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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왕실문화 기획총서 6
  • 지은이 | 신명호 정은임 지두환 임민혁 한희숙 이민주 김정희 임혜련 이미선 김지영
  • 옮긴이 |
  • 발행일 | 2014년 12월 22일
  • 쪽   수 | 484p
  • 책   값 | 26,000 원
  • 판   형 | 160*220
  • ISBN  | 9788967351663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조선 왕실의 여성들,
그들의 등장은 화려하고 까다로웠으며
그들의 삶은 당당하고도 치열했다

– 왕과 어깨를 겨룰 만한 권력을 누린 여성들
– 베짱이 날개 떼지어 날듯 수많은 왕실 후예를 낳은 여성들
– 바느질 한 땀 한 땀 기우듯 궁궐 구석구석 손길을 미친 궁녀들
– 비극의 한가운데서 왕실 역사를 기록해 문학의 백미를 남긴 여성들
– 한 듯 안 한 듯한 화장과 순결한 피부로 왕실의 미美를 뽐낸 이들

왕은 말하노라. 왕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으로 오래도록 민심이 매여 있고, 비필妃匹은 모든 복의 근원이니, 마땅히 혼례를 삼가서 해야 할 것이다. 길이 차례를 계승할 소중함을 생각하니, 더욱 집안을 바로잡는 방도가 시급하도다. 이미 좋은 짝을 얻었으므로, 드러나게 책립을 반포한다. 아! 그대 어씨는 대체로 아름다운 자질이 일찍 성취되어 이에 착한 행실이 모두 갖추어졌도다. 마침 원량이 바야흐로 아름다운 배필을 구하는데, 뛰어난 미녀를 간택할 것을 생각해 경사卿士 서인과 모의하되, 점의 길하다 함을 따랐도다. 옛날 주나라 문왕이 배로 교량을 만들어 친영한 예를 모방하여 납폐하는 예로 그 상서를 정하였도다. 진실로 뭇 사람의 마음에 맞는데, 어찌 부모에게만 기쁨이 있겠는가? 왕세자를 잘 돕는 것은 바로 모름지기 부부생활에서 시작되므로, 이에 좋은 때를 가려 아름다운 전례를 거행한다. (…) 오로지 근신해야만 자신을 경계할 수 있고, 오로지 검약해야만 풍속을 교화시킬 수 있다. 만기萬機를 대신 다스리는 때를 당하여 음교陰敎에 힘입어 백세토록 본손과 지손이 번성하기를 송축하니, 하늘에서 내리는 복을 영원토록 누리리라. 더욱 보좌하는 덕을 닦아 훈계하는 말을 폐기하지 말라. – 선의왕후 어씨 왕세자빈 책봉 교명문 중에서

 

각 장별로 살펴보는 왕실 여성의 이모저모 

1장은 왕비가 되기 위한 간택과 책봉 절차를 자세히 살핀다. 왕실 혼례는 새로운 왕실 구성원, 즉 왕비, 왕세자빈, 후궁, 부마 등을 들이는 국가 행사였고 국구國舅는 물론 왕실 인척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왕비와 왕세자빈은 양반 사대부 집안의 규수들로서 왕실 일원이 되기 위해 혼례뿐 아니라 책봉 절차를 거쳐 그 지위를 인정받았다. 책봉된 왕비는 국왕과 함께 초월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 장은 특히 왕비의 혼례 의식과 변천 양상이 담긴 [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그 내용과 이미지들을 세세히 들여다본다.
왕실 혼례의 가장 큰 특징은 배우자 간택이다. 이는 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놓고 왕 이하 왕실 어른들이 직접 보고 선발하는 절차였다.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그럼에도 간택 절차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간택은 ‘금혼령’을 선포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왕실 구성원의 혼처를 구하기 위해 사대부가의 10세 안팎 규수들의 혼인을 금하는 명령이었다. 이에 해당되는 사대부 집안에서는 조정에 처자단자를 제출해야 했고 금혼 대상자가 없으면 그 이유를 보고하는 ‘탈보단자’를 제출해야 할 만큼 엄격했다. 이 시기에는 양반은 물론 서민도 결혼할 수 없었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으로 세 번의 심사를 거쳤다. 최종 선택된 처자는 ‘비씨’라 불렀고, 바로 별궁으로 가서 생활했다. 간택 조건으로는 공이 있는 문벌 가문을 일컫는 족성, 여자의 부덕인 여덕, 가례를 신중히 하는 융례, 여러 대신과 의논하여 배필을 선택해야 한다는 박의 등이 있었다. 왕비를 맞아들이는 의식인 ‘납비의’는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연의 육례를 따라 이뤄졌다.

 

2장은 왕실 여성의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왕실에서는 가문을 잇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고, 그런 만큼 여성의 출산 능력은 첫손 꼽히는 조건이었다. 왕실 여성의 출산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은 숙종의 승은후궁 숙빈 최씨가 세 아들을 출산하는 과정을 기록한 [호산청일기]다. 이외에도 왕실 의료 담당 내의원이 작성한 [춘추일기], 출산 지침서인 [산실청총규], 왕실 여성이 출산에 앞서 알아야 할 내용을 적은 고문서 [임산예지법], 산후 의례와 초기 양육을 알 수 있는 고문서 [궁중발기] 등이 있다.
예로부터 조선사회에서 자식을 많이 둔 집안은 흥하는 가문이었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사람은 가장 불쌍하고 비참한 존재로 여겼다. 왕실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를 ‘종사지경 斯之慶’이라 했는데 다산을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말로 베짱이를 가리키는 ‘종사’는 중국 고대인들이 베짱이가 떼지어 날아가는 모습에서 자손의 번성을 상상하며 마음속으로 다산을 기원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왕비 책봉교명과 옥책에도 종사지경을 새겼다. 뿐만 아니라 왕 부부의 신혼방에 [곽분양행락도] [구추봉도]를 걸어 다산에 대한 소망을 나타내기도 했다. [곽분양행락도]의 주인공 곽분양은 당나라 사람으로,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를 두었고 85세까지 장수를 누려 조선 사람들에게 ‘완전히 복을 누린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왕실의 바람과 달리 왕실 여성의 출산력은 인조대 이후 급격히 떨어졌다. [선원계보기략]에 의하면 조선시대 왕실 자녀 수 273명 중 인조 이전 183명에서 이후 90명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초산 연령이 가장 낮은 왕비는 16세에 자녀를 출산한 혜경궁 홍씨이며, 최고의 출산력을 지닌 왕비는 세종비 소헌왕후다. 소헌왕후는 18세에 초산한 뒤 평균 1~2년 터울로 6명의 자녀를 연이어 낳았다. 산후에는 삼일, 초칠일, 삼칠일, 백일, 첫돌 등 특별한 시기마다 행하는 산후 의례를 치렀으며 출산 후 3일째 되는 날에는 산모와 신생아가 처음으로 함께 목욕을 하고 태를 씻었다. 태는 잘 보관해두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길일을 택해 태봉을 정해 좋은 땅에 묻어주었다.

 

3장은 공주·옹주의 혼인과 부마가 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 공주와 옹주는 보통 부마와 동갑이거나 한두 살 차이 났다. 부마를 맞이하는 의식 역시 왕비가 되는 의식과 비슷한 절차를 거쳤다. 공주의 남편감을 찾기 위해 전국에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단자를 제출하도록 했으며 삼간택을 거쳐 최종 한 명을 뽑았다. 한 예로 화순옹주 부마 초간택 시 총 84명이 참가했는데 이를 11명으로 줄이고, 최종 3명으로 추렸다. 부마가 선택되면 본격적인 가례 준비에 돌입했다. 가례청을 배설하고 날짜를 확정하는 등 공주의 혼인을 위해 왕실 안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가례청 배설 이후 가례를 마치기까지는 두 달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가례는 ‘납채-납폐-명복내출-친영’ 순으로 진행됐다. 납채는 신랑 측에서 혼인 의사를 담은 채서를 보내면 신부 측에서 답서를 전달하는 절차다. 납폐는 신랑 측에서 신부 측으로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예물은 혼인이 정식으로 성사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물이다. 명복내출은 부마 집에 명복命服을 보내는 의식이다. 친영은 부마가 옹주궁으로 가서 전안례를 행하고 옹주를 친히 맞이해 부마가로 데려오는 의례다. 이로써 공주의 의례는 마무리된다. 왕실의 부마가 된 가문은 또 다른 왕실 세력이 되어 협력했다. 특히 부마는 외교 사신 임무를 수행하며 문물을 들여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왕의 혼례를 비롯해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고 이에 참여했다. 또한 부마 중에는 특히 시서화에 능한 인물이 많았다. 부마가 재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공주가 혼인하지 못하고 그전에 졸했을 경우 그랬다.

 

4장은 궁궐 구석구석에 자신들의 손길을 끼쳤던 궁녀들의 이야기다. 궁녀는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자들로 나인, 여관, 궁인, 시녀 등으로 불렸다. 평생을 궁궐에서 생활했던 궁녀는 왕과 왕비를 비롯한 모든 왕실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많은 일을 뒷받침했다. 의식주뿐 아니라 각종 의례까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궁녀는 어떻게 선발되었을까? 왕, 왕비, 후궁, 대비, 세자, 세자빈 등은 각자 궁녀를 거느렸다. 이들은 궁녀가 필요할 때 환관에게 알려 승정원, 형조를 통해 궁녀를 입궁시켰다. 그러나 차출 외에도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뽑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궁녀는 주로 세습되었다. 나이는 10여 세부터 70~80세까지 다양했다. 빠르면 4~6세에 입궁하기도 했다. 입궁 나이가 어린 이유로는 당시의 평균 혼인 연령인 15세가 되기 전에 데려와야 했기 때문도 있고, 일의 전문성을 위해서도 그랬다. 많은 경우 경제적인 이유로 입궁했다. 궁궐은 특수한 공간이기에 결혼을 할 수 없었고, 어린 나이부터 가르치고 길들여야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궁녀들은 궁에 들어와 업무 교육은 물론 기본적인 학문과 예절도 익혔다. 궁녀들의 보수는 월급제로 의전(옷값), 선반(밥), 삭료(봉급) 등 세 가지가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시대 궁녀들의 ‘성性’이다. 궁녀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생활이 금지되었다. 그들에게 남녀의 사랑이 허용되는 때는 왕이나 왕세자의 손길이 닿을 때뿐이었다. 이른바 ‘승은’을 입는다고 하는데, 이는 곧 신분 상승을 의미했다. 승은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는데, 궁녀 출신으로는 드물게 왕의 어머니까지 된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 같은 인물도 있었다. 궁궐에서는 “궁녀가 간통하면 즉시 참수하라”며 궁녀의 성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오직 왕의 여자로 취급했다. 그럼에도 남자들과의 연애사건을 막을 순 없었는데, 이에 얽힌 여성들은 결국 모반대역죄의 혐의를 입고 처벌을 받았다. 궁녀와 사랑을 나누려면 궁녀뿐 아니라 남자 쪽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니 궁녀들 사이에서는 종종 동성애가 일어나기도 했다.

 

5장은 수렴청정의 빛과 그늘을 밝힌다. 수렴청정은 정치 운영 방식으로서 갖춰진 범위 내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는 어린 왕을 앞에 두고 나이 많고 표독스러운 대비가 앉아서 명령을 내리고 권력을 휘두르는 장면이다. 이는 왕을 대신해 정치를 하는 섭정과 수렴청정을 구분하지 않아서 생긴 오해다. 수렴청정을 행한 나이는 왕대별로 달랐는데, 최초의 수렴청정은 13세로 즉위한 성종대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세가 되자 8년간의 수렴청정에서 물러났다. 이후 조선사에서 수렴청정은 지속되었다.
수렴청정은 왕과 함께 발을 드리우고 정치를 한다는 뜻으로, 나이가 어린 왕을 위해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가 함께 정치에 참여해 국왕이 스스로 정치할 수 기반을 마련해주는 정치제도였다. 왕이 충분히 통치능력을 갖춘다고 판단되면 철렴, 즉 발을 거두고 정치에서 빠졌다. 어린 왕이라고 무조건 대왕대비가 정치를 한 것은 아니고 모든 것은 규정에 따랐으며 대비는 정해진 권한만을 행사했다. 이에 관련된 의례와 규정이 ‘수렴청정절목’으로 법제화되기도 했다. 물론 수렴청정으로 인한 그늘도 있었다. 대왕대비의 권위를 바탕으로 외척들의 정계 진출이 두드러진 것이다. 문정왕후 때 윤원형을 대표로 하는 소윤이 집권하며 각종 폐단을 낳았고, 정순왕후 때는 경주 김문 외척들의 진출이 두드러지기도 했다. 여성인 데다가 정치 경험도 없던 대왕대비들은 외척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것이 수렴청정의 한계였다.

 

6장은 왕실 여성의 재산과 경제생활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시대에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은 국왕, 대비와 더불어 진상의 대상이었다. 반면 후궁, 왕자, 왕녀는 공상 대상이었다. 이는 궁중에서 생활하는 왕실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공식 제도로서 이들의 경제생활은 이를 기반으로 영위되었다. 한편 왕실 여성들은 따로 본궁을 두어 재산을 관리했다. 본궁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의미로 쓰였는데, 대체로 왕비나 대비가 사사로운 재산을 비축하는 건물과 창고라는 뜻이었고 좀더 포괄적으로는 본궁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근무 장소도 되었다.
이렇듯 조선 전기 대비나 왕비의 본궁에는 노비, 토지, 곡식 등의 사유재산인 사장이 있었다. 단종 왕비 정순왕후 송씨인 노산군부인이 남긴 재산의 규모와 경로는 알 수 없지만 추론해보자면 친정에서 받은 것이거나 왕실에서 별사別賜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요약하면 내수사 정리와 더불어 왕실로부터 별사된 노비, 친정으로부터 분급된 노비나 토지 등이 조선 전기 대비, 왕비의 본궁 사장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각종 수용에 충당되던 수입원이 바로 이 같은 본궁 사장에서 확보된 연간 수입이었다.

 

7장은 왕실 여성과 불교의 관계를 다룬다. 불교는 조선시대에 민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으며 그 명맥이 뿌리 깊게 이어져왔다. 그 배경에는 특히 왕비, 후궁, 상궁 등 왕실 여성을 중심으로 한 불교 신앙과 후원이 있었다. 조선 전기 왕실 여성의 신행처가 되었던 곳은 정업원·자수궁·인수궁 같은 니원들이었다. 니원은 국가의 공식적인 불당의 성격을 띠었던 내불당과 함께 조선 왕실의 불교를 이끌어갔다.
또한 왕실 여성들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주로 불사를 행했다. 그 과정에서 발원한 유물이 전해지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청곡사은입사향완], 태종 후궁인 의빈 권씨와 그의 아버지, 태종의 딸 정혜옹주가 함께 시주 발원한 [금강암 석조미륵불좌상] 등이 있다. 의빈 권씨는 태종이 사망하자 비구니가 되어 밤낮으로 불경을 외우며 선왕의 명복을 빌었다. 또한 15세기 것으로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환성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등 왕실 여성 발원 불상이 여러 점 남아 있다. 불상 외에 적극적인 발원이 이루어진 분야는 불화다. 조선 전기 불화 130여 점 가운데 왕실 여성 발원 작품은 20여 점에 달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불화는 문정왕후에 의해 조성된 불화인데,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561년 명종의 건강을 기원하며 제작한 [약사불회도]다. 약사여래와 일광보살, 월광보살 및 약사12신장 등 권속들을 함께 그린 것으로 화려하면서도 값비싼 금을 사용해 왕실 발원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렇듯 조선 왕실 여성들은 개인으로 때로는 든든한 왕실 후원 아래 당대 최고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뛰어난 불교 미술품을 발원, 조성했다. 그 결과 뛰어나고 세련된 궁중 양식을 이뤄냈으며 이는 조선 불교미술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으니 왕실 여성들의 역할은 높게 평가받을 만하다.

 

8장은 최고의 스타일을 자랑하던 왕실 여성들의 복식과 미용을 다룬다. 왕실 여성들은 언제나 최고의 스타일을 선도했고, 모든 여성이 이를 따라하고 싶어했다. 왕실 여성들은 주로 한 듯 안 한 듯한 화장을 선호했다. 따라서 백옥 같은 피부를 갖길 원했으며 세수에서 화장, 머리 손질까지 하나하나 신경썼다. 팥이나 쌀겨로 비누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 박, 수세미, 오이 등의 재료로 미안수를 만들어 썼다. 화장을 하는 과정은 오늘날과 비슷했다. 나무로 만든 경대, 즉 화장대가 있었고 깨끗한 피부를 위해 분화장을 했다. 볼과 입술을 붉은색으로 치장할 때 연지를 발랐으며 눈썹을 곱게 그렸다.
얼굴 화장과 더불어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는지의 여부가 미인의 조건이었다. 월소, 진소 등 사용하는 빗의 종류도 다양했으며, 빗의 때를 제거하는 빗솔, 가르마 타는 데 쓰이는 빗치개 등도 있었다. 또한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한 다음 마무리 단계에서 머리에 기름을 발라 정리했다. 또한 가발인 체발을 넣어 머리를 풍성하게 했으며 머리를 길게 땋아 댕기를 두른 머리인 첩지머리, 조짐머리 등으로 치장했다. 패션은 곱고 화려했고 소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왕비 최고의 예복은 적의였다. 적의를 입을 때 하의로는 남색 대스란치마와 전행웃치마를 입었고, 상의로는 중단을 입고 적의를 입은 뒤 후수, 하피, 옥대, 패옥을 하고 옥곡규를 들며 청말과 청석을 신었다. 머리에는 수식을 썼다.

 

9장은 [한중록]을 통해 왕실 여성의 문학을 살펴본다. 궁중문학은 왕과 그 가족, 궁에 살았던 내시와 궁녀들의 삶이 투영된 작품이다. 궁중문학이라는 용어는 오직 산문에서만 쓰이고, 그중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한중록]만이 궁중문학으로 굳어졌다. 세 작품이 모두 조선조 궁정에서 일어난 작품이고, 궁중 비사와 비화를 묘사하기 때문에, 서민의 생활과 동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가 남긴 비운의 기록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창작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이다. 혜경궁 홍씨는 주인공 사도세자의 빈으로 61세에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해 71세까지 10년에 걸쳐 자신의 한 많은 인생을 돌아보며 네 편을 집필했다. 작품은 작자 나이 아홉 살에 동궁 빈으로 간택되는 데서 시작해 여든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궁궐에서 직접 겪은 일을 묘사하고 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병과 그의 죽음에 대해 상세히 밝힌다. 이렇듯 자신이 직접 겪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간결하고 뛰어난 필력으로 써내려간 [한중록]은 궁중문학의 백미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10장은 조선 왕비와 후궁의 상장례에 대한 이야기다. 상장례는 흉례 중 하나로 상례와 장례를 합친 말이다. 상례는 3년의 복상 기간 중 행하는 모든 의례를 뜻하고, 장례는 그중에서 특히 시신을 땅에 묻어 무덤을 조성하는 일체의 의례를 일컫는다. 조선에서는 유교식으로 상장례가 엄격하게 치러졌는데, 그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가 왕과 왕비의 상장례였다. 왕비의 공덕과 권위는 사후에도 계속되어 후손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왕비의 상장례에 대한 모든 의절은 [국조오례의]에 수록되어 있다.
국상이 나면 국가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긴급 조치를 발령했다. 국장은 규모가 크고 장기간에 걸쳐 행해졌으므로 전담 부서를 설치했다. 왕비의 죽음이 확인되면 먼저 대행왕비를 깨끗이 씻겨 고운 속옷으로 갈아입히고(목욕과 습), 시신에게 옷을 입히는 소렴을 행했다. 3일째 되는 날 소렴하고, 5일에 대렴(시신을 이불로 싸서 재궁에 안치하는 의절)을 거행했다. 왕세자 이하 내외친들은 슬픔을 드러내고자 왕비가 죽으면 복식을 바꾸고 3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왕비와 국왕의 국장상은 왕비의 경우 내상이 먼저 있는 경우 자최 기년복을 입지만, 국왕은 누구라도 참최 3년복을 입는 등 의물에서 약간의 차등이 있었다. 이렇듯 거하게 치러진 왕비의 상장례는 생전이 권위를 유지시켜나가는 절차였다. 국가 흉례는 대종자의 지위를 계승한 사왕의 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사후 국왕과 왕후에게는 생전의 권리를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목차

서장 왕실 여성이라는 존재_신명호

 

제1장 조선의 국모가 되는 가장 까다롭고도 화려한 행사: 왕비의 간택과 책봉_이미선

제2장 베짱이 날개 떼지어 날듯 다산을 바라다: 왕실 여성의 임신, 출산, 육아 이야기_김지영

제3장 의식의 극치를 구현한 혼인, 그리고 부마의 역할: 공주·옹주의 혼인과 부마_지두환

제4장 궁궐 구석구석에 미친 하나하나의 손길: 궁녀의 생활_한희숙

제5장 발을 드리우고 행한 왕실 최고 어른의 정치적 힘: 수렴청정의 빛과 그늘_임혜련

제6장 별궁을 두어 전토, 노비, 곡식을 소유하다: 왕실 여성의 재산과 경제생활_신명호

제7장 왕실 여성들, 불교미술을 꽃피우다: 왕실 여성과 불교_김정희

제8장 법도 속에도 스타일은 살아 있다: 왕실 여성의 복식과 미용_이민주

제9장 비극이 꽃피워낸 궁중문학, 치밀하고 세세한 기록을 담다:〈한중록〉으로 살펴본 왕실 여성의 문학_정은임

제10장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 무덤과 신주로 생전의 권위를 지키다: 조선 왕비·후궁의 상장례_임민혁

 

주註
참고문헌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신명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조선왕비실록>(역사의 아침, 2007),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역사의 아침, 2014), <조선왕조 스캔들>(생각정거장, 2016), <조선시대 해양정책과 부산의 해양문화>(한국학술정보, 2018) 등이 있다.

 

정은임

강남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 『인현왕후전 연구』 『한중록 연구』 『인목왕후와 인현왕후』 등이 있다.

 

지두환

1978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마치고, 1990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2년까지 ‘태동고전연구소’의 한학연수 장학생으로 4년 간 한학을 연수하였다. 부산대학교 사학과(1981~1993) 교수를 거쳐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1994~2016 현재)에 재직하고 있다.

 

임민혁

문학 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가례』를 번역해 출간하고, 관료제에 눈을 돌렸다가 미지의 무엇에 홀린 듯 다시 의례 분야를 기웃거렸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장서각에서 의궤를 탐독할 수 있는 연구 사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지금도 의례 관련 등록들을 1차 가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예禮의 정치적 성격에 주안을 두고 조선시대 왕실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제대로 깊이 있게 그리는 작업에 몰두해왔다. 이번의 국왕 혼례를 비롯해 종묘와 신주, 국왕의 상장례인 국장, 예의 기초인 용례와 위의威儀, 왕자녀들의 삶과 문화 등 다양한 예 관련 주제를 섭렵하여 대중에게 역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일 예정이다.

저서로는 『조선의 예치와 왕권』 『영조의 정치와 예』 『영조어제 해제 2』 『왕의 이름, 묘호』 『조선시대 음관 연구』 등이 있고 공저로는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영조어제 해제 10』 『조선의 왕·왕비·왕세자로 살아가기』 『대한제국』 『조선 왕실의 가례 1·2』 등이 있다. 역주서로는 『주자가례에서 통치이념을 배우다』 『주자가례』 『추봉책봉의궤』 등이 있다.

 

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문과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숙명여자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사회사와 여성사를 연구하고 있다. 여성사 관련 저서와 논문 외에 조선시대 사회사, 인물사 관련 논문이 다수 있다.

여성사 관련 저서
2010, 『조선여성의 일생』, 글항아리(공저).
2012, 『의녀-팔방미인 조선 여의사』, 문학동네.
2014,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글항아리(공저).

여성사 관련 논문
1994, 「양반사회와 여성의 지위」, 『한국사 시민강좌』 15, 일조각.
2005, 「조선 초기 소혜왕후의 생애와 『내훈』」, 『한국사상과 문화』 27.
2005, 「조선 초기 성종비 윤씨 폐비 폐출 논의 과정」, 『한국인물사연구』 4.
2006, 「조선 초기 성종비 폐비 윤씨 사사 사건」, 『한국인물사연구』 6.
2006,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45-2.
2007, 「중종비 폐비 신씨의 처지와 복위논의」, 『한국인물사연구』 7.
2007, 「조선 전기 봉보부인의 역할과 지위」,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한국사 속의 섭정을 통해 본 어머니 리더십」, 『숙명리더십연구』 6.
2008, 「연산군대 폐비 윤씨 추봉존숭 과정과 갑자사화」, 『한국인물사연구』 10.
2008, 「조선후기 양반여성의 생활과 여성리더십-17세기 행장을 중심으로-」, 『여성과 역사』 9.
2010, 「조선 태조ㆍ세종대 세자빈 폐출 사건의 의미-현빈 유씨, 휘빈 김씨, 순빈 봉씨를 중심으로-」, 『한국인물사연구』 14.
2012, 「조선 성종 8년 친잠례의 시행과 그 의미」, 『아시아여성연구』 51-1.
2013, 「소혜왕후, 최초의 여성 저술가」, 『 『도서관』 387, 국립중앙도서관.
2015, 「조선 초기 대군들의 이혼사례와 처의 지위」, 『여성과 역사』 22.
2017, 「조선 초 명 선덕제 후궁 공신부인 한씨가 조선에 끼친 영향」, 『여성과 역사』26

 

이민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의상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왕실문헌연구실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한국학중앙연구원, 2013), <치마저고리의 욕망>(문학동네, 2013),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한국학중앙연구원, 2016)가 있으며, 논문은 「충청도 지역 17세기 사대부의 의례별 복식연구-조극선의 <인재일록>을 중심으로」(서강인문논총, 2018), 「장서각소장 왕실발기로 보는 순종 가례복식연구」(고문서연구, 2016) 등이 있다.

 

김정희

서울에서 출생하여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명부전 도상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원광대학교 인문대학 고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국사편찬위원, 서울특별시 문화재 위원 및 서울역사편찬원 위원, 전라북도 문화재위원, 대전광역시 문화재위원, 인천광역시 문
화재위원, 한국미술사연구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공저, 2014), 『찬란한 불교미
술의 세계, 불화』(2009),『극락을 꿈꾸다』(2008), 『조선시대 지장시왕도 연구』
(1996), 『 조선조불화의 연구 2-지옥계 불화』(공저, 1993), 『신장상』(1989) 등이 있으며, 한국의 불교회화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임혜련

조선 시대 정치사·왕실 여성사 전공. 숙명여자대학교, 충남대학교 등 출강.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남대학교에서 박사후 연수과정을 마쳤으며, 한국역사연구회·조선시대사학회 등에서 활동 중이다.

논문으로는 『19세기 신정 왕후 조씨의 생애와 수렴청정』 『19세기 수렴청정 연구』 『조선 숙종비 인원 왕후의 가례와 정치적 역할』 『19세기 수렴청정의 특징-제도적 측면을 중심으로』 이외에 다수가 있다.

 

이미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졸업, 조선시대사 전공. 주요 논저는 「조선시대 後宮 연구」(2012), 『조선 인물 이렇게 본다』(공저, 2016),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여성』(공저, 2014), 역서로는 『1756년의 북경이야기』(공역, 2016), 『1623년의 북경 외교』(공역, 2014) 등이 있다.

 

김지영

조선시대 국가의례 전공.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의 국가의례, 예교론과 조선문화의 상관성을 규명하는 연구를 중심으로 유교적 윤리와 국가 정체성으로까지 연구 외연을 확장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길 위의 조정-조선시대 국왕행차와 정치적 문화』,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공저), 『즉위식, 국왕의 탄생』(공저), 『왕실의 천지제사』(공저) 등이 있다.

 

엮은이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궁궐 유물들을 전문적으로 수집, 전시하는 문화재청 소속 박물관이다. 서울 경복궁 경내 동쪽에 있으며 국가적 의례와 궁중의 실생활을 보여주는 유물 4만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소재구 초대 관장이 2005년 8월에, 정종수 2대 관장이 2009년 2월에 임명되었다. 관장 산하에 기획운영과, 전시홍보과, 유물과학과가 있다. 이 가운데 유물과학과는 오래 된 유물들에 대한 보존, 복원, 복제를 맡고 있으며, 수장고를 관리하고, 왕실문화 정보들을 도록과 연구서로 발간하거나 데이터 베이스로 구축하는 일을 한다. 2012년 현재 규모는 지상 2층, 지하 1층, 총 관리연면적 1만739㎡. 주요 시설로는 전시실 15개실 7073㎡, 수장고 15개실 4102㎡, 보존과학실 1개실 349㎡이다.지하1층에는 궁중회화실, 궁중음악실, 어가의장실, 자격루실이 있다. 지상 1층에는 탄생교육실, 왕실문예실, 대학제국실이 있으며, 지상 2층에는 제왕기록실, 국가의례실, 궁궐건축실, 과학문화실, 왕실생활실이 있다. 이들 12개 실에 950점의 왕실 유물이 상설전시되며 매년 특별전시가 몇 차례씩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