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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의 노래 가토 슈이치 자서전
  • 지은이 | 가토 슈이치
  • 옮긴이 | 이목
  • 발행일 | 2015년 09월 21일
  • 쪽   수 | 552p
  • 책   값 | 25,000 원
  • 판   형 | 136*202
  • ISBN  | 9788967352462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추천의 글
책소개

진정한 자유인이자 세계인이었던 지知의 거인 가토 슈이치는
전쟁과 이념이 옥죈 극단의 20세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양의 노래]는 나의 기원이다.”
– 가토 슈이치

 

세계사적 지성의 성장
가토 슈이치는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다. 그는 혜택 받은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조부는 간토평야의 대지주였고 외조부는 일찍이 이탈리아에서 유학하여 서양풍의 교양과 미식을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부친은 도쿄의 개업의였으나 돈벌이와 무관하게 성미대로 진찰을 했고 환자를 대접해 돈을 벌겠다는 식의 영업의식이 없었다. 그 덕에 환자는 극히 적었지만 생계는 검소하며 평온했고, 가토는 금욕주의적 합리성이 견고한 집과 군국주의 색채가 강한 수재학교를 오가며 엘리트교육을 받았다.

어려서 가토는 자연과학을 좋아했고 독서와 공부 모두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그렇게 우수한 성적으로 한 학년을 건너뛰어 일류중학교에 합격했지만 그는 그 시절을 가장 따분하고 괴로웠던 시기, ‘공백’이라 표현한다. 이 극단적인 공백에 그가 채워 넣은 것이 그의 평생으로 이어지는 예술적 식견이었다. 중학 시절 가토는 외조부를 따라 영화와 극을 보러 다니며 문학과 공연예술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문학에 심취해 고등학교 수험에 실패하기도 했으나 본시 주관이 선명했던 소년의 세계에 문화예술이 더해진 이후 그의 삶에 좌절이라 할 만한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태평양전쟁 발발 소식으로 도쿄가 술렁이던 날 극장에서 분라쿠文樂공연을 보았고 매일이 전쟁 소식으로 뒤덮일 때 국민복國民服 차림의 사람들이 늘어선 도쿄 거리를 여행자처럼 걸었다. 이즈음 그는 스스로가 처음부터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이후 대륙을 건너다니며 여러 사회의 주변부에서 진지한 관찰자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는 도쿄대 의학부를 졸업해 대학에서 의사로서 생활을 시작하는 한편 당대의 여러 문인과 지우를 얻어 글을 쓰고 문학회를 꾸렸다. 그러는 동안 천황제 파시즘을 겪었고 전쟁에 동원된 친구들의 죽음과 상처를 보았으며 미일합동 원폭의학조사단에 참여해 히로시마에 가기도 했다. 격동의 시기 한가운데서 슬픔에 잠기기도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어떤 국면에서든 그는 놀랍도록 그 자신이다. 패전 후 폐허가 된 도쿄에서 정부가 비장하게 ‘일억총참회一億總懺悔’를 선전하는 가운데 공연한 분노나 선동된 비감함 한 점 없이 일상의 풍경에서 사람들의 활기를 읽어내는 모습은 가토 슈이치라는 인간의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견문을 거듭한 반생
태평양전쟁 이후 가토 슈이치는 기회를 얻어 프랑스로 유학한다. 이를 그는 스스로 ‘제2의 출발’이라고 썼다. 파리의 대학촌에 방을 얻어 각국의 청년들과 문학, 그림, 시에 관해 논하는가 하면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건축과 음악, 공연을 깊이 즐기는 나날이 이어진다. 단기 통역을 하거나 일본에 견문을 글로 써 보내는 등의 벌이로 넉넉지 않은 생활이지만 그는 언제든 해당 사회와 사람들 사이에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엄정한 자기성찰로 이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감탄으로, 때로는 그저 세계에 관한 끝없는 탐구와 질문으로 나아간다. 어느 때건 놀라운 것은 그의 동나지 않는 날카로운 호기심이다. ‘제2의 출발’ 이후의 여정은 가토의 친구들이 그를 ‘세계사적 자유인’이라고 한 뜻을 절감케 한다.

뒤에는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 참석해 인도를 거쳐 타슈켄트에 거하기도 하고, 좀더 후에는 유럽과 미국, 캐나다, 중국과 소련, 동유럽을 넘나들며 여러 도시에서 글을 쓰고 강의했다. 반전운동, 일본 학생운동, 오월혁명, 문화대혁명, 프라하의 봄, 독일 통일, 신좌파의 부흥과 침체, 중국식 사회주의와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현장 등을 몸소 체험하거나 목격하는 동안 당대 인물들과 교분을 맺었고 그 자신의 명성도 높아졌지만, 정치세력에 깊이 몸담거나 특정 집단의 높은 자리에 올라 주변을 호령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에 비켜서서 20세기의 풍경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면서 타자를 억압하지 않는 원칙과 판단을 구축해나간다.

 

2015년에 가토 슈이치를 읽는다는 것
[양의 노래]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의 중턱에서 끝난다. 그는 수십 년 동안에도 정부 정책에 반대해 참여지식인으로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왔지만 책에서는 스스로 “목숨 걸고 정치활동에 뛰어들 만큼 정치적 도의를 믿었던 적은 없다”고 썼다. 다만 그 이상으로 출세와 영달을 믿지 않았기에, 지적 만족을 추구하는 가운데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의견을 표명했을 따름이다. 기시 노부스케 정권에 반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전쟁은 정치적 행위이며 모든 정치적 행동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그러나 전쟁으로 잃은 생명의 가치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고 절대적인 것이다. “상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 방식으로, 헤아릴 수 없는 희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는 옳지 않다.”

그로부터 40년 이상이 흐른 뒤, [양의 노래]의 기록보다 뒤의 시기에 그는 분명 일종의 ‘정치활동’에 발 벗고 나선다. 오에 겐자부로, 쓰루미 슌스케 등과 ‘9조 모임’을 만들어 일본 평화헌법 수호운동에 헌신한 것이다. 상대적인 목적과 이념들이 난무했던 20세기를 관통한 끝에 그가 얻은 답은 ‘생명 가치’였던 셈이다. 가토는 일본헌법 9조를 “일본인이 이어가고 있는 ‘정신의 모험’”이라 말했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를 향한 서약을 담은 국제적 공약이자, 전후 수십 년간 일본인이 평화라는 이상을 지켜내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양의 노래]는 수많은 정치 이념의 상대성과 일면성 반대편에 있는 어떤 절대적인 것의 가치를 스스로 온전히 납득할 때까지 세계 속에서 멈춤 없이 사유해온 인물의 이야기다. 그가 말년에 확고한 행동으로 지지한 평화헌법에 그가 붙인 이름을 이 책에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양의 노래]는 ‘가토 슈이치가 이어간 정신의 모험’이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대성했다가 상황에 따라 끌어내려지는 어떤 다른 사회적 삶들과 달리, 그의 이야기는 평생에 걸쳐 완성되어가는 듯 보인다. 어떤 이상을 지켜내면서, 그리고 어떤 상대적인 가치에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않으면서. 양의 해에 태어나 스스로 부드러운 양의 성품을 닮았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나 무리 짓지 않는 양이다. 너무도 자유롭게 자신만의 모험을 계속해나간다. 인생을 일생에 걸친 모험으로서 감당하면서 어떤 이상을 유연하게 지켜간 가토 슈이치의 삶이 하나의 전범이 되리라 믿는다.

목차

양의 노래

01 할아버지의 집
02 향기로운 대지
03 시부야 곤노초
04 아픈 몸
05 사쿠라요코초
06 우등생
07 공백 5년
08 미타케초의 집
09 반항의 징조
10 2·26사건
11 고등학교 시절-고마바
12 희화
13 고원의 목가
14 축도
15 행복했던 지난날의 추억
16 화창하던 어느 날
17 불문학연구실
18 청춘
19 내과 교실
20 1945년 8월 15일
21 신조
22 히로시마
23 1946년
24 교토의 정원
25 제2의 출발
26 시인의 집
27 프랑스 남부
28 중세 유럽
29 고국에서 온 편지
30 두 여인
31 겨울 여행
32 음악
33 해협 저편
34 위선
35 이별
36 밖에서 바라본 일본
37 격물치지
38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39 사별
40 끝나지 않은 심의

 

저자 후기

 

양의 노래 그 후
1 『양의 노래』 그 후
2 북미의 발견
3 1968년
4 베를린·뉴헤이븐·중국
5 여행의 끝

 

후기 I
후기 II

미리보기

나는 지금도 이 기묘한 인물을 잊을 수 없다. 큰아버지는 젊은 시절, 당시로서는 신기했던 사진술에 푹 빠졌고 사진촬영 기술을 잠시 가르쳤던 것 외에는 학교를 졸업한 뒤로 죽을 때까지 40여 년 동안 어떤 직업에도 종사하지 않았다. “징글징글해.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저렇게 건장한 체구에 아무 일도 하지 않다니……”라고 내 어머니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인물을 ‘징글맞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비록 게으를지언정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일평생 게으름을 피우며 지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에게는 비굴한 면이 없었고, 출세를 원했으나 출세할 수 없었던 오사카 상인의 아들처럼 야비한 면도 없었다. 바지런히 일하고 꾀 많은 그의 아내처럼 다른 사람 뒤에서 약삭빠르게 처신하는 교활함조차 없었다. 공무원이 된 도쿄제국대학 출신 수재들처럼 시건방진 말투가 없었고, 졸개들을 거느린 대의사代議士들처럼 호걸인 양 큰 소리를 내며 웃는 일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꼬맹이인 나에게 ‘징글맞고 미운’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던 셈이다. _「향기로운 대지」

 

여자에게는 외설스런 망상을 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터무니없는 동경을 하고 있어서, 그 어느 쪽도 현실의 여자 앞에서는―가령 찻집 아가씨 앞에서조차―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겁 많고 자존심이 세서, 말을 걸려고 해도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여자 대하는 법을 몰랐고, 여자 쪽에서도 나를 상대해주지 않았던 탓에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그런 스스로를 한 시대의 문화적 희화로서 명확하게 의식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내 안에 있는 흐리멍덩한 것, 불철저한 것, 애매모호하고 견고하지 못한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다. 그 대책을 스스로 강구하는 일은 그 무렵의 나로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책은 훗날 외부에서 찾아왔다. 첫 번째는 의학이고, 두 번째는 태평양전쟁이다. 의학은 지식의 보편성을 보증했고 태평양전쟁은 일본 사회의 불확실한 부분에서 나를 떼어냈기 때문에, 그 뒤로는 그 확실한 부분을 발견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_「희화」

 

내 친구는 하나둘 전쟁터로 떠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다. 그만은 소집되어 중국에 갔다가 병에 걸려 일본 병원으로 후송되었다가 얼마 후 제대했다. 그는 출발하기 전에 내가 만났을 때와 거의 변한 게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여하튼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고생은 했겠지만” 하고 그간의 감개를 실어 말했다. “고생 정도가 아니었지, 우리 그 얘긴 하지 말자. 다신 생각도 하고 싶지 않거든”이라며 그는 짧게 대답했다. 나는 그때 중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지금도 모르거니와 그것을 아는 날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돌아온 사내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 그 사내가 아니었다. 훨씬 세월이 지난 뒤에 그러한 사실이 차츰 내 눈에도 보이게 되었다. _「청춘」

 

로맹 롤랑이 음악이나 유리세공이나 신비주의에 빠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자이며 국제협력주의자이며 진보주의자였다고 한다면, 시인 아르코스는 더 직접적으로 이른바 강한 모순을 안에 품고 있으면서 인도주의자이며 국제협력주의자이며 진보주의자였을 것이다. 그 세계는 아주 좁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거짓이 아닌, 가짜가 아닌, 절대적 진실이 있었다. 늙었으면서도 여전히 먼 아시아에서 살해당한 민족주의자에게 진실로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정말 시인에게만 가능한 일이리라. 시인은 신문 기자가 될 수도 있고 정치학자도 될 수 있다.(아르코스 씨는 물론 그 어느 쪽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신문 기자의 시사 정보 혹은 정치학자의 방법론이 시인들 내면의 시인다움을 창조해내는 것은 아니다. _「시인의 집」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돌아서며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뗐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녀의 뒷모습을 떠나보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그녀는 온종일 내 머릿속에 있었다. 그녀의 빛나는 눈동자, 손끝에 전해지는 머릿결의 감촉, 그녀의 목소리가 내는 그 미묘한 억양의 변화, 토스카나의 태양과 도나우 강의 눈보라……. 돌이켜보면 모든 것에 무한한 과거가 존재했다. 그 과거는 빈 서부정거장에서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코 그곳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상상 가능한 온갖 미래로 이어져 있었다. 나는 내 세계로 한 여인이, 다시 말해 ‘타인’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세계의 질서는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은 그때까지 내 삶에는 없던 것이었다. _「겨울여행」

 

1968년의 프라하에서 소련 전차는 발포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움직이지 않았고 시민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았다. 그 대신 프라하 시민들은 시내 도로표지판 화살표를 모조리 모스크바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들은 전차를 에워싸고 소련 전차병에게 항의했다. 그날 밤, 갑자기 우리 집 텔레비전 뉴스가 중단되고 한 남성의 정면 반신상이 화면에 나타났다. 남성은 독일어로 비엔나 시민에게 보내는 호소를 반복했다. “프라하방송국은 점령당했다. 우리는 비밀 아지트에서 비엔나 시민에게 호소한다. 소련군은, 우리 정부와 시민의 뜻을 거스르며 프라하에 주둔 중이다. 비엔나 시민들이여, 부디 이 사실을 전 세계로 전파해주기 바란다. 나는 이 사실만을 계속 호소할 것이다. 비엔나 시민들이여…….” 어느 누가 그의 호소를 잊을 수 있을까? 나는 프라하 거리에서 마주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한편에는 압도적으로 강대한 군사력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지극히 설득력 있는 인간적 주장이 있었다. 한쪽에는 어떤 할 말도 없었고, 다른 한쪽에는 기지機智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희망이 있었다. 1968년 8월의 프라하에서는 언어가 전차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_「양의 노래 그 후_3장:1968년」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참여지식인이다. 1943년 도쿄대 의학부에서 박사(뇌과학) 학위를 취득했고 학창 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 시, 소설, 평론을 썼다. 일본 패전 직후 미·일 원자폭탄 영향 합동조사단의 일원으로 피해 실태 조사를 벌였다. 1951년 유학생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 등에서 혈액학 연구에 종사하는 한편 일본 잡지와 신문에 문예평론을 발표하고 귀국 후 “일본 문화의 잡종성”에 관한 내용을 1956년 『잡종문화』라는 책으로 간행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58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참가를 계기로 의업을 접고 본격적으로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반전 사회운동에 앞장섰다. 조치上智대 교수, 예일대와 브라운대 강사, 베를린자유대와 뮌헨대 객원교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교수, 리쓰메이칸대 국제관계학부 석좌교수 등을 역임했고 스위스, 멕시코, 중국에서도 강의했다. 1980년 『일본문학사서설』로 오사라기지로상, 1993년 아사히신문상을 받고 2000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철학자 쓰루미 슌스케 등과 함께 평화헌법 9조를 지키는 ‘9조 모임’을 만들고, 생을 마칠 때까지 평화헌법 수호운동에 헌신했다.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한 그는 문학, 사상, 예술, 역사, 정치 등 전방위적 분야에 서 예리하고도 깊이 있는 저술 활동과 발언을 해왔다. 가톨릭 세례를 받은 2008년 12월 5일 도쿄 세타가야 구의 병원에서 선종했다.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저항과 문학』 『20세기의 자화상』 등 55여 권의 저서와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일본인의 사생관』 등 15여 권의 공저가 있고 저작집, 강연집, 대담집 등의 형태로 전집 및 유고집이 간행되고 있다. 저서들은 미국, 프랑스, 독일, 중국 등 여러 국가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옮긴이

이목

한림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곡서당에서 공부했다. 문학, 역사, 철학 고전에 관심을 기울이며 근현대사로 이어지는 일본의 근세 후기 문화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소년의 눈물』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청춘을 읽는다』 『한무제』 『국경을 넘는 방법』 『하루 한 구절 중국명언집』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등이 있다.

추천의 글

“가토 슈이치의 [양의 노래]를 나는 고전의 반열에 올려두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에는 드문 ‘저항하는 휴머니즘’이 어떻게 태어나 자라났는지 이야기해주고 있다. 한국 독자들이 가토 슈이치를 어떻게 읽을지, 꼭 알고 싶다.” _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나는 내가 딜레탕트하다고 비춰질 만큼 관심대상이 넓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가토의 시야에는 못 미친다.” -마루야마 마사오, 전 『도쿄대』 명예교수

 

“지식인의 값어치가 이토록 땅에 떨어지고, 지성에 대한 냉소주의가 이다지도 만연한 시절이 없다. 이런 시대에 가토 슈이치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반시대적인 느낌마저 든다.” _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교수

 

“양띠 해에 태어난 저자 스스로가 [양의 노래]라는 제목을 지었다. 이 양(저자)은 그러나 떼를 짓지 않는다. 목동을 그저 무조건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그의 눈은 부드럽지만 예민하고, 곧바로 목동의 진가를 분간한다.” -히구치 요이치, 『도쿄대』 명예교수

 

“사회적, 문학적 행동주의자로서 전후post-war 시대를 이처럼 뛰어나고 우아하게 묘사한 에세이는 영어권에 아직 없다.” _어윈 샤이너, 『버클리대』 일본역사학 교수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세계시민’이란 호칭에 가깝다. 그는 끊임없는 위트와 유머를 깊이 스며들게 하는 지의 발전기다. 가토 슈이치와 같은 사람을 안다는 건 인간 존재의 창조적 가능성과 연애하는 것이다.” _로버트 제이 리프튼, 『뉴욕대』 정신의학자 명예교수

 

“가토가 등장한다. 그 순간부터 전혀 다른 공기가 흐른다. 지성보다 한 단계 상위인 ‘정신의 움직임’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올바름’인지를 꼭 알고자 하는 정신이다.” -미즈무라 미나에, 전 『스탠퍼드대』 교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