을 찍은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한층 더 소중한 가치로 다가올 것이다. 공동체 심리학인 덕분이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에 대하여]
프로이트, 융과 더불어 ‘심리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오스트리아 의사, 심리학자다. 열등감, 인정욕구, 권력욕, 인격, 생활양식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1911년 견해차로 프로이트와 결별했다. 빈에서 아동정신병원을 여러 곳 세웠지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폐쇄 당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와 롱아일랜드대 교수를 역임했다. 빅터 프랑클과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를 지도했다.
‘용기의 심리학자’라 불리는 그는 ‘개인의 용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심리학의 가장 큰 의무라고 설파하며 ‘개인심리학’을 창설했다. ‘개인individual’은 라틴어 individuum에서 유래하는데 ‘분할할 수 없다in-dividu-um’는 뜻이다. 개인심리학이 ‘공동체심리학’으로 불리는 까닭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대인관계가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고 ‘타자와 대화할 용기’ ‘공동체 감성 발현’ ‘타자 공헌’이 삶의 길잡이별이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자기계발서의 아버지’ 데일 카네기가 방점을 찍은 ‘우호적이고 원활한 인간관계 구축’ 논리로 이어졌다. 기업의 사회 공헌이 이익과 직결된다는 피터 드러커의 경영 이론은 아들러의 공동체 심리학으로부터 지적 수혈을 받았다. 이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으로 유명한 스티븐 코비의 ‘사적-공적 성공 모델’, 즉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난 뒤 적절하고 건전한 대인관계를 구축해야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이론으로 계승되었다.
[늙어갈 용기]는 나이 들수록 민감해지는 생로병사의 물정을 아들러 사상을 축으로 삼아 풀어나가며 ‘더 잘 사는 용기’를 내는 길을, 저자의 개인·가족·사회 이야기와 함께 엮은 에세이집이다. “인간은 ‘나이 들어가는 존재’이므로 깊어가는 시간에 따라 늙어간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모든 것은 용기의 문제”라고 역설한다. 생로병사를 왜곡된 심리로 대하는 태도가 잘못이며, 인생의 온갖 과제는 ‘나(개인)의 용기=주체성’으로 헤쳐나가야 삶의 자유와 가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늙어갈수록 공동체 감성에서 우러나오는 타자 공헌의 기회를 더 많이 누려야 ‘소속감=존재감’이 한층 더 커진다. 인정욕구·우월감·권력욕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면의 힘과 공동체의 목소리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늙어갈 용기’다.

목차

여는 글|동백꽃 지듯 아프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들에 대하여

1장|대화할 용기-타자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고통인가 | 인생의 과제와 ‘대화할 용기’를 내라 | 타자에게 속성부여하지 말라 | 타자
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 타자의 말과 타자를 구별하라 | 분위기 파악을 강요하는 일
본 파시즘 | 자유의 말 | 극장 정치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말라 | 학자의 무비판은 학문의 종말 | 중
성적 행동과 과제의 분리 | “누가”가 아니라 “무엇”이 | 대화 성립의 조건 ‘지식, 호의, 솔직함’ | 사
람과 사람을 갈라놓는 감정 ‘화’ | 인간 이해의 최고 지평 ‘공동체 감성’

2장|몸말에 응답할 용기-아픔에 대하여 
의사와 환자의 대화 | 의사의 퍼터널리즘과 고통의 의미 | 질병으로 인한 불안에는 목적이 있다 |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결정하는 인격 | 신이 전지전능하지 않다면 치유란? | 몸말에 응답할 용기
를 가져라 | 아프다는 것, 디오게네스가 되다 | 선은 서둘러라 | 아프다고 자유롭지 못하랴 | 아픈
자의 인격은 대인관계 속에서 | ‘나답게 살 수 있다’는 것 | 마음의 병이라는 존재론 | 아픈 존재 자
체가 타자 공헌

3장|늙어갈 용기-나이 듦에 대하여 
나이 듦을 존재의 차원에서 | 늙음 그 낯선 시간 속에서의 용기 | 스스로 선택하는 운명에 대하여 |
늙어갈 용기는 라이프스타일의 차이 | ‘사람人’에서 ‘인간人間’으로 | 삶의 두 가지 방식 ‘키네시스
와 에네르게이아’ | 자신의 가치를 느낄 때 우러나는 용기의 공동체 | 나이 들어가면서 다시 늙어
갈 가치를 | 사과나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최대의 유산 |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의 변모
| 인생이라는 용기의 심리학 | 늙음, 그래서 삶이 유한할지언정

4장|책임질 용기-죽음에 대하여 
사회적 죽음을 당하는 쪽에서 생각해야 | 장기이식과 윤리적 압력 | 백사장은 사회, 바다는 운명,
파도는 죽음 | 생의 일부로서의 예기 불안 | 자신만의 순수한 과제에 대하여 | 삶에 대한 사랑은 죽
음에 대한 자각에서 | 도망칠 수 없는 것에 대한 옹호 | 내세는 죽음에 맞닥뜨린 그때에서야 | 끝을
책임질 용기에 대하여 | 진짜 죽음과 가짜 죽음 | ‘인생의 거짓말’의 패러독스 | 자신을 완성할 마
지막 기회

5장|행복해질 용기-어떻게 잘 살 것인가 
지금 여기가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 에네르게이아적 관점으로 한눈을 팔자 | 철학으로
의 복귀와 운명애 | 인생의 의미는 용기로부터 | 길잡이별 ‘용기’는 창공에서 빛나고 | ‘나인 채로’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라 | 잘 살아가고 있다는 알리바이 | 세상은 넓고 타자 공헌의 대상은 많다
| 나 혼자만 행복해서야!

옮긴이 해제|행복하라, 행복하라 그리고 또 행복하라 ‘지금 여기서 다함께’

미리보기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 또 자기 스스로 자유와 행복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타자의 시선에 자신의 인생을 통쨰로 맡기지 않는 용기를 길잡이별로 삼을 필요가 있다.
_330쪽

 

화라는 감정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우월감과 인정욕구를 높이는 값싼 수법에 불과하다.
_85쪽

 

같은 사례는 부모가 자식을 야단칠 때도 볼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 야단친다고 하지만, 사실 부모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자식을 키우고 싶을 뿐이다.
_91쪽

 

불안의 목적이 인생의 과제로부터의 도피인 셈이고, 그 목적을 위해 불안해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거라 지레짐작하는 것이다. 삶의 과제로부터의 도피가 목적이고 불안이 원인이지, 그 반대로 삶의 과제가 원인이 되어 불안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_110쪽

 

사실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이다. 피해자의 마음을 살짝 어루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그 사람과 함께 휘청하며 울컥하는 것, 함께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이다.
_118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

1956년 교토 출생. 아들러 심리학의 1인자이자 철학자. 교토 대학교 대학원 문학연구과 박사과정 중 만기 퇴학했다. 전공은 서양철학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플라톤 철학을 깊이 공부했다. 1989년부터는 인간의 내면을 모티프로 하는 ‘아들러 심리학’을 파고들었다. 이후 아들러 심리학과 서양철학에 관해 활발하게 집필하고 강연했다. 일본아들러심리학회가 인정한 카운슬러이자 고문이다.

<당신의 사랑은 지금 행복한가요?>는 연애 상담을 할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시작되었다. 기시미 이치로는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과 어떻게 하면 헤어질 수 있습니까?”처럼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질문을 해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당사자는 지금 얼마나 힘들까를 헤아리며 최대한 성심성의껏 답하려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과 일본 등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미움받을 용기> 출간 후에는 아들러가 그랬던 것처럼 국내외 많은 ‘청년’을 상대로 강연 및 상담 활동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알프레드 아들러의 <인생의 의미에 대한 심리학> <성격의 심리학> <왜 신경증에 걸릴까>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을 비롯해 <미움받을 용기> 등 다수의 저작이 있다.

 

옮긴이

노만수

대학 시절 「중세의 가을」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시아학술원에서 공부했다. 「경향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현재는 출판기획 · 번역 · 저술 활동을 하며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섬』 『이슬람 불사조』 『사마천 사기』 『언지록』 『쟁경』 『늙어갈 용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