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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선잡의 국역총서 1
  • 지은이 | 이언적
  • 옮긴이 | 김윤규
  • 발행일 | 2014년 12월 27일
  • 쪽   수 | 180p
  • 책   값 | 15,000 원
  • 판   형 | 148*210
  • ISBN  | 9788967351731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회재 이언적의 《봉선잡의》 첫 국역!

 

《봉선잡의》를 국역한 『봉선잡의』는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모아 당시 실정에 맞도록 편집한 책으로, 우리 풍속에 가례를 어떻게 적용시켜나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주자가 《가례》를 찬술하면서 송대의 습속을 많이 참조한 것처럼, 회재 또한 주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아 16세기 중반 조선의 풍속과 제도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각 가문마다 혹은 가정마다 자율적으로 제례를 시행할 수 있도록 대체의 제례 절차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후대의 예서가 형식화, 복잡화, 세밀화되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오늘날 각 집안의 상황에 따라 봉사의 대수나 제례의 형식, 제수 음식, 합설 문제 등이 다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봉선잡의》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깊다.
목차

해제_ 회재 이언적과 『봉선잡의奉先雜儀』의 위상

 

『봉선잡의奉先雜儀』 상上
『봉선잡의奉先雜儀』 하下

 

부록_ 원문

미리보기

『봉선잡의』는 회재 이언적(1459~1553) 선생의 저작으로 제례에 관한 책으로서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모아 당시 설정에 맞도록 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 풍속에 기례를 어떻게 적용시켜나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서로서 최초의 구체적인 성과물이다. 주자가 『가례』를 찬술하면서 송대의 습속을 많이 참조한 것처럼, 회재 또한 주자의 가례를 기본으로 삼아 16세기 중반 조선의 풍속과 제도를 많이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3대 봉사를 기술하고 있다든가, 꿇어앉는 자세를 기록한 것이나, 명절의 묘제를 설명한 것 등에서 국제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조건적인 주자 존숭의 자세로 그것을 조선사회에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후대에 나온 조선의예서들이 가례의 편차를 그대로 좇고 절목마다 의미를 부여하여 온전히 따를 것을 주장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봉선잡의』가 사례 중에서도 제례 부분만 다루면서 시속에서 행하지 않느 초조제와 선조제는 제외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렇게 기술된 이유는 가례 전반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기 전이기도 하지만,제례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기 땜분이기도 하며, 실제로 정비되지 않은 제례의 번잡한 격식과 논의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정비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화재의 『봉선잡의』는 제례 시행에서 명목적이고 절차적인 세목에 대해서는 잘게 다루지 않고 제례의 철학적 의미와 참제자의 정신적 태도에 대해 더 많은 서술을 보이게 되었다. 『봉선잡의』는 각 가문마다 혹은 가정마다 자율적으로 제례를 시행할 수 있도록 대체의 제례 절차만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후대의 예서가 형식화, 복잡화, 세밀화 되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오늘날 각 집안의 상황에 따라 봉사의 대수나 제례의 형식, 제수 음식, 합설 문제 등이 다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봉선잡의』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_「해제」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이언적李彦迪

1491년(성종22)~1553년(명종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이다. 초명은 적(迪)이었는데 중종(中宗)의 명으로 언적(彦迪)으로 고쳤다.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을 사사하였다. 1514년(중종9) 문과 별시에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 정랑.사헌부 장령.밀양 부사 등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귀향한 후 경주(慶州)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에 홍문관 교리로 서용되었다. 이후 전주 부윤.대사성.대사헌.홍문관 부제학.한성 판윤.우참찬.이조 판서 등을 거쳐 1542년 좌참찬이 되었다. 1543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임하였다. 1545년(인종1) 다시 출사하여 좌찬성이 되었다. 인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을 맡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추관(推官)에 임명되어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녹훈되고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나 곧 사직하였다. 1547년(명종2)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어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주희(朱熹)의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하여 손중돈(孫仲暾).조한보(曺漢輔) 등과 무극태극 논쟁(無極太極論爭)을 벌였고,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저술로는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종묘에 배향되었고, 1610년(광해군2) 문묘에 종사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옮긴이

김윤규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동대학교 교수로 있으며 미국 Middle Tennessee State University 교환교수를 지냈다. 『개화기 단형서사문학의 이해』 외 10권의 저서가 있으며, 『석주유고』, 『백하일기』, 『동구유고』, 『서산집』 등의 번역에 참여하였고, 『다산 유배문학 산책』 외 4권의 번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