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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려군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 지은이 | 장제
  • 옮긴이 | 강초아
  • 발행일 | 2017년 07월 14일
  • 쪽   수 | 564p
  • 책   값 | 25,000 원
  • 판   형 | 152*214
  • ISBN  | 9788967354336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등려군(이하 덩리쥔), 그녀의 전기가 국내 최초로 출간됐다. [첨밀밀] [월량대표아적심] 등으로 한국인의 심금을 울려온 중화권 가수 덩리쥔은 지난 1995년 젊은 나이로 타계했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은 10년의 취재 기간, 타이완부터 중국, 태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국, 프랑스 등 8개국에서 200여 명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집필한 덩리쥔 전기다. 저자 장제는 타이완 유수의 언론매체에서 편집주간을 역임하고 타이완 정부가 수여하는 언론인상인 금정상 수상자이기도 한 저널리스트다. 타이완의 덩리쥔문교기금회가 유일하게 공식 인정한 덩리쥔 전기이기도 하다. 이 책은 덩리쥔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기금회의 지원을 받아 출간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 노래를 시작한 신인 시절, 타이완에서 대스타가 된 후, 일본 진출, 그리고 마지막 활동과 사망까지 덩리쥔의 인생 전체를 다루고 있다. 가족과 기금회의 지원으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진도 여러 컷 수록되었다.

 

덩리쥔문교기금회가 공식 인정한 ‘유일한 판본’

이 책은 덩리쥔문교기금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유일한 전기’라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덩리쥔문교기금회는 덩리쥔의 이름으로 중국어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분야를 후원하는 단체다. 덩리쥔의 친오빠가 회장을 맡고 있는 만큼 덩리쥔의 유가족을 대표하는 입장으로, 덩리쥔과 관련된 모든 정보와 저작권을 관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덩리쥔문교기금회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아 줄곧 만들어지지 못했던 덩리쥔의 전기 영화가 기금회에서 긍정적인 쪽으로 돌아서면서 제작에 청신호가 켜졌다는 기사가 날 정도다. 그런 만큼, 기금회가 전폭적으로 집필을 지원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전기라는 점에서 내용의 진실성이나 수준 등을 믿을 수 있는 책이다.
사실 덩리쥔은 정치적으로 사이가 나쁘고 민간의 교류도 거의 없던 시절에 타이완과 중국을 목소리 하나로 연결시킬 정도로 문화적 의의를 갖는 대스타이기 때문에 타이완과 중국에서 수많은 버전의 전기와 관련 도서가 나와 있다. 하지만 유족을 인터뷰했거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유명 스타인만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정보가 많았고, 그것만 모아서 사실 확인도 없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쓴 책도 많다. 게다가 덩리쥔은 생전에 온갖 소문과 가십에 시달렸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거나 살해당했다거나 하는 식이다. 이 책에는 최초로 덩리쥔의 사망 직전 건강기록표가 발표되어 죽음에 관련한 논란을 불식시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용의 신뢰도에서 다른 책과는 확실히 차별화된다고 할 수 있다.

 

생전 지인 200여 명 인터뷰, 문화적 아이콘보다는 ‘인간 덩리쥔’에 초점

타이완부터 중국, 태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국, 프랑스 등 8개국에서 덩리쥔과 관련 있는 인물 200여 명을 만나 직접 인터뷰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은 덩리쥔의 어머니부터 가까운 친구였던 린칭샤(임청하) 등의 스타들, 덩리쥔의 음반제작자, 작곡가 등 업계 관계자, 학창시절의 스승과 학우들, 매니저와 가정부 등 사적으로 가까웠던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덩리쥔의 음악생활과 사생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부분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확실히 ‘덩리쥔 전기’이며 문화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이나 의미에 초점을 맞춘 책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활동을 시작하고, 중국어권 전체에서 대스타가 되고, 일본과 미국, 프랑스 등 해외로 진출하고, 특히 일본에서는 몇 년 머무르면서 활발히 활동을 하는 등의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짚어 나간다. 한 사람, 한 여성으로서의 덩리쥔의 모습을 진실하게 조명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물론 덩리쥔의 가수로서의 삶을 서술하며 문화사적 의미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덩리쥔이라는 사람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저자가 덩리쥔에 대해 조금 감정적으로 서술하는 면이 있다. 10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쓴 책이니만큼 저자는 마치 덩리쥔을 자신의 지인처럼 가깝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덩리쥔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이입할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객관적이지 않다고 보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낮에는 덩샤오핑, 밤에는 덩리쥔

1970~1980년대, 덩리쥔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타이완은 물론, 홍콩과 화교들이 많이 사는 동남아시아, 타이완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민간 교류조차 없던 중국에서도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막 개혁 개방이 시작되던 중국에서 “낮에는 덩샤오핑이, 밤에는 덩리쥔이 지배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중국에서 덩리쥔의 노래가 금지곡이었다는 것, 덩리쥔은 1995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 중국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덩리쥔은 일본 가요계에도 진출했다. 그저 ‘진출’만 한 것이 아니라 전성기에는 싱글 앨범의 판매고가 200만 장에 이를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한국에는 덩리쥔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덩리쥔이라는 가수를 인식한 것은 리밍黎明과 장만위張曼玉 주연의 로맨스 영화[첨밀밀](1996, 한국에는 1997년에 개봉)을 통해서다. 제목마저 덩리쥔의 히트곡에서 따온 이 영화에는 덩리쥔의 노래가 여러 곡 삽입되었다. 덩리쥔의 노래는 두 주인공의 엇갈리는 인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었던 사랑을 드러내는 매개체이자 상징물로서 관객의 가슴을 적신다. 중국어를 조금이라도 배운 적이 있다면 덩리쥔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 없다. 덩리쥔의 대표곡인 [첨밀밀]은 초급 중국어 교재에서 반드시 배우고 넘어가는 노래다. 가사가 쉽고 따라 부르기도 좋은 데다 다들 한 번쯤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곡이기 때문이다.

 

각색되고 왜곡된 덩리쥔의 수많은 모습

이 책의 역자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기도 했고 중국어 가요에 관심도 많은 편이라 스스로 덩리쥔의 노래도, 덩리쥔이라는 가수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번역하면서 내가 덩리쥔을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얼마나 단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알던 덩리쥔은 언론매체가 세상에 보여준 모습일 뿐이었다. 실제 덩리쥔의 아주 작은 부분이거나 심지어 제멋대로 각색하고 왜곡한 내용이었던 것이다”라고 역자 후기에 쓰고 있다. 즉 이 책을 통해 비로소 훌륭한 가수이자 최고 스타인 덩리쥔 외에 또 다른 모습의 덩리쥔, 진실한 덩리쥔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덩리쥔은 자신의 직업에 책임감과 존경심을 가졌던 사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노력했던 사람, 가족과 친구들을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애썼던 마음 따뜻한 사람이었다.
덩리쥔은 여섯 살에 처음 정식 무대에 섰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친구가 조직한 군부대 위문 공연단을 따라가서 노래를 불렀다. 정식 무대라고는 해도 어린아이의 노래에 출연료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덩리쥔은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무대에 올랐고, 박수가 나오지 않으면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여섯 살 아이에게 박수는 자신의 공연이 잘 끝났다는 신호였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꼬마 여자애의 귀여운 일화일 뿐이지만, 그 후로도 평생 덩리쥔은 ‘노래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항상 책임감 있게 임했다. 단번에 녹음을 마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를 했고, 늘 최상의 컨디션으로 무대에 서기 위해 노력했다. 이 책 곳곳에도 덩리쥔이 무대 아래서 보이지 않게 노력했던 모습이 담겨 있다.
덩리쥔의 집안은 무척 가난했다. 그래서 십대 초반부터 학교생활과 무대 가수생활을 병행하며 돈을 벌었다. 중학생이 밤마다 라이브하우스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학교에서 달갑게 생각할 리 없었고, 결국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하지만 덩리쥔은 독학으로 영어와 문학 등을 계속 공부했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덩리쥔은 외국어 공부를 특히 좋아해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를 할 줄 알았다.

 

“인생의 6분의 1을 덩리쥔에 바쳤다”

이 책은 저자 장제가 자료를 수집하고 덩리쥔의 발자취를 따라 취재를 다니면서 점차 원고가 완성되었다. 책 한 권을 완성하는 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저자인 장제 여사는 책 출간 당시 예순이었는데, 인생에서 6분의 1을 덩리쥔의 삶과 호흡하며 지내온 셈이다. 덩리쥔의 전기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저자 역시 보통의 대중과 같았다. 덩리쥔은 아주 선명하지만 점차 옅어지는 기억 속의 유행가 가수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덩리쥔은 그녀에게 삶의 일부분이 되었다. 타이완 언론과의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밝히길 사실 원고는 일찌감치 완성되었다. 하지만 출판사에서는 ‘남녀관계’에 관한 가십 보도 같은 내용이 너무 적다며 난색을 표했다. 가십성 기사를 더 추가하는 것 외에도 정치적으로 애매한 장을 삭제하길 원했다. 그래야 중국 대륙의 시장을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훌륭한 여성의 전기에 남녀상열지사 같은 것만 쓰라니, 그런 건 쓸 가치도 없고 읽을 가치도 없다.” 장제는 출판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장의 요구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보기에 세상이 덩리쥔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외모, 이미지, 노래가 아니라 정직, 용기, 봉사처럼 짧지만 영원할 진실한 마음이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집필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읽었다. 먼저 지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덩리쥔 전기는 모조리 다 읽었다. 일본, 타이완, 홍콩 등지에서 출판된 것은 물론, 덩리쥔문교기금회에서 정리한 30여 권에 달하는 신문 기사 스크랩북도 섭렵했다. 그래서 덩리쥔에 대한 최초의 인식은 그런 언론매체에 보도된 내용이었다. 당시 덩리쥔에 대한 생각은 노래를 아주 잘 하는 가수이자 스타, 하지만 실제 삶은 겉으로만 화려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여타의 연예인에 대한 인식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점차 조사가 깊어지고, 덩리쥔의 어머니와 2년간 매주 한 차례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리고 200여 명의 덩리쥔 관련 인물들을 만나고 8개국을 돌아다니면서 원고의 방향을 다시 잡게 되었다. 언론에서 말하는 덩리쥔은 실제와 달랐다.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언론 보도는 기자들의 주관이 들어간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문에 나온 것만 보아서는 덩리쥔에 대해 아주 얕은 부분만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저자는 조용한 한밤중에 인터뷰 자료를 정리하면서 덩리쥔의 노래를 듣곤 했다. 기본적으로 그녀의 모든 곡을 여러 번 들었다. 발매된 적 없는 유작, 수정을 거치지 않은 데모 레코딩도 들었다. 그런 노래를 들으면서 덩리쥔의 노래가 가진 부드러운 힘을 느끼곤 했다. 덩리쥔이 좋아했던 문학책들, 고전 시가집 등도 읽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그녀를 느껴보려고 했다.

 

저자의 인식 변화가 책의 깊이를 더했다

생각의 변화는 자료조사 과정에서 천천히 조금씩 일어났다. 덩리쥔은 예술적인 성취 없이 단지 그녀 자신의 개성만으로도 누구에게나 사랑 받았을 여성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녀는 덩리쥔에 대해 알면 알수록,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점점 더 그녀를 아끼게 되었다.
내가 본 대부분의 신문기사에서는 덩리쥔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녀의 연애관계를 과장해서 썼고, 동성애자라고 떠들었요. 심지어 에이즈니 마약중독이니 하는 말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 언론에서 말한 것이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된 후, 저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녀의 진실한 모습을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진실함, 따뜻함, 그녀 삶의 부드럽고 온화한 부분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것들은 일반적인 기자들은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것과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 아름다움이 가득한 삶에는 쓸 만한 ‘꺼리’가 없는 것이다.
저자는 덩리쥔의 여러 친구들을 인터뷰했다. 그 과정에서 덩리쥔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덩리쥔은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지원했고, 좌절과 불의에 맞닥뜨렸을 때 보여준 정의감과 용기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정말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스스로 저널리스트로서의 태도를 돌아보았다. 저널리스트는 진실한 내용만을 써야 하며 그 내용은 독자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이 끊어진 마을에 급수탑을 세워준 그 마음 그대로

저자는 타이베이泰北 지역에서 덩리쥔의 기부금으로 세운 급수탑을 봤던 것이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상한다. 당시 급수탑 위에 비뚤비뚤 ‘고맙습니다, 덩리쥔’이라고 쓰여 있었다. 스물아홉 살이던 덩리쥔은 자신이 나중에 엄청난 돈을 벌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어린 그녀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마을에서 식수가 말라버린 이야기를 듣고는 그저 ‘좋은 마음’에서 급수탑을 세웠다. 그런 마음씀씀이에 저자는 마음 깊이 감동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일은 다른 나라 사람이 보여주는 덩리쥔에 대한 존중이다. 저자의 생각엔 타이완 사람들이 세계에서 덩리쥔을 제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그녀가 일본 음반사에서 후나키 사장을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정식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후나키 사장은 타이완 방향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에야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렇게 깊이 있고 진지한 태도는 처음이었다. 덩리쥔은 그가 계약했던 수백 명의 가수 중 하나일 뿐인데도 타이완에서 온 가수 한 명에게 이렇게 예의를 갖출 뿐만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정성을 다했다. 후나키 사장은 매년 덩리쥔의 앨범 수익을 결산해서 직접 타이완에 와 덩리쥔의 어머니에게 전달한다. 그때마다 일본쌀을 가져와서 선물하기도 한다. 단지 덩리쥔의 어머니가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일본쌀이 참 맛있다고 한 것을 기억하고서 이제는 일흔이 넘은 노사장이 직접 멀리서 쌀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덩리쥔에 대한 마음이 깊지 않다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덩리쥔의 음악적 성취에 대하여

저자가 일본의 음악평론가 한 명을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덩리쥔을 단순히 인기가수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녀가 해낸 일들은 중국 문화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평론가는 저자에게 1983년 발표된 덩리쥔의 노래 ‘담담하고 조용한 마음’을 아주 높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걸작이라고 표현했다. 덩리쥔의 노래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이 당시와 송사 같은 중국의 고대시가를 접하게 된다. 덩리쥔처럼 자신의 문화를 다른 나라에 전파한 가수는 흔치 않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목차
추천 서문 나만 홀로 그녀가 여전히 _린칭샤

서문 더 이상의 루머는 없다 _덩창푸

1장 고향 사람原鄕人 
숨어 다니던 시절, 전쟁을 겪고 다시 태어난 고향 사람 | 까딱했으면 세상에 없었을지도 | 인복이 많았던 아이, ‘리윈’이 ‘리쥔’으로 바뀐 사연 | 젖을 물리지 않다, 가난과 고생 속에서 길러진 성격 | “아주 맛있어요. 한 그릇을 더 먹어도 될까요?” | 여섯 살에 오른 첫 무대, 무용을 배우다 | 낭독의 발견 | 단수이 강변에서의 발성 연습, 현 웅변대회 1등 | 두 고향 이야기, 본성인과 외성인 사이에서

2장 그대만 보면 웃어요一見你就笑 
“엄마, 코카콜라 한 병만 마셨으면 좋겠어요.딱 한 병만요.” | 군부대 위문 공연, 가수의 삶이 시작되다 | 선택하기 힘든 두 가지, 학업을 그만둔 후회 | 바쁜 생활 처음 느낀 인기와 자신감의 성장 | CTV와의 계약, 〈반짝반짝〉 한 곡이 인생의 전환점 되다 | 다른 분야로의 도전, 어울렸지만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 | 자선활동에 힘쓰다, 세례명에 담긴 의미 | 항상 소녀처럼, 그런데 미니스커트는 왜 입었지?

3장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月亮代表我的心 
1970년 덩리쥔의 해, 천상의 목소리로 등극 | 늘 어머니와 동행, 21년간 사용한 전자시계 | “1파운드의 용기는 1톤의 행운과 같다” | 덩리쥔은 왜 운전을 배웠을까 | 낮은 코의 역경, 기자 질문에 화낸 사연 | “우린 자선 공연을 가는 거잖아요. 비행기는 괜찮을 거예요.” | 타이 북부 후이모 촌에 첫 번째 상수도를 선물하다

4장 느린 인생의 길漫步人生路
두 번째 고향, 홍콩과의 인연 | 취객 때문에 처한 위기 “광둥어 알아들을 수 있나?” | 간호사가 되려고, 구직광고 보고 면접 치른 사연 | 밍 언니의 음식, 일상의 행복한 나날들 | 숫자 8에 대한 미신, 파리 8구 8번지 6층 | 홍콩에서 거둔 성공 일본 진출의 씨앗이 되다 | 덩리쥔과 덩시취안의 협력, 광둥어의 한계를 돌파하다 | 임신부터 가짜 여권 등 루머를 이겨내다 | 여성 영화감독과의 친분, 동성애자라는 소문으로 진화 | 홍콩 남단의 스탠리 그녀의 추억이 이곳저곳 | 옛 물건을 보니 옛사람이 그리워, 불길한 예감, 다 풀지 못한 여한

5장 나는 당신만 생각해요我只在乎你 
하늘이 내린 목소리 일본 활동을 탐색하다 | 일본에서의 두 번째 싱글 75만 장 돌파 | 최우수 신인상 뒤에 숨겨진 신인의 눈물 | 이마 한가운데 생긴 육종, 간만의 휴식 | 여권 스캔들, 전화위복의 인생 전환점 | 일본으로 복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다 | 완벽한 작별, 일본 유일의 개인 콘서트 | 좋은 가수가 아니라 좋은 여자입니다 | 깊은 그리움, 일본 연예계 종사자들의 평가

6장 바다의 소리海韻 
미국으로 가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시절 | 금지할수록 더 뜨거워지는 덩리쥔 신드롬 | 추모의 다양한 방식, 공통점은 ‘사랑’ | 비틀스의 EMI 음반사 녹음실에서 덩리쥔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다 | 미국에서의 몇 가지 사건, 침대 머리맡의 칼 한 자루

7장 담담유정淡淡幽情 
담담유정, 최고의 몽환적 앨범 | 기획 및 제작에 2년, 고전 명시 12수로 승부 | 송사宋詞를 외우던 소녀, 곡조를 쥐락펴락하는 경지 | 시대 구분의 분수령이 되다, 저우쉬안의 바통을 잇다 | 첨밀밀은 원래 인도네시아 민요였다

8장 그대는 최전선에君在前哨 
맞춤옷 같은 노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치 | 여섯 살의 첫 무대, 공연하고 사탕을 얻어 먹다 | 흙바닥에 앉아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 행복 | 1974년, 진먼 섬을 밟다 | “전선의 생활을 살펴보니 마음이 무겁군요” | 아버지의 중풍, 1979년 타이완으로 돌아오다 | 귀순 반공주의자 우룽건 “덩리쥔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 | 칭취안강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군인의 연인’ | 내년에 다시 만나자던 인사, 이뤄지지 못한 약속

9장 천언만어千言萬語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다, 노래에 뜻을 담아 | 2시간 동안 울면서 얘기하다, 톈안먼 사태의 충격 | 프랑스에 머물며 간호학을 배운 이유 | 파리에 집을 사다, <피에 물든 모습> 합창 |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영원히 열리지 못한 콘서트 | 화가 판청의 평가 “가장 허위와 가식이 없는 사람” | 홍콩의 이름 높은 미식가, 상반신 누드로 해변을 달리다 | 조카의 기억 속 고모 덩리쥔의 모습 | 가까운 친구, 그들 기억 속의 덩리쥔

10장 첨밀밀甜蜜蜜 
몰래 짝사랑한 이웃 오빠, 열여덟 살의 첫사랑 | 수많은 스캔들, 인연이 있었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람 | 청룽과의 인연 “왜 영화배우가 음악상을 주나요?” | 말레이시아 ‘설탕왕’ 2세와 약혼, “노래를 그만두라구요?” | 재능을 사랑한 덩리쥔, 열다섯 살 연하의 연인 스테판 | 1995년 11월, 꽃가마 대신 관을 들다

11장 안녕, 내 사랑再見, 我的愛人 
좋아하는 도시 치앙마이, 휴식과 정양을 위한 시간 | 타이 북부 지역에 대한 관심, 중국어를 배우는 아이들을 돕다 |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두다 | 매핑 호텔에서 보낸 시간, 사람들의 기억 속 덩리쥔 | 대스타의 죽음, 언론 매체의 추모 방송 열기 | 루머에 대한 반박, 치앙마이 람 병원의 주치의가 밝히다

12장 그대 언제 돌아오실까 何日君再來 
돌아온 덩리쥔, 국장으로 치른 장례 천만 명이 애도하다 | 마지막 안식처 쥔위안에 잠들다 | 루머와 맞서 싸우기보다, 관대한 마음으로 살아가다 | 마지막 소원, 미발표 유작 | 사랑의 확산, 인터넷에서도 여전한 덩리쥔의 영향력 | 사랑의 계승, 문교기금회의 활동

맺는말 사랑은 설명이 필요 없다
덩리쥔 연보
옮긴이의 말
부록 화보로 보는 덩리쥔의 생애

미리보기

하마터면 다른 집 자식 될 뻔한 사연

당시 타이완의 시골생활은 꽤 가난하고 고되었다. 그래서 덩리쥔의 어머니 자오쑤구이는 덩리쥔을 임신했을 때, 이웃 아주머니에게 세 아들도 키우기 힘든데 또 아이가 태어나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슬하에 자녀가 없는 이웃집에 보내려 한다는 말을 했었다. 자매처럼 지냈던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구두 약속을 했고, 그 아주머니는 자오쑤구이가 갓 낳은 아기를 데려가서 자기가 낳은 아이로 삼아 키울 작정이었다. 덩리쥔의 태어난 날 아주머니는 지난번 약속한 대로 아이를 자기 집에 보내주기를 바라며 뭐라고 말해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열 달을 배 속에서 키운 고생이며, 낳아서 품에 안은 만족감은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버텨내게 하는 힘이 된다. 게다가 오랫동안 바랐던 딸이 아닌가. 뭐라 해도 남에게 내줄 수가 없었다. 자오쑤구이는 난처한 마음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나 심하게 울었던지 아이를 데려가려고 했던 이웃집 아주머니도 당황할 정도였다.

_25쪽

 

덩리윈이 덩리쥔이 된 사연

덩리쥔의 아버지는 부대에서 가장 학식이 깊은 양 씨 성을 가진 장교를 찾아가 딸에게 고운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장교는 고심 끝에 리윈麗筠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름다울 려麗는 청아하고 수려하다는 뜻이고 대나무 균筠은 대나무의 푸른 껍질이라는 뜻인데, 통칭 대나무를 의미한다. 이 이름은 고결하고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차근차근 성장하여 두각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 사람이 대나무 균筠을 임금 군君처럼 읽었다.[‘筠’은 ‘윈’과 ‘쥔’ 두 가지 발음을 가진 글자다] 그래서 리윈이라는 이름을 리쥔으로 읽는 경우가 많았고 점점 습관이 됐다. 어머니조차 리쥔이라고 불렀으니 모두 입에 익은 대로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덩리윈이 가수가 되었을 때 예명을 ‘덩리쥔鄧麗君’으로 결정한 것은 마치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_27쪽

 

10살의 아이가 새벽 5시에 일어나 노래연습하다

덩리쥔을 그저 천재형 가수라고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노력파였다. 이미 10살 때부터 덩리쥔은 매일 아침 5시쯤 일어났다. 날도 다 밝기 전이었다. 아버지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단수이淡水 강변으로 가서 목을 풀었다. 매일 강을 바라보면서 발성 연습을 했다. 아버지가 강가에 데려다줄 시간이 없으면 페이쩌밍 선생님이 데려다주곤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맑고 깨끗하며 음을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발성 연습의 기본기가 탄탄했기 때문이다.

_43쪽

 

배우와 가수를 겸했으나 결국 가수를 선택

한번은 아리 산阿里山에서 일출 장면을 촬영하는데 새벽 4시에 덩리쥔이 일어나지 못해 어르고 달래서 겨우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 스태프들은 상황이 재밌어서 어쩔 줄 몰라 했고, 후에도 그 일로 놀림거리가 되었다. 또 여러 사람과 자전거를 타고 경사진 산길을 내려오는 장면을 찍는데, 오랫동안 자전거를 타보지 않은 덩리쥔이 겁을 먹었으면서도 사실을 말하는 게 부끄러워 오기로 자전거를 타고 내려오다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통제하지 못해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란 덩리쥔은 체면에도 불구하고 비명을 지르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_71쪽

 

위로하고 감싸주는 마음

1971년 덩리쥔은 화교여성친목회의 요청으로 사이공에 가서 자선 파티에서 노래를 불렀다. 비행 도중 베트남 항공사의 소형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덩리쥔의 어머니는 몹시 놀라 다리가 다 후들거렸고, 한 노인은 놀란 나머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덩리쥔은 곧장 그 노인에게 다가가서 등을 두드리며 위로를 했다. “걱정 마세요, 걱정 마세요! 우리는 지금 자선 파티에 공연을 하러 가는 거예요. 좋은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이 비행기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_105쪽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의 극진한 효녀

사실 많은 사람이 잘 모르지만, 1982년은 덩리쥔에게 매우 힘든 해였다. 아버지가 심장병 발작으로 병원에 입원했기 때문이다. 그때 덩리쥔은 타이베이의 디스코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 날짜를 변경할 수도 없어서 매일 공연을 마친 뒤 피로한 몸을 이끌고 병원에 와서 아버지 곁을 지켰다. 아버지가 건강을 되찾고 퇴원할 때까지 계속 병원에서 밤을 보냈다. 당시를 회상하던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면서도 조금 원망하듯이 말했다. “밤마다 와서 병실을 지켰어요. 내가 몇 번이나 말렸는지 몰라요. 집에 가서 좀 쉬라고요.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지요. 그애가 좀더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좀더 이기적으로 굴었다면, 우리를 좀 덜 사랑했다면,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자식을 앞세우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_140~141쪽

 

덩리쥔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노래

1992년 덩리쥔이 귀국했을 때, CTS 방송국에서 독점 인터뷰를 했다. 진행자 천웨칭陳月卿이 덩리쥔에게 물었다. “수백 곡을 불렀는데, 어떤 노래를 제일 좋아하나요?” 덩리쥔의 대답은 [나는 당신만 생각해요]였다. 이 곡의 가사는 덩리쥔의 스승이기도 한 선즈가 썼다. 선즈는 막 데뷔한 덩리쥔에게 발음 하나부터 가르치면서 노래 훈련을 시켰다. 선즈가 가사를 붙인 곡 중 덩리쥔이 부른 곡이 제일 많고 또 가장 잘 불렀다. 이 노래는 원래 일본어로 발표한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겨요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였다. 일본 활동 절정기를 열어준 곡이기도 했다. 당시 어떤 일본 가수도 ‘일본유선대상日本有線大賞’ ‘전일본유선대상全日本有線放送大賞’을 3연패한 덩리쥔의 성적을 따라오지 못했다. 심지어 이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_164~165쪽

 

여러분을 위해 순수한 노래를 부를께요

1983년 전후로 중국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정신 오염 제거 운동’이 시행되었다. 덩리쥔의 노래가 표적이 됐다. 덩리쥔의 녹음테이프가 전부 폐기됐고, 당국은 덩리쥔의 테이프를 개인적으로 소장했다가 발각되면 압수 및 처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덩리쥔의 노래가 퇴폐적이며 가사의 ‘남녀상열지사’가 심각한 정신적 오염을 야기한다고 여겼다. 방송 언론을 통해 강도 높게 비판하는 보도를 끊임없이 내보내기도 했다. 덩리쥔은 이런 비판적 언론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좋아하는 중국의 팬들을 걱정했다. 덩리쥔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다. “여러분이 제 노래를 듣다가 처벌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능한 한 빨리 모든 테이프를 제출하십시오. 저 또한 앞으로는 좀더 순수한 곡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_221쪽

 

민족문학을 대중음악 속에 담아낸 [담담유정]

그는 [담담유정]을 덩리쥔이 책임감과 사명감에서 출발하여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녹음해낸 훌륭한 음반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가사나 곡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노래의 해석이 섬세하고 심금을 울린다고 평했다. 중국 문화를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특히 의미 있는 작업이며, 민족문학의 미학을 대중음악 속에 담아낸 동시에 엄숙한 역사·문화적 민족성과 오락의 대중음악성을 함께 성취하여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듣기 좋게 만들어낸 것은 지난 100년간 오로지 덩리쥔뿐이라고 했다.

_240쪽

 

톈안먼 사태, 우울과 암담을 노래하다

[아사히신문]의 기자 시노자키 히로시는 이렇게 기억한다. “한밤중, 새벽 2시에 테레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반쯤 울면서 말하더군요.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덩리쥔은 이런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시노자키 히로시는 톈안먼 사태에 대한 덩리쥔의 바람과 성원의 마음을 담은 전문적인 특집 기사를 두세 편 썼다. 그 기사로 일본에서도 적잖은 공감을 끌어냈고, 여론의 주목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 덩리쥔이 톈안먼 사태에 대해 표현한 고통과 우울, 암담함은 토러스 음반사도 다 느낄 수 있었다. 후나키 미노루는 당시 덩리쥔의 이런 감정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차차 덩리쥔이 보통의 가수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_298~300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장제姜捷

1955년에 태어나 정치작전학교 미술과를 졸업했다. 해군 예비역 중령으로 2017년 현재 『천주교주보』 부편집장을 맡고 있다. 『청년일보』 디자이너, 기자, 편집부 주임을 역임했으며, 『롄허보』 『다청보』 『미국세계일보』 편집장을 거쳤다. 방송, 영화 분야 시나리오 작가, 디자인 고문, CTS 방송 「유영세어」 프로그램 진행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르포 문학작품 『수렵 외도 기행: 바다와 더불어』로 1994년 타이완 언론출판계 최고 권위의 금정장 특집보도상을 수상했다. 평소 공익활동에 관심이 많아 암 예방 협회, 미혼모의 집, 에이즈 환자의 집 등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옮긴이

강초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며 다양한 종류의 책을 만들었다.
현재 번역집단 실크로드에서 중국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13.67>,<기억나지 않음, 형사>, <S.T.E.P>, <등려군>, <우울증 남자의 30시간>, <망내인>, <낯선경험> 등이 있다.

 

기획

등려군문교기금회

1995년 10월 10일 설립됐다. 타이완 중화텔레비전방송국CTS, 홍콩 폴리그램 음반사 및 일본 토러스 음반사가 공동으로 출자했다. 평생 음악 예술에 헌신하고, 쉼 없이 분투했던 등려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활동을 펼친다. 문화, 교육, 음악, 예술 등을 지원하고 공익과 자선 관련 각종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