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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의 학 읽기의 무한에 관한 탐구
  • 지은이 | 요시카와 고지로
  • 옮긴이 | 조영렬
  • 발행일 | 2014년 04월 28일
  • 쪽   수 | 412p
  • 책   값 | 18,000 원
  • 판   형 | 140*224
  • ISBN  | 9788967351076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어떻게 읽느냐는, 그 자체로 하나의 학문이다
세계가 인정한 한학자 요시카와 고지로, 근대가 잃어버린 독서법의 복권을 주장하다

– ‘사실’과 ‘언어’를 매개하는 ‘저자’를 읽음으로써, 독서는 무한해진다
– 흐르는 물을 보며 공자가 남긴 한마디에서 2천 년간 선인들은 무엇을 읽어냈는가?
– [구당서]를 종본으로 쓴[신당서]에서 이루어진 문장의 변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사마천 [사기]의 ‘심절저명’한 언어는 기술된 역사적 사실에 무엇을 더해주는가?
– 자타공인의 고문사古文辭체 명인 오규 소라이를 비롯, 근대 일본 한학자들의 독법을 비교·검증
– 고금의 주석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명철한 직관으로 ‘텍스트 읽기’의 무한을 열다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일본 한학서 번역 출판의 신기원을 연 세계적인 한학자로, 현대 일본의 중국학을 주도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 ‘명석한 언어 쓰기’를 목표로 끊임없이 읽고 썼다. 그로써 잘 쓴 언어는 음절이나 형태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사실을 배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스스로 그것을 증명해보였다. 모든 언어는 지시하고자 하는 ‘사실’에 기반해 쓰인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를 기록한 ‘저자’라는 사실, 그가 선택한 언어 그 자체가 갖는 사실이 한편에 존재한다. 저자와 언어가 갖는 이 무형의 ‘사실’은 언어의 내부로 무한히 펼쳐져 있다.

도대체 ‘독서의 학學’이란 무엇인가? 요시카와 고지로는 텍스트에 ‘천착’하여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다른 차원을 드러낸다. ‘천착’이라는 말은 우선 “깊이 살펴 연구한다”는 뜻이지만, 한학 전통에서 천착이란 마치 ‘구멍이 없는 곳에 억지로 구멍을 내듯 탐구하는 것’, 대체로 ‘그래야 할까 싶은 것까지 굳이 파고들어 건드린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실제로 이 책에서 요시카와 고지로는 “아이쿠 난 이제 죽었다阿與, 我死也”라는 [구당서] 안록산의 대사 하나, “서자여사부逝者如斯夫, 불사주야不舍晝夜”라는 공자의 표현 한 줄, 사마천 [사기] [고조본기]의 첫 문장 단 스무 자를 놓고 무섭도록 ‘천착’하는 독법을 실행해 보이고 있다.
[고조본기]를 읽는 독자는 ‘고조의 생김새’ ‘출신 성분’ ‘업적’ 같은 역사적 사실만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 사마천의 심리, 자신이 봉사한 한漢 왕조에 품고 있던 존경과 혐오가 뒤섞인 모순·상반된 심리를 읽게 된다. 사마천이 사용한 언어의 흐름, 표현의 취사를 통해 독자는 역사로서의 ‘사실’ 외에도 언어 자체에 들어있는 ‘사실’을 읽게 되는 것이다. [구당서] [신당서]도 마찬가지다. [구당서]를 전본으로 삼아 쓰인 새로운 당唐제국의 역사인 [신당서]에는 [구당서]와 비교하면 명백히 의도적인 문체의 수정이 존재한다. 이것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효과는 또 무엇인가?
이렇게 책에서 펼쳐지는 요시카와 고지로의 독법을 따라가자면 ‘읽기의 무한’이라는 표현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독자는 언제나 텍스트에서 한눈에 얻을 수 있는 ‘사실’ 이상을 읽어낼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독법이 동양 전통에 오랫동안 유효했던 학문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곧 언어가 전하는 ‘객관적 사실’을 넘어 ‘언어 자체가 갖는 사실’을 읽어가는 방식이다. 언어는 이러한 독법을 통해 중량을 더하고 무한으로 나아간다. 이 책에서 요시카와는 주注?해석?고증이 발달한 문화 속에서 선진 학자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읽기 방식을 통해 텍스트가 전하는 사실 이상을, 다시 또 그 이상을 읽어낸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이러한 독법을 잃어버렸다. 근대 이후의 ‘역사학’을 중심으로 한 현대의 학문은 사실을 취하면 언어를 버리는 데 더 익숙하며, 정보가 입력되면 바로 다른 정보를 찾기 바쁘다. 이에 저자는 말한다.

나는 다른 방법에 의한 학문에 대한 존경을 몰각沒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추구한 방법의 존재가치를 주장하고 싶었다. 저자가 전달하는 사실이 중요한 동시에, 사실을 전달하는 저자 자신도 중요하지 않을까. 학문이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연구라 한다면, 역사학만을 방법으로 삼는 것은 방법으로서 충분한 것일까. 개인의 바깥에 펼쳐지는 것이 무한함과 동시에, 개인의 내부에 펼쳐지는 것도 무한할 터이다. 학문은 바깥에 펼쳐진 무한을 추구하는 데만 너무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 자체의 사실과 더불어 텍스트를 읽는 것, 이것이 요시카와 고지로의 ‘독서의 학’이다.

 

사실과 언어의 관계

서부진언書不盡言, 언부진의言不盡意.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말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이 표현은 말의 유한성, 근본적인 ‘언어불신’을 드러내는 듯 보인다.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즉 ‘글말’은 ‘입말’을 다 담을 수 없다. “말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글말이든 입말이든, 언어 자체는 기본적으로 뜻하는 바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주역]에 관한 수많은 주석서가 존재하는 만큼 [계사전]의 이 표현에 대해서도 여러 주석가의 해석이 다양하다. 그 가운데 많은 학자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이 두 구절이 ‘서書’ 즉 책의 문장으로서의 표현, ‘언言’ 즉 단순한 언어표현, ‘의意’ 즉 내적 사실, 이 삼자를 분리해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서’는 ‘언’에, ‘언’은 ‘의’에 불충분하게밖에는 합치되지 못한다. 이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거리阻隔’가 존재한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표현하고자 기술된다. 이는 말이든 글이든 마찬가지다. 즉 먼저 언어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외적 사실이 존재하고, 그에 감感한 누군가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런데 표현하려고 쓰인 이 언어가 말이냐 글이냐에 따라 이들 사이에 ‘거리’가 발생하고, 이것은 다시 화자(필자)의 표현 의도意와 괴리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어의 운명이 이와 같다면, 언어를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언어와 부딪힌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언어를 접하여 그가 전하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면 우리는 언어 자체를 잊는다. 예컨대 뉴스 기사를 읽고 보도된 정보를 받아들이면, 그 사실을 전한 언어 자체가 어떠한 표현이었는지는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인식 습관이다. ‘사실’을 전달받고 나면 그것을 전달한 ‘저자’의 언어는 잊히고, 이제 사실은 ‘수신자’ 자신의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을 거쳐 수신자의 기억 속에 간직된다.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는 이 지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을 전달한 ‘저자’의 언어가, 이런 식으로 그냥 잊혀버려도 좋은 것인가, 특히 학문의 방법으로서는, 과연 이것으로 충분한 것인가 하고.

“서부진언, 언부진의”라는 [주역]의 두 구가 말하듯 글과 말과 저자의 진의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저자’의 언어 자체를 파고들어 그 ‘진의’를 따져 묻는 읽기를 함으로써 언어 표면에 미처 다 드러나지 못한 뜻을 파악해내야 하지 않을까. 사실을 전달하는 언어에는 전하고자 한 외부의 ‘사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언어라는 형태로 구성한 ‘저자’가 갖는 사실 또한 존재한다. 이것이 모든 언어에 숙명적으로 배어 있는 ‘인간의 사실’이다. “서부진언, 언부진의”가 말하듯 언어는 그 자체로는 불완전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언어 이면에 있는 이 ‘인간의 사실’을 읽어낼 때, 어떤 언어는 불완전함을 넘어 무한한 해석을 제공하며 독자를 다채로운 지평으로 인도한다.
즉 요시카와 고지로가 요청하는 것은 외적 ‘사실’을 전하는 불완전한 도구로만 언어를 대하는 독법에 대한 반성이다. 그러한 반성 아래 책을 읽을 때, 거기서 하나의 학문이 성립된다. 이는 곧 ‘언어’와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을 생각하는 학문이기도 하다.

 

저자를 읽는다는 것

그렇다면 ‘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시카와 고지로는 책의 언어는 반드시 사실을 전달한다는 것, 사실이 없는 곳에 언어는 없으며 언어의 음성 역시 반드시 어떤 사실과 관련된 음성이라는 것을 반복해 강조한다. 때문에 책을 읽을 때 독자에게 우선 밀려오는 것은 그 언어가 가리키는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언어를 통해 이 ‘사실’을 전달하는 주체는 저자, 혹은 화자다. 저자 내지 화자가 어떠한 형태의 언어를 통해, 어떠한 태도를 바탕에 두고 사실을 전달하려 하고 있는가를 추구하는 작업을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고조위인高祖爲人, 융준(졸)이용안隆準而龍顔, 미수염美須?, 좌고유칠십이흑자左股有七十二黑子.
(고조의 사람됨은, 융준[졸]하여 용안이었고, 수염이 아름다웠다. 왼쪽 발에 일흔두 개의 흑자가 있었다.)

이는 사마천 [사기] [고조본기] 도입부다. “고조의 사람됨은” 뒤의 16자는 말할 것도 없이 고조의 외모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언어다. 그러나 이 짧은 묘사에 대해서도 여러 주석가의 상세하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먼저 ‘융준(졸)隆準’은 융준과 융졸,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우뚝한 콧날’ 또는 ‘툭 불거진 광대뼈’가 되기도 한다. 본문에서 요시카와는 우선 동시대 다른 문헌에서 두 글자의 용례와 해석의 전례를 찾아가며 콧날이냐 광대뼈냐에 천착했던 학자들의 주석을 두루 소개한 뒤 곧 이 언어의 다른 측면을 조명한다.

gaozu wei ren langzhuner long yan mei xu ran zuogu you qi shi er hei zi
高祖爲人隆準而龍顔美須?左股有七十二黑子.
(까오 쭈 웨이 런/ 룽 준 얼 룽 옌/ 메이 쉬 란/ 쭤 구 유 치 스 얼 헤이 쯔)

[고조본기]의 이 스무 자는 이와 같은 음성의 흐름으로 읽힌다. ‘隆準’이 ‘우뚝한 콧날이냐 툭 불거진 광대뼈냐’, 이러한 설명은 이제 제쳐두어도 좋다. 언어는 반드시 음성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흐름이므로 그 안에 높낮이와 기복이 있다. 따라서 반드시 리듬을 만든다. 그리고 이 리듬에, 이 언어의 저자가 갖고 있는 ‘저자의 인상’이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언어가 지니는 일종의 리듬은, 화자의 의도와 생각을 유력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때로 이것이 언어가 지시하는 ‘사실’ 자체보다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콧날인지 광대뼈인지, 용과 같은 면상인지 이마인지를 고증하는 수많은 주석은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탐구하는 한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고조본기]의 저 구절에 그러한 진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언어에 익숙한 독자는 주루룩 나열된 글씨를 읽을 때 뇌리에 그 음성의 흐름을 함께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는 이 문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조되는 l?ng(룽) + 허세를 부리는 zh?hn(준) + 아무런 색상도 없는 ?r(얼) + 기분 나쁜 l?ng(룽) + 펑퍼짐한 y?n(옌). ‘隆準而龍顔’이라는 언어를 읽는 독자는 그 음성의 울림에서 기괴하고 편치 않은 분위기를 먼저 느끼게 된다. 즉 사마천이 묘사하고자 한 것이 콧날이냐 광대뼈이냐 하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사마천은 ‘고조의 범상치 않은 인상’이라는 외적 사실을 전달하려고 이러한 언어를 사용했다. 언어에서 ‘저자의 사실’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 읽기’를 하여 [고조본기]를 읽으면, 고조의 출신을 설명하는 사마천의 언어에서도 좀더 많은 것을 읽을 수 있다.

고조高祖, 패풍읍중양리인沛?邑中陽里人, 성유씨姓劉氏, 자계字季, 부왈태공父曰太公, 모왈유온母曰劉.
(고조는 패의 풍읍 중양리 사람. 성은 유씨, 자는 계. 부친을 태공이라 하고, 모친을 유온이라 한다.)

인물의 전기를 출신지부터 기술하는 것은 세가 및 열전의 다른 인물들과 같다. 의아한 것은 뒷부분의 여덟 자, “부왈태공, 모왈유온”이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버지는 그저 ‘태공’ 즉 ‘할아버지’, 모친은 ‘유온’ 즉 ‘유씨 할머니’. 즉 제국의 건설자인 한 고조가 만족스럽게 내세울 이름도 없는 가족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독자에게 어딘지 모를 찝찝함을 남기는 것은 반복되는 ‘왈曰’이다. 이 ‘왈’은 본디 간결함을 추구하는 중국 전통의 문어체에서라면 생략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부태공, 모유온”이라고 해도 “부친은 태공, 모친은 유온”이라는 의미의 전달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여기서 굳이 ‘왈’을 반복하여 부친의 이름은 뭐라 ‘했는가’, 그저 태공(아저씨)‘이라 했다.’ 모친의 이름은 뭐라 ‘했는가’, 유온(유씨 아주머니)‘이라 했다.’ 이처럼 심술궂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사기]를 전본으로 후한대에 작성된 반고의 [한서]에서는 ‘왈’자를 삭제하여 “부태공, 모유온”이라 쓰고 있다.

이렇게 [사기]와 [한서]는 물론이고 [한서주석] 및 관련 언급들을 두루 검토해나가면서 요시카와가 읽어내는 것은 문장 뒤에 숨은 저자의 심리, 분위기, 그 진의眞意다. 이는 다른 텍스트, 이를테면 [만엽집]에 실린 히토마로의 노래나 [논어]에 실린 공자의 탄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언어의 형태와 음성, 그에 깃든 저자의 심리를 읽어냄으로써 ‘언어’에 천착하는 독법을 통해 언어는 ‘진의’와의 괴리를 메워나간다.

 

‘언어의 무한’ 읽기, 가장 보편적인 독법

요시카와 고지로는 한학자다. 청조 고증학자들의 연구 방식에 깊이 감명하여 그 방법을 몸에 익히고자 노력했다. 이는 고전의 언어에 대해 표층적으로 의미를 고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배후에 깔린 심리까지 깊게 분석하는 정치한 학풍으로서, 요시카와 고지로가 이 책에서 박학과 위엄을 갖추고 실천해보이고 있는 ‘독서의 학’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그의 학문 근원은 어쩌면 ‘고리타분’한 것,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유가의 경전을 외듯이 읽어서 원본의 몇십 배 분량이 되는 주석을 쓰고, 다시 그것을 놓고 끊임없이 토론하는 문화는 우리가 사는 현대와는 아무래도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요시카와 고지로가 ‘잃어버린 독법’이라 주장하며 복권을 요청하는 그의 독서 방식은 한학의 전통에 한정된 것도, 지나가버린 옛날의 것도 아니다. 우선 언어 자체에 천착해 표면의 의미 이상을 읽어내는 독서법은 다른 문화권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랍비들은 그들의 경전 일자 일구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함으로써, 그 해석을 현대까지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의미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할 수 있는 책’을 가리켜 유대교 전통에서는 “서책 중의 서책”이라 부른다. 이는 현재진행형의 전통이다.

동시에 요시카와 고지로의 독서의 학은 경전 및 고전에 한정해,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서만 유효할 수 있는 그런 방식도 아니다. “언명의 ‘의미할 수 있는 것’은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있다”라는 현대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은 언어 일반에 존재하는 ‘의미의 과잉’을 의식하고 있다. 즉 언어는 표면적으로 의미하는 ‘사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 이 ‘의미의 과잉’은 텍스트의 구체성과 물질성에 존재하는 무엇이며, 이것은 독자의 구체성과 맞물려 “텍스트에 봉인된 의미”를 해방시킨다.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봉인된 사실’들에 주의함으로써 ‘의미’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가는 독법은 현대 철학에서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독서의 학]은 이미 국내외에서 대가 중의 대가로 인정받은 요시카와 고지로가 말년에 쓴 작품이다. 그만큼 그 고증의 범위는 풍성하며, 논의는 수시로 틀을 깨고 흘러넘친다. 여기서 독자들은, 항시 텍스트에서 텍스트 이상을 잃어내며 저자의 진의를 탐해온 학자의 정신이라는 것이 어떠한 모습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인들의 설에 대해 재론할 만한 것들을 독창적으로 읽어내면서도 충분한 실증을 갖추어 아낌없이 상찬하는 저자의 태도는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남긴다. 이 엄밀한 학문의 방식은 저자 요시카와 고지로의 언어로 하면 “독서의 학”이지만, 동시에 동서고금의 학자들이 제각각의 형태로 실천해왔고 또 실천하고 있는, 보편적 학문의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목차
서문 005

1. 언어와 사실 011
2. 명자실지빈야 019
3. 『역易』에 대하여 028
4. 말과 글 037
5. 고립어孤立語, 넣고 빼는 자유 046
6. 문어文語의 윤리에 대하여 055
7. 간결함, ‘서書’의 이상 064
8. 『신당서』, 문장의 변혁(1) 074
9. 『신당서』, 문장의 변혁(2) 084
10. 저자의 태도 읽기: 사마천 094
11. ‘생략’의 문체 103
12. 주석 논쟁: 광대뼈인가, 콧대인가 113
13. 저자를 읽는 독서 122
14. 언어는 음악이 아니다(1) 131
15. 언어는 음악이 아니다(2) 142
16. 언어는 음악이 아니다, 그러나…… 152
17. 음독音讀의 미(1): 음성과 감성 161
18. 음독音讀의 미(2): 음성의 형체 172
19. 음독의 미(3): 음성의 연속 181
20. 일독一讀과 재독再讀 190
21. 음성의 리듬을 조절하는 독서 198
22. 언어의 리듬 속 화자의 인상 206
23. 저자의 마음을 읽다 214
24. 역사 쓰기에 대하여 223
25. 내 독서의 계보 234
26. 게이추契沖를 공부하며(1) 246
27. 게이추를 공부하며(2) 258
28. 독서의 학: 인간의 필연을 더듬다 267
29. 문학의 직무 277
30. 문학의 언어가 지닌 가치 287
31. 다자이 슌다이와 오규 소라이 296
32. 슌다이의 소라이 비판 306
33. 슌다이와 소라이: 계승과 해석 316
34. 공자의 진의를 읽다(1) 328
35. 공자의 진의를 읽다(2) 338
36. 학설의 융합: 정현鄭玄의 예 347
37. 설說의 공존에 대하여 355
38. 독법과 추측: 『능엄경』으로 공자 읽기 363
39. 독서의 학: 이법理法에 대한 성찰 372

미리보기

이 책에서도 되풀이 말하고 있지만, 나는 다른 방법에 의한 학문에 대한 존경을 몰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내가 추구한 벙법의 존재가치를 주장하고 싶었다. 혹은 19세기까지 중국과 일본에서 주류였던 학문하는 방법의 복권을 주장하고 싶었다. 이 방법이 적합한 시대와 적합하지 않은 시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예전에 쓴 글 「독서력에 대하여」에서, 언어를 단순히 ‘사실을 전달하는 매개’로 간주하는 견해, 즉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만 하면 만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저장의 심리를 파고들어 파악하는 능력, 즉 ‘독서의 학’을 하는 능력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시대에 높아진다고 말했다. “특히 역사가 정체되어 퇴폐로 돌입하기 시작한 시대에 뛰어난 인간이 나온다. 한나라의 정현, 청나라의 단옥재, 일본의 모토오리 노리나가 모두 그러했다.(『요시카와 고지로 전집』20권, 219-220쪽)”

이는 조금 지나친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또한 이 방법은 어느 시대에나 소수자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상식적인 독서 방법은 ‘무엇을 아는 것’에서 만족하는 법이고, ‘어떻게’를 찾지는 않는다. 그것이 상식적으로 자연스럽다. 그러나 학문에서 중요한 것은 늘 소수파의 의견이다. 그것은 또한, 학문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터이다.

_「서문」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

현대 일본의 중국학을 주도한 세계적인 중국문학자로 일본의 중국 고전 번역과 해석·연구에 큰 획을 그었다. 고금의 문헌에 해박하고 고증에 뛰어났으며, 직관력이 남다르고 문체가 평이하면서도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다. 교토대를 졸업한 후 1928년부터 1931년까지 베이징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귀국한 후 동방문화연구소(현재의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지내면서도 중국 고전은 중국어로 직독할 것, 논문은 중국어로 쓰는 것 두 가지를 철저히 지켰다.

1947년 교토대 교수가 되었고 1962~1963년 컬럼비아대 객원 교수를 지냈으며 1964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주요 저서로 『요시카와고지로 전집(전28권)』 『두보시주杜甫詩注』 『도연명전陶淵明傳』 『중국의 지혜: 공자에 대하여』 『진사이·소라이·노리나가』 등이 있다.

 

옮긴이

조영렬

1969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1995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2000년 한림대학교 부설 태동고전연구소(지곡서당), 2011년 고려대학교대학원 중일어문학과 일본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주요 역서로 『새로 읽는 논어』(2016), 『시를 쓴다는 것』(2015), 『독서의 학』(2014),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2010),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 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