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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과 책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
  • 지은이 | 둥핑
  • 옮긴이 | 이준식
  • 발행일 | 2019년 05월 03일
  • 쪽   수 | 332p
  • 책   값 | 16,000 원
  • 판   형 | 148*210
  • ISBN  | 9788967356224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변방을 누린 군사 전략가이자
애민 정신을 실천하는 행정 관료

중국 자금성 남문 밖, 한 관리가 바지까지 내린 채 곤장을 맞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조정 관리로서 사람들 앞에서 곤장을 맞는다는 건 엄청난 치욕이자 인격 모독이었다. 그 관리는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옥에 갇힌다. 다행히 살아남아 유배지로 향하게 되지만, 가는 길 내내 자객이 따라붙어 목숨을 위협받는다. 이 불행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관리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위인으로 손꼽히는 왕양명이다. 그는 입바른 말로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 유근의 심기를 거슬러 그러한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말단 관리였던 왕양명은 정계를 어지럽히고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환관의 전횡과 횡포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다가 곤장형에 처해지고 감옥에 갇힌 후 급기야 귀주 용장으로 귀양살이까지 떠나게 된다.
용장으로 향하는 길에 자객에게 쫓기던 왕양명은 기지를 발휘한다. [절명시]를 짓고 자살로 위장해 강으로 뛰어든 후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이렇게 어렵사리 용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곳은 척박한 땅인 데다 생활 여건도 열악했다. 그럼에도 그는 ‘양명 동굴’에 기거하며 학문 연구를 계속해나갔고, 서원을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왕양명은 현실을 등진 채 학문에만 심취한 선비는 아니었다. 그는 애민 정신을 가진 관료였고,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용장에서 사는 소수민족 주민들을 돌보았다. 유배 생활을 백성들의 삶을 가까운 곳에서 살피는 기회로 삼아 불합리한 조세 제도를 해결하는 등 불편을 해소했다. 그리고 주거 환경이나 낡은 풍습을 개선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발전시킨다.

 

강서 전투, 이두 평정, 영왕 반란 평정……
낭병 의존 시스템에서 민병 양성 시스템으로 명군 재편

왕양명이 살았던 명대 중기는 정치적·사회적으로 불안정했다. 곳곳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도적 떼가 창궐했고, 조정 대신들의 탐욕과 전횡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그러던 중 왕양명은 조정으로부터 도적 떼와 반란 세력을 토벌하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정덕 10년(1515)을 전후로 한 시기에 강서·복건·광동·호광 등지의 경계지에서 할거한 도적 떼의 세력은 크게 세 파로 나뉜다. 하나는 복건성 장주부漳州府 경내의 도적 떼로 첨사부詹師富·온화소溫火燒가 수괴였고, 또 하나는 강서성 남안부南安府·감주부贛州府 경내의 도적 떼로 사지산謝志珊·남천봉藍天鳳이 수괴였다. 나머지 하나는 광동성 혜주부惠州府 경내의 도적 떼로 지중용池仲容이 수괴였다. 이 3대 도적 떼는 각기 수천 명 이상의 방대한 세력을 형성했고 그 기세 또한 대단했다. 조정에서 왕양명을 내려 보낸 시기는 바로 수차례에 걸친 관군의 토벌이 실패를 맛본 뒤였다.
그는 호구 조사제와 유사한 ‘십가패법’을 도입해 민가와 도적 간의 내통을 막는 고립화 전략을 취했다. 또한 기존의 낭병에 의존하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민병을 양성해 관군을 정예화했다. 원래 명군은 도적 떼를 토벌하러 갈 때 ‘토병土兵’이나 ‘낭병狼兵’을 동원했는데 모두 소수민족 출신 병사를 가리킨다. 한족이 아닌 현지 원주민 출신이다. 왕양명이 볼 때 낭병 동원은 원거리 작전 수행이라 적지 않은 폐해가 나타났다. 즉 (1) 낭병을 동원하면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해를 넘기기도 하는 등 시일이 많이 소요되어 작전의 순발력이 떨어진다. (2) 군비 소모 등 재물의 낭비가 심하다. (3) 전투 목표가 방대하여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잦다. (4) 기율이 문란한 낭병이 지나가는 마을에서의 폐해가 극심하여, 심할 때는 도적 떼보다 더 심각한 경우도 발생한다. 이에 왕양명은 낭병에 대한 지나친 의존심, 전투에 대한 공포증을 개선하려면 관군의 정예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병법과 무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실제로 전투에 나서서 지식과 지혜를 활용했다. 그는 오늘날 정보전이라 할 만한 전략인 적을 속이는 작전을 활용해 승승장구한다. 명 황제가 친정을 나설 정도로 골머리를 썩게 하던 ‘영왕의 반란’ 세력을 소수의 병력으로 진압하기도 했다.

 

정보 전쟁 개념 도입해 고립·봉쇄 전략……
수괴는 처결하되 살상 최소화하여 민생 안정화

저자는 왕양명의 반란 진압 총 책임자로 나선 왕양명의 전투 전략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적의 동태 파악이다. 감주 부임 직후 그는 실지 조사를 통해서 이미 적과 아군의 병력 규모나 작전 수행능력에 대한 실태를 다 파악하고 있었고, 정찰병을 내보내 적의 동향까지도 알아냈다. 둘째, 고립화 전략이다. 병력을 배치할 때 산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철저하게 봉쇄했다. 이뿐 아니라 적과 산 아래 주민이 연결되는 도로, 적들 간의 연결 도로도 전면 봉쇄하여 그들의 연결망을 완전히 차단했다. 십가패법을 엄격하게 시행한 것도 적의 정보 탐색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집중 포위 전략이다. 당시 적의 근거지는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관군이 어느 한 쪽으로만 공략해서는 제대로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적은 동쪽을 공격하면 서쪽으로, 서쪽을 공격하면 동쪽으로 달아나는 형국이었다. ‘장남 전투’에서도 그는 우선 광동·복건의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적을 동서 양 방향으로 포위 공략했는데, 과연 이 전략은 실전에서 주효했다. 넷째, 살상 최소화 전략이다. 도적 떼의 수괴는 처결하되 살상은 최소화하는 것 역시 왕양명의 주요한 전략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전쟁은 적의 섬멸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의 피해를 줄이는 것도 중요했다. 원래는 선량했던 백성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도적 떼에 가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 전략을 보면 왕양명의 명민한 합리성과 승부근성, 애민정신이 모두 녹아 있다.

 

반란을 평정한 뒤 닥친 ‘황당무계한 황제’라는 재앙
강빈·허태 일당의 ‘왕양명 죽이기’ 실태 고발

하지만 그의 능력을 시기한 세력의 모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또다시 난항을 겪게 된다. 13장‘황당무계한 황제’에서 나타나는 명 조정의 행보는 사욕에 충만한 무지한 황제가 감언이설에 놀아난 최악의 사례를 보여준다. 왕양명이 다 평정해놓은 반란 지역에 내려와 소위 ‘친정親征’이란 깃발을 내걸고 ‘군대 놀이’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황제 앞에서 왕양명은 좌절했다. 만약 황제가 내려온다면 막 전투가 끝나 참혹한 생활이 최고조에 달해 있던 강서 지역에겐 대재앙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황제가 내려오는 걸 막는 일이 왕양명에겐 지상과제가 되었다. 그는 기를 쓰고 ‘포로 압송을 중단하고 짐의 도착을 기다려라!’는 황명을 무시하리라고 작심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끈 채 강서 지역의 전후 질서 회복에 주력했다.
그러나 황제를 따라 내려온 강빈·허태 일당은 심지어 날조된 ‘죄명’을 내세워 왕양명을 체포하려고까지 했다. 당시 왕양명은 강서 순무 부임길에 있었기 때문에, 우선 그들은 길안 지부로 있으면서 반란 평정에 큰 공을 세운 오문정(반란 평정 후그는 강서 안찰사로 승진했다)부터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장충 무리의 사주를 받은 북방 병사들은 왕양명을 만날 때마다 대놓고 욕설을 퍼붓거나 시비를 걸었다. 심지어 일부러 몸을 부딪치는 경우도 있었다.
책은 왕양명이 이러한 불합리하고 몰염치한 정치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처신해나가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손에 잡힐 듯 보여준다.

 

강학을 즐겼던 교육자이자
새로운 사상을 창시한 철학자

왕양명은 절강성 여요에서 왕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이’하고 ‘특출’났으며 열두 살에 이미 자신이 성인聖人이 되고자 공부한다고 밝히곤 했다. 열다섯의 나이에 군사 정세를 살피러 혼자 변방으로 나가 기마와 궁술을 익혔고, 당시 사상계의 주류 학문인 주자학에 몰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을 시기하는 이가 많았던 탓인지, 당시 관료의 자리가 꽉 차 있던 탓인지 왕양명이 과거에 급제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여느 위인전에 나오는 장원 급제 이야기와 달리 왕양명은 과거 시험에 두 차례 이상 낙방했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되는 것이었으므로 실패에 개의치 않고 실천적 자세로 학문을 탐구하는 데 열중한다.
이후 유학을 성학聖學으로 삼고 이에 집중하긴 했지만, 왕양명은 학문을 수양하는 데 도교의 양생술, 불교의 선종 사상을 포괄하기도 하는 등 그 경계가 없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한 후 백성을 돌보는 관료로, 전장을 지휘하는 장수로 바쁘게 지내는 동안에도 학문 연구와 강학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서른네 살부터 제자를 받아들여 숨을 거둘 때까지 성인의 도를 가르쳤다. 유배지인 용장에서 왕양명은 주자가 이야기한 격물치지설 즉, 사물을 관찰한 후 지식을 얻은 후에야 천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관점이 세상의 이치와 맞지 않음을 깨닫는다. ‘용장에서 도를 깨쳤다’고 하여 이를 ‘용장오도龍場悟道’라 한다.
용장오도 이후 왕양명은 자신의 사상 체계를 공고하게 다져갔다. 그는 앎과 행동이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인간 본연의 마음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를 정리해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골방 철학자가 아닌 현실에 두 발을 디딘 채 정치와 전장을 누빈 그의 경험이 녹아 있다. 그의 사상 체계를 간단히 말하면 ‘양지良知’라고 할 수 있는데, 왕양명은 ‘양지에 이른다’ 혹은 ‘양지를 다한다’라는 뜻의 치양지를 통해 ‘지’와 ‘행’의 합일을 이뤄야 한다고 했다.

 

주자학 일색이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학풍을 일으켜
개인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이끌어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고 할 때는 먼저 그의 심지를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어지럽힌다. 이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인내심을 키움으로써 지금껏 할 수 없었던 사명을 감당케 하려 함이다.” 이 말은 왕양명의 일생에 그대로 투영된다. 일찍이 성인이 되고자 마음먹고, 공명정대한 태도로 관료직을 수행한 그에게 암울한 현실 정치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파란만장하고 고달픈 인생 역정은 그 길을 의연하게 걸어간 그에게 사상과 철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다. 왕양명이 고결한 인품으로 불세출의 위업을 달성하고, ‘기이하고 특출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런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입덕立德’ ‘입업立業’ ‘입언立言’ 이 세 측면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뤄 후대에 ‘삼불후三不朽’라 평가받았다.
이른바 이치만을 따지는 이학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는 왕양명의 심학心學은 많은 지식인에게 논쟁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세간으로부터 주목받았다. 그의 학문과 사상 체계는 하나의 학문이 되어 한 시대를 풍미했고, 명 중엽 이후로 ‘양명학’으로 불리게 된다. 양명학은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마음을 어떻게 수양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춘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종교의 장벽을 넘나들며 유儒, 불佛, 도道 3교의 일치론을 낳았다. 또한 양명학은 주자학 일색이던 동아시아 사상 체계의 흐름을 바꾸고, 근현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목차

제1장 특출했던 소년
제2장 유별났던 청년
제3장 나만의 길
제4장 ‘호랑이’ 때려잡기
제5장 구사일생
제6장 용장龍場에서 도를 깨치다
제7장 지행합일知行合一
제8장 위기 속에서의 특명
제9장 강서江西 전투
제10장 이두?頭 평정
제11장 영왕寧王의 반란
제12장 영왕 생포
제13장 황당무계한 황제
제14장 치욕 속에 받은 사명
제15장 양지설良知說
제16장 새로운 임무
제17장 최후의 전투
제18장 광명정대한 세상
후기
옮긴이의 말
왕양명 일대기
찾아보기

미리보기

왕양명은 시종 목표가 뚜렷했고 의지가 강인했다. 여러 차례 파란과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열두 살 때부터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이래 서른이 넘을 때까지 한 번도 그 목표를 바꾼 적이 없었다. 무술 연마, 병법 연구, 도사와의 교류, 참선 수행…… 이 모든 것이 다 성인의 꿈을 향한 노력이었다. 강인한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흔들림 없이 목표로 나아갔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포호사 선승과의 대화 이후 양명은 그 스스로도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한층 더 꿋꿋하게 성인의 길을 향해 내달릴 수 있었고, 좀더 심오한 정신세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_52쪽

 

호되게 곤장을 맞은 데다 대여섯 달 정도의 감옥 생활을 했고 또 좌천까지 당한 왕양명이었지만, 그 와중에 목숨이나마 건진 것은 천운이자 기적이었다. 출옥 이후 용장 임지로 떠나기 전 그는 준비물을 챙기기 위해 먼저 고향에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은 멀고 몸은 불편했지만 그런 고달픔보다는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누군가가 그를 미행하고 있었다. (…) 만약 사실이라면 왕양명의 목숨은 경각에 달린 셈이었다. 그는 도중에 휴식도 취하지 않았고 한시도 경계심을 늦추지도 않았다. 밤에 쉬고 낮에 이동하거나 그 반대로 하기도 했다. 하루 만에 그는 전당강錢塘江 북쪽 기슭에 도착했다. 강 너머 고향이 눈앞에 보였다. 이때 줄곧 미행해오던 자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노골적인 추격이 시작된 것이다.

_80쪽

 

왕양명이 여릉 현령을 지낸 불과 7개월 만에 그는 일련의 긴급 사태를 적시에 잘 처리했다. 예컨대 백성 집단 시위와 소송 사건, 가뭄과 전염병의 재난, 화재 및 도적 떼 사건 등이었다. (…) 이 7개월의 현령 재임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애민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가 민생을 가장 우선시하여 백성의 생활 질서를 재편하고 바로잡는 데 주력한 사실은 바로 그의 탁월한 정치적 안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결코 개인적 치적이나 치부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 탁견이 일생 동안 일관되게 반영되었다는 것은 향후 그의 행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어느 지역으로 부임하든 현지의 정치와 민생의 장기적 안정을 도모하는 데 열과 성을 다했던 것이다.

_121쪽

 

전투 과정에서 왕양명은 적의 전투 의지를 마비시키기 위해 곧잘 첩자를 활용하거나 거짓 정보를 흘리곤 했다. 특히 ‘장남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그리고 ‘이두 전투’에서 이 첩자와 거짓 정보 활용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후일 왕양명이 주신호朱宸濠의 모반을 평정하는 과정에서도 이 전략은 더없이 요긴한 효과를 발휘했다. ‘전쟁은 남을 속이는 게임’이라거나, ‘기만술은 전쟁의 필수 전략’이라는 말을 흔히 쓰듯이, 왕양명은 자신의 군사적 지혜를 통해 이 기만술의 효과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적의 전투 의지를 마비시킴으로써 당시 관군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급습’이라는 결정적인 방안을 창출해낼 수 있었다.

_174쪽

 

왕양명의 사상이 삶의 궤적을 따라 부단히 변모해왔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생활 범주가 확대될수록 그의 사상 또한 확대되어 갔다. 온갖 고난, 예컨대 반란 평정을 위한 전투라든지 유언비어가 난무할 때 더더욱 인간의 본심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했다. 모욕을 감내하면서도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던 지난날, 그는 ‘용장오도龍場悟道’ 이후 자신의 사상 체계를 한결 공고하게 다졌다. 이를 두 글자로 요약한다면 바로 ‘양지良知’. 여기서부터 그는 자신의 완벽한 사상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_253쪽

 

성인의 꿈을 향한 그의 의지는 단 한 번도 동요된 적이 없다. 젊은 시절, 병법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훗날 그가 과연 그 엄청난 군사적 공훈을 이룰 수 있었을까? 도불교의 연구가 없었다면 독특하고도 심원한 그의 심학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그의 위대한 공적과 사상이 있었기에 그는 지금껏 ‘삼불후三不朽’의 명성을 인정받고 있다. 왜 왕양명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는가? 다양한 사상을 충분히 섭취하고 융합한 다음, 이를 기반으로 자기 고유의 독창적 사상으로 승화시키고 또 그 사상을 충실하게 일상생활에서 실천했기 때문이다.

_311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둥핑董平

저장성 취저우 출신으로 저장대 철학과 교수 겸 학과장. 저장대 중국사상문화연구소장, 불교문화연구센터 주임 등을 겸하고 있다. 연구 분야는 인도 철학, 송명이학, 중국 불교철학 등이다. 미국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캐나다 요크대, 파리어언 동 방문화학원INALCO, 인도 푸네대 등에서 연구 및 강의를 맡았다. 주요 저술로 『천태종 연구』 『중화불교학 정신』 『왕양명의 생활 세계』 등이 있고, 중국 CCTV 인문학 교양 강좌 ‘백가강단’에서 「명재상 관중管仲」 「전기傳奇 왕양명」을 강연했다.

 

옮긴이

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중국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대 중국 연구소장, 한국 중어중문학회장, 성균관대 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는 『선진양한서 사시연구』 『중국현실주의 문학론』(공저) 『중국 시와 시인』(공저), 옮긴 책으로는 『여황제 무측천』 『사기』(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