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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 세속의 눈으로 파헤친 고전의 사생활
  • 지은이 | 리카이저우
  • 옮긴이 | 박영인
  • 발행일 | 2012년 09월 03일
  • 쪽   수 | 408p
  • 책   값 | 18,000 원
  • 판   형 | 152*223
  • ISBN  | 9788967350116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맹자는 연봉이 1백억 원이 넘었고, 포청천도 24억 원에 달했다
이백은 묘비명 한 편에 5천만 원 이상의 원고료를 받았다

역사 속 성인군자의 돈에 얽힌 시련부터 탐관오리의 어마어마한 부동산 축적까지 경제학의 눈으로 파헤친 고전 시대의 뒷골목 풍경

 

동양 고대 유명인사의 경제생활을 파헤친 최초의 책

사회 전반적으로 고전 읽기 붐이 일면서 [논어], [노자], [사기], [손자병법], [맹자] 등 동양고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고전의 세계는 대부분 성인과 영웅의 서사시이며 그들의 빛나는 사유와 비범한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런 고전 속 위인들의 삶은 오랜 세월에 걸쳐 구축된 것이며, 때로는 후대의 가필과 윤색으로 인해 그 본모습에서 멀어져 있기가 쉽다. 즉, 고전의 세계는 세속적 리얼리티가 신화적 파토스로 대체된 미백된 진공 공간이기 쉽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의 세계를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파헤치고 역사 속 위인들의 삶을 새롭게 재구성한 흥미로운 책이 출간되었다.
리카이저우가 펴낸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는 “세속의 눈으로 파헤친 고전의 사생활”을 드러낸다. 이 책엔 이 책에는 어마어마한 역사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학을 탄생시킨 공자, 공자를 이어 유학을 발전시킨 맹자, 평화주의자인 묵자, 삼국시대 위나라의 (사실상) 시조인 조조, 시인 도연명, 시선이라 불린 이백, 역시 시인 백거이, 드라마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포공, 남송 전기 4대 장군 중 한 명인 악비, 명나라의 문인이자 화가 당백호, 부정부패로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엄숭, [홍루몽]의 저자로 알려진 조설근, 난징 국민정부의 지도자인 장제스 등등. 이들은 하나같이 학자로 무장으로 문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쟁쟁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이 이룬 높은 성취와 관련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공자의 유학을, 이백의 시를, 장군인 악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기존의 수많은 책에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다소 생소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로 이들 인물의 경제생활이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도, 아무리 유명한 장군이라도 시만 짓고 전쟁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이들에게도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먹고살아야 하는 일상이 존재한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러한 일상의 삶을 다루고 있다. 집안의 재산도 물려받지 못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공자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는지, 학교를 운영할 때 학비를 어떤 근거로 얼마를 받았고 이것이 돈벌이가 됐는지, 열국을 주유할 때 든 경비는 어디서 났는지, 돈 씀씀이는 어땠는지, 집은 소유하고 있었는지 등 공자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사소하고 진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전국 순위에 들 만큼 부자였던 맹자는 어떻게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까? 평화주의자인 묵자가 전쟁을 세 번이나 막으러 갈 때 여비는 어디서 났을까? 연말보너스와 연봉, 채읍에서 나는 수입이 어마어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왜 죽을 때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이 거의 없었을까? 은둔을 갈망한 도연명은 왜 ‘비둔(화려한 은퇴생활)’이 아니라 ‘수둔(빈곤한 은퇴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평생을 떠돈 이백은 유랑 자금이 어디에서 났을까? 백거이가 평생 마련한 집은 몇 채인가? 판결의 귀재라 불렸던 포공이 비교적 청렴결백한 판결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늘 군대 막사에서 생활했던 악비에게도 집이 있었을까? 부모와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고 술과 여자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일삼은 당백호는 풍류의 밑천을 어떻게 마련했을까? 탐관오리인 엄숭이 부정부패로 축적한 재산은 얼마인가? 떵떵거리며 살던 집안이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으면서 조설근은 가족의 생계를 어떻게 책임졌을까?
이처럼 저자는 경제생활과 관련하여 인물마다 한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해 깊고 넓게 해석해낸다. 이 과정에서 사료에 근거해 수많은 통계 수치를 제시하기 때문에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또 각 인물의 일반적인 이미지가 깨지기도 하고, 전혀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것은 아마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모습에 가려진 일상을 파헤쳤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말한다.
“우리 자신은 비록 세속적인 삶을 살지만 옛사람들은 고상하게 살았을 것이고, 자신은 돈 몇 푼에 연연하지만 옛사람들은 속세의 음식조차 먹지 않았던 신선처럼 생각한다. 마치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분열 상태에 빠진 ‘반쪼가리 자작’과 다를 바 없다. 반은 더없이 선하고 반은 더없이 악하다. 하나 속에 완전히 대립된 두 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우리의 ‘반쪼가리’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물욕이라는 함정에 빠져 진정한 행복과는 배치되는 삶을 살면서도 옛사람들이 물질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인 왜곡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철인 공자도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며 열국을 주유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관직을 내놓고 은둔의 삶을 산 도연명도 실은 가난에 허덕였으며, 시인 백거이 역시 내 집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것이다. 또 포공이 중국에서 청렴결백한 관리의 대명사가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월급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중국 이학(성리학)파의 대가인 정이程?는 분명하게 말했다. “군자는 물질을 부리고 소인은 물질의 노예가 된다君子役物, 小人役於物.” 이 말은 유학자가 물질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1000원짜리와 5000원짜리 지폐에는 이학자가 그려져 있다. 바로 유학의 쌍벽을 이루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다. 더욱이 이들은 전적으로 “진정한 현인은 내적으로 의리義理를 수양하고 외적으로 실리實利를 추구해야 한다. 의리는 실리와 동떨어진 공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리를 추구할 때 역시 의리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장별 주요 내용]

공자는 돈이 모자라지 않았다
공자가 위나라의 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가로 90톤의 좁쌀을 연봉으로 받았는데, 이것은 280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자 한 사람이 280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기도 하다. 당시 공자의 모친인 과부 안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고, 공자의 손자인 공급孔伋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때였다. 따라서 공자의 가솔은 아내 기관씨 官氏와 아들 공리孔鯉, 공리의 아내뿐이었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기껏 4명으로, 식량으로 계산하면 1년에 많이 먹어야 1000여 킬로그램이었다. 공자의 연봉은 온 가족이 몇십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인 셈이다.(/ p.35)
공자가 취푸에 갖고 있던 33묘의 부지에 방 3칸이 있는 집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호화 주택이었을까? 일반 가구는 대부분 5묘 부지의 주택으로, 현재 기준으로는 2묘가 되지 않는다. 평민과 견주면 공자가 살았던 집은 비교가 안 될 만큼 호화로운 편이다. 반면 노나라의 계손씨와 맹손씨 등 권문세가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수준이다. 계손씨 등은 모두 봉읍封邑이 있어서 자신만의 백성, 도시, 수백만 묘의 토지를 소유했다. 이에 비해 공자는 생전에 명성이 자자하고 영향력이 컸지만 어쨌든 권문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한평생 봉읍이 없었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가 채나라를 떠날 때 초나라 소왕昭王의 초청을 받았으며, 소왕은 공자에게 서사書社[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한 공간]를 위해 땅 700리를 주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700리는 부지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700개의 작은 마을을 뜻하며, 1리는 25가구의 농민을 가리킨다. 따라서 700리는 1만7500가구의 농민이다. 이것이 정말로 공자에게 하사되었다면 1만7500가구의 농민이 소유한 토지와 집, 수입을 얻을 권리가 모두 공자에게 속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면 해마다 거둬들이는 곡식과 임대료는 고스란히 공자의 수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나라 소왕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저세상으로 떠났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거액의 부동산을 거머쥘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pp.43~44쪽)

 

맹자는 금이 많았다
맹자가 가장 잘나가던 때는 제나라에서 경卿의 지위에 있을 때였다. 이때 맹자가 받은 연봉을 곡식으로 환산하면 좁쌀 10만 종鍾이었다.당시 제나라에서 1리터는 206밀리리터로 1종은 20만6000밀리리터인 셈이다. 좁쌀로 계산하면 1000밀리리터는 대체로 좁쌀 0.75킬로그램이므로 좁쌀 1종은 적어도 150킬로그램이다. 그러므로 10만 종은 1500만 킬로그램이자 1만5000톤이다.(/ pp.51~52) 맹자는 공자보다 무려 150배나 많은 연봉을 받았다.
문제는 맹자가 관직에 머문 기간이 무척 짧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사직한 뒤 말년에 이르러서는 무엇을 해서 먹고살았을까? 사실 맹자에게는 중요한 경제적 출처가 있었다. 바로 선물이다. 당시 산둥 성에 있던 작은 나라인 임任나라와 큰 나라인 제나라에서 임나라 임금의 동생인 계임季任과 제나라 경상인 저자儲子가 맹자를 몹시 존경했다. 맹자가 고향인 추鄒나라에서 학교를 운영할 때 계임은 일부러 사람을 시켜 맹자에게 돈을 보냈다.
훗날 맹자가 제나라 경에서 물러날 때도 제나라 임금은 손도 크게 맹자에게 ‘겸금兼金 100’을 보냈다. 알려진 대로 ‘겸금’은 순도가 높은 금이다. 기개가 높은 맹자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맹자는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갈 때 송나라와 설薛나라를 지났다. 이때 만난 송나라 임금과 설나라 임금도 맹자에게 각각 황금 70일鎰과 50일을 보냈다. 맹자는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받았다. 맹자가 금을 받을 때 제자인 진진陳臻이 바로 옆에 있었다. 진진이 침울해져 스승에게 여쭸다.
“일전에는 제나라 임금이 준 금을 받지 않고 떠나셨는데, 이번에 송나라와 설나라의 두 임금이 준 금은 모두 받았습니다. 제나라에서 선물을 거절한 것이 바른 일이라고 한다면 송나라와 설나라에서 받은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까? 또한 제나라에서 거절한 것이 잘못이라야 송나라와 설나라에서 받은 것이 바른 일이 되지 않습니까? 대체 어떤 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모두 옳다. 송나라에서 선물을 받은 것은 추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몹시 멀어 경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나라에서 선물을 받은 것은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도적 떼가 출몰한다고 하므로 호위병이라도 사서 몸을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선물을 받지 않은 것은 첫째, 당시에는 쓸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제나라 임금은 나에게 왜 금을 보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가 없거나 구실이 명확하지 않은 선물을 받는 것은 자신의 몸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다. 군자가 기예技藝는 팔지언정 어찌 몸을 팔 수 있겠느냐?”(59~60쪽)
맹자는 순위에 들 만큼 부자였다. [관자] “경중갑輕重甲”을 보면 제나라에서는 건장한 성인 농민이 1년 동안 100묘의 땅을 경작할 수 있으나 풍년이 든다 해도 겨우 황금 2일의 수입을 얻을 수 있을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에서는 송나라의 어느 집안에서 자자손손 무명을 생산하여 수 세대에 걸쳐 돈을 모았음에도 가산은 황금 10일이 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당시 일반 가구의 재산은 대략 황금 몇 일 혹은 10일만 있어도 중산층에 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나라에서는 상인이 황금 100일 정도만 가지면 부호로 불릴 수 있었다. 큰 나라에서는 황금 1000일을 갖고 있으면 부호로 불렸다고 한다. 맹자의 고향은 추나라다. 추나라는 작은 나라로 맹자가 제나라에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동안 받은 월급은 차치하고라도 송나라와 설나라에서 받은 금만 해도 100일이 넘는다. 추나라에서 이 정도면 갑부로 불릴 만하다.(/ pp.68~69)

 

허리띠를 졸라맨 조조
후한 말기 동탁이 천자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황궁을 천도하는 등의 비상사태를 제외하면 무장과 고위 문관에게는 녹봉이 평소와 같이 지급되었다. 승상의 월급은 얼마였을까? 조조는 돈과 현물 두 가지로 월급을 받았는데, 매월 오수전 1만7500닢을 받았다. 또 쌀이나 다른 곡식으로 매월 175곡을 받았다. 후한 말기에 오수전 한 닢의 구매력이 현재의 0.4위안이다. 조조가 승상일 때 화폐로 받은 월급이 오수전 1만7500닢이므로 7000위안에 해당된다. 또 한나라 때 쌀 1곡은 16킬로그램이었다. 따라서 쌀 175곡은 2800킬로그램으로, 1킬로그램을 5위안으로 계산하면 모두 1만4000위안이다. 화폐로 받은 월급에 곡식 현물로 받은 월급을 합치면 조조는 한 달에 2만1000위안을, 1년에는 25만2000위안(약 4400만원)을 받은 셈이다. 이는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다. 실제로 조조의 연봉은 결코 20여만 위안이 아니었다. 조조는 매달 화폐와 곡식을 월급으로 받는 것 외에 광대한 채읍에서 임대료를 받을 수 있었다. 헌제가 채읍으로 준 4개 현의 토지와 이에 속한 3만 가구의 주민은 이제부터 조조에게 귀속되어 조조가 관리하며, 해마다 거둬들이는 조세는 더 이상 국가에 납부하지 않고 조조에게 납부하게 됨을 뜻한다.(/ pp.122~124)
조조는 결코 고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잔인무도했고(여러 차례 성을 점령하여 사람들을 학살했는데 산둥 성 한 곳에서만 수십만 명을 죽였다), 이기적이었으며(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방해가 되면 품행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배척하거나 살해했다), 여색을 즐겼다(동작대에 살고 있는 많은 첩이 이를 증명한다). 그렇지만 조조는 허리띠를 졸라맬 줄 아는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전형적인 수전노라고 할 만큼 조조는 자신을 위한 소비에는 시시콜콜 따졌고 물질적인 향유를 거부했다. 반대로 꼭 써야 할 때는 거리낌 없이 대범하게 썼다. 즉 ‘천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공로에 적합한 상을 내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하들에게 돈을 쓰는 것은 권력을 강화하고 힘을 키우는 데 매우 유용하며, 조조와 같은 정치가의 눈에는 권세와 힘이 사소한 물질적인 풍요보다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 pp.132~133)

 

이백의 유랑을 위한 수입과 지출
이백은 온 천하를 자신의 ‘집’으로 삼았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온 천하가 자신의 집이 되려면 돈이 필요하다. 육로로 다니려면 마차를 빌려야 하고, 수로를 이용할 때는 배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백은 술고래였던 까닭에 술을 살 돈도 필요했다. 오랫동안 길을 걷다보면 신발이 닳을 터이니 신도 새로 사야 했다. 가을에 여행을 시작하여 겨울이 닥치면 얇은 옷으로 추위를 견딜 수 없으므로 겨울을 날 옷도 사야 했다. 1년 내내 밖으로 돌다보니 오랫동안 아내와 떨어져 부부관계를 할 수 없으므로 기생집도 가야 했다. 물론 여기서 이백을 폄하하거나 모독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당나라 시대 선비들은 오랫동안 타향에 머물 때 기생을 찾아가 욕구를 해결하곤 했다. 이백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백의 주 수입원은 원고료였을 가능성이 크다. 송나라 사람인 홍매洪邁는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몇 사람을 언급했다. 그중에 당나라 헌종憲宗 때의 대장군인 한홍韓弘이라는 사람이 있다. 한홍은 전술이 뛰어났고 돈도 아주 많았다. 당나라 시인인 한유韓愈는 “평회서비平淮西碑”를 썼다. 한유가 한홍을 과장되게 칭찬하는 비문을 써주자 한홍은 무척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비단 500필을 선물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나라 때 비단 가격은 1필에 500문에서 4000문까지 받을 수 있었다. 가장 낮은 가격으로 계산해도 비단 500필은 25만 문이나 된다. 1문이 0.5위안의 가치를 지닌다면 25만 문은 12만 위안을 웃돈다.
나는 한유가 썼다는 “평회서비”를 읽은 적이 있다. 구두점을 빼면(사실 당나라 시기에 문장을 쓸 때는 구두점을 사용하지 않았다) 글자 수가 1505자밖에 되지 않는다. 한 자에 80위안꼴이다. 한유가 세상을 뜨자 유우석劉禹錫이 한유를 위해 4구의 제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공이 고관대작을 위해 비문을 쓰니, 한 글자의 가치가 금수레로 산을 쌓은 것과같더라公鼎侯碑, 志隧表阡, 一字之價, 輦金如山.” 한유가 쓴 비문의 원고료가 굉장히 값비싸 한 글자에 대한 보수만으로도 금산을 쌓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다소 과장되기는 했지만 유우석이 지금 시대에 살았다면 다음과 같이 고쳐 썼을지도 모른다. “한유가 쓴 비문의 원고료는 12만 위안으로, 왕숴를 넘어서고 한한을 뛰어넘는다.”
다음은 당나라 헌종 때 재상을 지낸 비도斐度를 들 수 있다. 홍매가 쓴 [용재속필] 제6권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황보식皇甫湜은 한유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 작가다. 황보식이 비도에게 비문을 써주었는데, 비도는 글자당 비단 3필 가격의 원고료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런데 황보식이 액수가 적다고 불평하자 비도는 글자당 비단 6필로 올려주었다. 비도는 원고료로 한 글자에 비단 6필의 가격을 수표로 지급했으므로 글자당 1500위안으로 껑충 뛰어오른 셈이다. 한 글자에 1000위안이 넘는다면 이것은 엄청나게 비싼 원고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의 어느 출판사가 원고료를 지금보다 10배로 올려준다 해도 이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생전에 이백의 유명세는 한유, 황보식, 백거이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세 사람의 원고료가 이렇게 비쌌다면, 이백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글의 원고료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어떤 사람은 이백이 다른 사람에게 글을 써준 적이 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겠는데 당연히 써주었다. 현존하는 [이백전집李白全集]에서 정부 기관의 기록, 비문, 초상화의 제찬題贊, 묘비명 등이 30편 이상 남아 있다. 작품마다 글자 수가 적게는 수십 자, 많게는 수천 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글자당 10위안으로 계산하면 모두 수십만 위안이 넘는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백이 지은 시문은 생전에 열에 여덟아홉은 사라졌다. 이백이 살아생전에 묘비명처럼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글은 현존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 틀림없다.

 

청렴결백한 포공의 고수입
이들 물가 자료를 이용해 포공이 매년 받았던 실물을 모두 돈으로 환산할 수 있다. 합하면 대략 1022관이다. 1022관의 실물 수입과 2만856관의 화폐 수입을 더하면 2만1878관이다. 이것이 바로 포공이 개봉부에 있을 때 받았던 연봉이다.
2만1878관은 요즘 돈으로 얼마나 될까? 앞에서 말한 대로 개봉에서 쌀 1석 값은 400문이었다. 송나라 때 1석은 66리터로 100근에 해당된다. 1근을 2.5위안으로 계산하면 100근은 250위안이다. 당시 400문과 요즘의 250위안의 가치가 대략 같다고 하면 1문은 0.625위안인 셈이다. 따라서 1관은 625위안이므로 2만1878관은 1367만 위안(약 24억원)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포공이 연봉이 많아서 청렴결백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봉급이 낮으면 횡령의 유혹을 더 받기 쉽지만 봉급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청렴결백한 것은 아니다. 포공과 동시대 인물이자 북송의 관리인 장방평張方平은 ‘지간원知諫院’ ‘삼사사三司使’로 장관급 고위직을 지냈다. 또 포공이 개봉부 수장으로 있을 때보다 연봉이 많았다. 그런데도 장방평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포공은 주장리奏章里에서 장방평의 죄상을 폭로한 적이 있다. 헐값에 호화 주택을 사들였는데 변칙적인 뇌물 수수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나는 포공의 청렴결백은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지 결코 봉급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품이 좋지 않은 관리에게는 엄청난 돈과 복지가 주어진다 한들 그 탐욕은 끝이 없어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정에 끌리지 않고 공평한 것으로 유명한 포공조차도 부하를 비호하고 민원을 제기한 백성을 우롱하지 않았던가? 또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어기지 않았던가? 따라서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관리가 감히 부정부패를 하지 못하도록,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법을 어기지 못하도록 바른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제도가 있으면 누구나 포공이 될 수 있고, 제도에 허점이 많으면 포공도 융통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pp.260~262)

 

엄숭의 어마어마한 부동산
앞서 엄숭의 재산이 모두 17억8만 위안(약 3천억 원 이상)이라고 말했는데, 사실 이것은 정확한 수치가 아니다. 17억8만 위안은 엄숭 집안의 부동산을 제외한 동산의 가격이다. 엄숭이 보유한 부동산은 동산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많았다. 엄숭은 베이징, 장쑤 성, 장시 성에 각각 집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 장시에 있는 집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엄숭은 난창南昌 시내에 별장 2채를 갖고 있었다. 한 채는 광적창廣積倉에, 다른 한 채는 세마지洗馬池에 있었다. 이중 광적창에 있는 별장은 남북으로 3칸, 동서로 2칸의 뜰이 있고 다층집과 기와집 등 방이 344칸이었다. 동북향의 모퉁이에는 앞이 탁 트인 널찍한 화원이 있었다.
엄숭은 또 난창 현에 별장 6채를 보유하고 있었다. 광윤문廣潤門 안에 다층 건물로 된 3동짜리, 충신묘忠臣廟 옆에 285칸짜리, 복신묘福神廟 옆에 385칸짜리 별장이 있었다. 또 요주항蓼洲巷에는 54칸짜리, 진현문進賢門 밖에는 230칸짜리, 순화문順化門 안에는 78칸짜리 별장이 있었다.
그리고 신젠 현新建에도 별장을 4채 두었다. 덕승문德勝門 안에 25칸, 미원방薇垣坊에 16칸, 장강문章江門 안에 66칸, 영화문永和門 안에 24칸짜리 별장이 있었다.
엄숭은 또 이춘宜春 시내에도 별장 12채가 있었다. 선화방宣化坊에 있는 별장은 3칸의 작은 뜰과 화원이 있고 방이 44칸짜리였다. 군기국軍器局 옆에 있는 별장은 3칸의 뜰과 화원에 방이 284칸짜리였으며, 순화방淳化坊에 있는 별장은 동서로 2칸의 뜰에 방이 96칸이었다. 희춘방熙春坊에 있는 별장은 동서로 2칸짜리 뜰에 방이 119칸이었다. 이외에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에 각각 1채씩 있었고, 동문東門 밖에 4채, 무본방務本坊과 조진방朝眞坊에 각각 1채가 있었다. 엄숭은 이 12채 외에도 이춘 시내에 887칸짜리 일반 주택 및 대로변에 있는 944칸짜리 상가도 보유하고 있었다.
펀이 현성에 있는 별장도 10채나 되었다. 이중 69칸짜리 집은 명의가 엄숭의 손자인 엄홍嚴鴻으로 돼 있었고, 60칸짜리 집은 엄숭의 또 다른 손자인 엄소경嚴紹慶의 명의로 돼 있었다. 엄숭은 펀이 현성 외곽에 집 240채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펀이 각 향진鄕鎭에 집 812채를 보유했다. 이 집들은 모두 엄숭과 그 자손의 소유였다.(/ pp.320~322)

목차

들어가며

제1장 공자는 돈이 모자라지 않았다

공자의 성은 공孔이 아니다 | 선조 역시 광활한 곳을 떠돌았다 | 숙량흘과 공자 부자는 야오밍처럼 키가 컸다 |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어린 공자 | 개인 학교를 운영해서 낸 수익금 | 관학에서 벌어들인 수입 | 교사의 월급은 공무원보다 적지 않았다 | 개인의 시찰에 나라에서 자금을 대다 | 나라의 보조가 없었다면 전파될 수 없었을 것 | 공자도 자신의 집을 소유했다 | 공자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제2장 맹자는 금이 많았다

맹자는 관직에 있을 때 엄청난 연봉을 받았다 | 맹자의 교사 연봉도 많았다 | 언제나 돈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었다 | 황금의 가치 | 맹자는 순위에 들 만큼 부자였다 | 맹자의 학교는 문턱이 높았다 | 경제적으로 독립해야만 고매한 인격을 지킬 수 있다

제3장 묵자의 평화 유지비

묵자야말로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 평화유지 활동에도 여비가 필요하다 | 묵자가 짚신을 신었다고 누가 말했나 | 묵자는 부자가 될 뻔했다 | 묵자는 가난한 편이 아니었다 | 높은 취업률과 역설의 진리 | ‘공산주의’를 지향하다

제4장 허리띠를 졸라맨 조조

할아버지는 태감이었다 | 관직을 사기 위해 1억을 들였다 | 조조의 경력 | 승상의 연봉 | 채읍의 조세 | 액수가 만만치 않았던 연말 보너스 | 조조는 유산을 많이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 그 많은 돈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 허리띠를 졸라맨 조조

제5장 도연명의 수둔瘦遯

관직은 물려받았지만 재산은 물려받지 못했다 | 작은아버지가 버팀목이 되다 | 은둔에 필요한 돈 | 쌀 5말은 얼마인가 | 쌀 5말 외에 밭 3경이 있었다 | 앞당겨 사직할 때 감수해야 하는 위험 | 비둔과 수둔

제6장 이백의 유랑을 위한 수입과 지출

아버지가 부자라는 소문 | 선단을 만들려면 큰돈이 든다 | 부인도 부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 한림에서 받은 월급 | 현종의 하사품 | 원고료 수입 | 여러 가지 선물을 받았다 | 양저우에서 1년 동안 쓴 돈 | 유랑할 때의 공짜 점심

제7장 백거이, 녹록지 않은 내 집 마련

관리 집안의 자제 | 왜 가난했을까? | 개미족이 된 백거이 | 살 곳이 있으면 충분했지 내 집에 집착하지 않았다 | 내 집 마련은 시 외곽에서 | 규모가 큰 관사에서 생활하다 | 셋방살이 18년 | 루산 초당은 어떤 모습인가 | 평생 다섯 채의 집을 소유하다 | 당나라 중기와 말기의 집값

제8장 청렴결백한 포공의 고수입

아버지는 부부장이었다 | 가족과 가정 형편 | 10년 동안의 은둔형 외톨이 | 전설 속 판결의 귀재 | 융통성을 발휘한 청렴결백 | 1000만 위안이 넘는 연봉

제9장 악비의 부동산 시련

가족은 어디에서 살았을까? | 방 498칸짜리 집 | 항저우 별장 | 월급이 48만 위안 | 거액의 상금 | 장군들은 모두 부동산을 소유했다

제10장 당백호의 풍류 빚

일생과 팔자 | 가벼운 로큰롤과 연화락 | 그림을 팔고 책을 썼다 | 도화암 건설 비용 | 지조라는 것

제11장 엄숭의 어마어마한 부동산

엄숭이 탐한 돈은 얼마였을까 | 3대에 걸친 연봉 | 고금 이래 가장 많은 주택을 보유한 탐관오리 | 부동산의 시가를 셈할 때 거짓으로 보고하다

제12장 조설근의 생계비 출처

씀씀이가 큰 조씨 집안 | 급료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 소금으로 먹고살았다 | 백성들은 혈압이 높았다 | 왜 가산을 몰수당했을까 | 가산을 몰수당한 후의 나날들 | 조설근의 봉급 | 매해의 학비 보조금 | 예술가인가 고급 기술자인가 | 손재주로 가족을 먹여 살리다

제13장 장제스와 리쭝런의 수입 공개

장제스는 4만8000위안의 월급을 받았다 | 리쭝런은 월급을 3만4000위안 받았다 | 시장은 월급이 얼마였을까? | 민국 때 광저우 일반 교사의 수입

옮긴이의 말

 

미리보기

우리 자신은 비록 세속적인 삶을 살지만 옛사람들은 고상하게 살았을 것이고, 자신은 돈 몇 푼에 연연하지만 옛사람들은 속세의 음식조차 먹지 않았던 신선처럼 생각한다. 마치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분열 상태에 빠진 ‘반쪼가리 자작’과 다를 바 없다. 단은 더없이 선하고 반은 더없이 악하다. 하나 속에 완전히 대립된 두 면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우리의 ‘반쪼가리’ 모습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물욕이라는 함정에 빠져 진정한 행복과는 배치되는 삶을 살면서도 옛사람들이 물질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 왜곡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철인 공자도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열국을 주유했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관직을 내놓고 은둔의 삶을 산 도연명도 실은 가난에 허덕였으며, 시인 백어이 역시 내 집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것이다. 또 포공이 중국에서 청렴결백한 관리의 대명사가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월급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_「들어가며」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리카이저우李開周

1980년에 태어난 리카이저우는 허난河南성 카이펑開封 출신으로 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이다. 2003년에 허난농업대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부터 작가의 길에 들어섰으며, 박학다식한 지적 탐구와 심리 묘사는 날카롭고 통찰력 있는 그만의 춘추필법을 세상에 알렸고 2012년 현재 『신경보新京報』 『중국경영보中國經營報』 『세계신문보世界新聞報』 『양성만보羊城晩報』 『만과주간萬科周刊』 등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선조의 생활』 『밀레니엄 도시: 시공간을 뛰어넘어 고대의 부동산을 가보다』 『송나라에서 먹다: 혀끝에서 느끼는 송나라의 카리스마』 등이 있다.

 

옮긴이

박영인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와 북경대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에서 회사를 다니며, 우리나라에 중국 도서를 소개하는 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시진핑의 말』 『심리의 함정』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 『공자님, 무엇이 옳은 건가요?』 『시진핑과 조력자들』 『공자왈 vs 예수 가라사대』 등의 책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