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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산조각 난 신 어느 태평양전쟁 귀환병의 수기
  • 지은이 | 와타나베 기요시
  • 옮긴이 | 장성주
  • 발행일 | 2017년 05월 22일
  • 쪽   수 | 452p
  • 책   값 | 18,000 원
  • 판   형 | 137*203
  • ISBN  | 9788967354244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추천의 글
책소개

1942년 일본 제국 해군에 자원입대한 열여섯 살 소년병
그는 살아남은 것을 후회했고, 무지했던 것을 부끄러워했다
패전 이후 소금을 뒤집어쓰고 녹아내리는 민달팽이처럼 무너지는 가운데
천황의 실체를 깨달으며 고통의 일기를 적어내려가다 

 

패전 이후 천황의 실체를 깨달으며 써내려간 일기 

“4년 3개월 29일 동안 해군생활을 하면서, 나는 군인칙유의 정신을 몸에 익히고 충실하게 병사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전장에서도 당신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당신을 조금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병사였던 지금까지의 인연을 끊고자, 복무 중에 당신한테서 받은 금품을 돌려드립니다. (…) 이상이, 내가 당신의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당신에게서 받은 금품의 전부입니다. 총액 4281엔 5전이므로 우수리를 절상해서 4282엔을 이렇게 돌려드립니다. 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평양 전쟁 기간 천황 히로히토는 일본 국민에게 신과 동등한 존재로 추앙받으며 전체주의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런 천황이 패전 이후 인간 선언을 하고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한 일본인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와타나베 기요시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귀환한 병사의 눈으로 전쟁에 패배한 일본을 바라보며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인정할 것을 정면으로 요구한다. 이 책은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써내려간 일기이기도 하다.
와타나베 기요시는 192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여섯 살이던 1942년 일본제국 해군에 자원입대하여 동남아 전선에 투입된 후 격렬한 전투를 경험하면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 패하자 와타나베는 미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고향으로 생환한다. 도쿄로 진주하는 미군을 보면서 패전의 치욕에 괴로워하는 한편, 그는 천황의 안위를 걱정하기 시작한다. ‘미군이 천황을 전쟁 책임자로 몰아 처형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일기에 밝히고 있다.

“만약 처형이 확정된다면 미리 깨끗이 자결하는 길을 택하실 것이다. 당당하게 자결함으로써 누구도 범하지 못할 제왕의 제왕다운 존엄을 천하에 보여주실 것이다. (…) 실은 항복 조서를 발표하시고 나서 곧바로 자결하실 줄 알았다. 패배를 책임지는 방법은 결국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본 와타나베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바로 천황이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를 방문해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전쟁 중에는 ‘짐승 같은 미국놈’이라던 맥아더를 천황이 직접 찾아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에 그는 절망한다.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마치 어른 곁에 선 아이처럼 거대한 맥아더 옆의 왜소한 천황을 보며, 그는 ‘일본은 천황과 함께 완전히 패배했다. 나의 천황 폐하는 오늘 죽었다’며 절규한다.
이후 몇 개월간 와타나베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떤다.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고된 나날을 보내는 동안 그는 수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천황은 자기 손으로 개전 선언에 서명을 했으면서도 어째서 전쟁에 책임을 지지 않는가? 어떻게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던 국민을 배신하고 하루아침에 적장에게 예를 표할 수 있는가? 그런 천황을 자신은 어째서 그토록 떠받들었는가? 전시에는 ‘성스러운 전쟁’을 부르짖으며 국민을 전선으로 떠밀다가 패전 후에는 모든 것을 군국주의자들 탓으로 돌리는 언론, ‘천황이 사람의 모습을 한 신’이라고 가르쳐놓고선 이제 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때의 교육을 부정하는 교사, 젊은이들에게 입대하라고 부추긴 주제에 패전 후에는 ‘전쟁에 져서 차라리 잘됐다, 이제는 민주주의의 시대다’라고 떠드는 지식인을 보며 와타나베는 자신과 함께 싸우다가 죽어간 전우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천황을 떡갈나무 몽둥이로 엉망진창이 되도록 패주고, 바다 밑바닥으로 질질 끌고 다니면서 전우들의 무참한 주검을 보여주겠다는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어느 날 사촌에게 이런 심경을 털어놓은 와타나베는 그에게서 ‘천황을 그토록 철저히 믿었던 너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이렇게 적는다.

“한편 이때껏 그토록 무책임한 천황을 광신적으로 믿었던 나 자신 역시 용서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든다. 배신당했다느니 속았다느니, 모든 것을 천황 탓으로 돌려봐도 이대로는 납득할 수 없을 것 같다. 천황을 그토록 믿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까. 그리고 그 책임은 내가 나 자신에게 져야 하니까.”

이처럼 천황에 대한 일방적인 배신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와타나베는 사촌에게서 받은 책(『근세경제사상사론』과 『빈곤론』)을 읽으며 전에는 몰랐던 세상의 이치에 차츰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점령군 사령부의 명령으로 교사들이 전시 교육 내용이 담긴 교과서에 먹칠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싸움에서 죽어간 이들은 먹칠을 하기 전의 교과서로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다. (…) 나는 배운 것을 곧이곧대로 머릿속에 받아들였고, 또 그것을 모조리 나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믿어버렸다. 그래서 아예 의심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결국 하나부터 열까지 이미 만들어진 것들을 일방적으로 주입당하면서, 나는 나만의 잣대에 맞는 천황상像을 내 안에 완성했던 것이다. 현실의 천황하고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나만의 이상적인 천황을……”

해가 바뀌어 1946년 1월 1일에 히로히토 천황은 그 유명한 ‘인간 선언’ 조서를 발표한다. 자신은 한번도 ‘인간의 모습을 한 신現人神’이라고 자처한 적이 없다는 천황의 선언을 보며 와타나베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분노한다. 더 나아가 그토록 큰 전쟁을 치르고서 반성은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 천황을 보며 일본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한다. 천황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무슨 짓을 해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점령군 사령부의 지시로 새 헌법 초안이 발표된 3월 8일, 와타나베는 새 헌법에 포함된 상징 천황제를 보며 아연실색한다. 신에서 인간으로, 다시 ‘상징’으로 표변하는 천황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단념한 그는 마침내 일본이라는 ‘국가’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어쨌거나 나는 ‘국가’라는 것을 더 이상 신용하지 않는다. 국가의 이름을 빌린 어떠한 꿍꿍이속에도 협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책임과 양심에 따라, 국가를 결연히 거부한다. 조국애도 애국심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1946년 4월, 형이 결혼을 하면서 있을 곳이 마땅찮아진 와타나베는 사촌에게서 도쿄에 있는 일자리를 소개받아 고향을 떠나게 된다. 떠나기 직전, 그는 이제 누구나 천황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천황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천황에게서 받은 돈과 물건만큼은 깨끗이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 말을 하려면 말하는 쪽도 그 정도로 결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6년 4월 20일, 천황을 ‘당신(あなた)’으로 호명하는 그 유명한 편지가 완성된다. 전쟁 기간에 군인칙유의 정신에 따라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항복한 후 ‘당신’이 보여준 모습에 절망했다는 말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와타나베가 복무 기간에 받은 의복 한 점, 급료 1엔까지 세세하게 적어 내려가다가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끝을 맺는다.

“이상이, 내가 당신의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당신에게서 받은 금품의 전부입니다. 총액 4281엔 5전이므로 우수리를 절상해서 4282엔을 이렇게 돌려드립니다. 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일본 국민의 시점에서 가장 준열하게 비판한 책

히로히토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책은 정치학자 가미시마 지로의 『근대 일본의 정신 구조』(1961)를 비롯해 여러 권이 있지만, 대부분은 전문 연구자의 것이다. 학자가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 천황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책은 몇 권 되지 않으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산산조각 난 신』이다.
저자 와타나베 기요시가 천황에게 그토록 커다란 배신감을 느끼고 그 존재를 정면으로 비판하게 된 데에는 그의 출신 배경 탓이 크다. 궁핍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상속권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고, 그래서 고등소학교를 마치자마자 제국 해군에 자원입대한다. 그가 다른 직업이 아닌 군인을 택한 것은 천황을 신으로 떠받들도록 한 신격화 교육 때문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이 즉위한 해인 1926년에 태어난 그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줄곧 천황이 신성불가침의 존재라 배웠고, 천황에게 받은 은혜를 갚으려면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세뇌당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와타나베는 패전 후에 책임을 회피하는 천황의 비굴한 모습을 보며 지식인들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학도병 출신 귀환병들과 비교해보면 이 점이 두드러지는데, 강제로 군대에 끌려온 학도병들은 고등 교육을 받은 덕분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정당성 자체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반면 고등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들어간 와타나베는 군 복무 기간에 밥 한 그릇, 양말 한 짝까지 천황에게서 받은 것이라 여기며 철저히 ‘천황을 위해’ 몸을 바쳐 전투에 임했다.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인 열여섯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3년간 천황의 병사로 싸운 그였기에 종전 후에 느낀 배신감 또한 그토록 컸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후에도 여전히 시부얀 해에서 표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8월 15일 그날에 그대로 못 박힌 채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패전 후 일본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미시사적 사료

일본이 패전의 상흔을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존 다우어의 『패배를 껴안고』이다. 이 책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에 걸쳐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며 일본이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학술서다. 반면 『산산조각 난 신』은 일반인의 눈으로 전쟁에 패배한 일본을 응시하며 당시 일본 국민의 신산한 삶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울분 섞인 목소리로 묘사한다. 이 책에는 미군의 공습을 피해 부모와 떨어져 시골로 소개된 아이들,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밤거리로 나선 여성들, 배급받은 식량으로는 끼니를 이을 수 없어 소중히 아끼던 물건을 농촌에 들고 와 헐값에 파는 도시 사람들, 꼼짝도 못할 만큼 사람이 가득한 기차에 아기를 업고 탔다가 내린 후에야 아기가 질식사한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범죄자로 전락한 귀환병 무리 등 당시 일본인들의 삶을 보여주는 기록이 가득하다.

 

전쟁으로 망가진 청년의 재생을 그린 감동적인 논픽션

지금의 일본인들은 대부분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을 그저 ‘그 전쟁’이라고 부르며 단순히 ‘전쟁은 비참한 것, 무서운 것, 슬픈 과거’로 기억한다. 패전 직후에도 전쟁 책임이라는 문제는 깨끗이 잊고서(또는 잊으려 하면서) 미국식 개혁에 동조해 일사불란하게 전향하는 분위기가 사회에 가득했다. 학자들은 이를 일본사회 특유의 집단주의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하기도 하는데, 와타나베 기요시에 따르면 그러한 전향은 천황이라는 거대한 면죄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황 본인이 군부의 선전에 속아 개전 명령을 내렸으니 국민도 군부에게 속은 피해자인 셈이고, 따라서 아무도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와타나베 기요시는 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천황이라는 신을 섬기는 순교자의 삶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책의 본문에는 피어Pier, 즉 전선 각지에 설치된 위안소 이야기가 나온다. 와타나베는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위안소를 찾는 부사관들을 위해 그 앞에서 대신 줄을 서준 적이 많았는데, 정작 본인은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 이유가 조금 당황스러운데, “기왕 천황 폐하께 바친 몸이니 깨끗한 채로 산화하는 것이 더욱 영광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패전 후 손바닥 뒤집듯이 전향하여 미국을 추종하는 동포들을 보며, 또 전쟁 책임을 회피하는 천황을 보며 더더욱 울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가 냉정을 되찾고 천황에 대한 증오를 넘어 스스로의 책임을 깨닫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가와카미 하지메의 책 두 권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천황 신격화 교육을 받았던 그가 패전 후의 사상적 진공 상태에서 비로소 자기 눈으로 사회를 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무기 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한 재벌 기업들, 전쟁 중에는 참전을 독려하다가 패전 후에 민주주의를 외치며 다시금 권력을 장악하려고 선거운동에 분주한 정치인들을 보며 그는 자본주의와 대의정치의 모순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다른 일본인들이 하지 못했던 각성을 혼자 힘으로 해나가는, 그리하여 절망을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그의 삶 자체가 읽는 이에게 묵직한 감동을 안겨준다. 책 맨 마지막의 한 문장(‘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습니다’)이 주는 감동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다. 특히 군복을 입고 생활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당신’으로 지칭하며 빚을 갚겠다는 말을 보면서 공감이든 불편함이든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목차

서문을 대신하여: 경제대국의 내부에서 쓰인 책_쓰루미 슌스케

소집 해제에 즈음해 육해군 군인에게 내리는 칙유

쇼와 20년(1945) 9월
쇼와 20년(1945) 10월
쇼와 20년(1945) 11월
쇼와 20년(1945) 12월
쇼와 21년(1946) 1월
쇼와 21년(1946) 2월
쇼와 21년(1946) 3월
쇼와 21년(1946) 4월

해설_와타나베 후사코

옮긴이의 말: 신이 버린 세상에서, 다시 살아가기 위해

미리보기

어느 시대 어느 한 시점을 봐도 거기에는 인간 역사의 단면이 있고, 거기서부터 인간을 이해하는 단서가 발견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치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시점이나 그러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이런 것이었는가. 일본인이란 이러했던가. 일본이란 이런 나라였던가. _5쪽

 

“천황 폐하가 처형당할지도 몰라.” 이런 소문이 마을에 돌고 있다. 아직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나로서는그 소문이 언제부터 퍼졌는지 알 길이 없지만,  오늘도 종묘상의 마고이치 아저씨가 대저울을 빌리러 우리 집에 들렀다가 문간에 서서 아버지한테 그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았다. _18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와타나베 기요시渡邊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1941년 초등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1942년 전함 무사시에 배치받아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해전에 참가했다. 무사시가 침몰했을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1945년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1970년부터 일본 전몰학생 기념회(와다쓰미카이)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저서로 『바다의 성』 『전함 무사시의 최후』 『나의 천황관』 등이 있다.

 

옮긴이

장성주

출판 편집자를 거쳐 번역자로 일하고 있다. 옮긴 책에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인기 없는 에세이』 『별도 없는 한밤에』 『다크 타워』 시리즈, 『모나 리자 오버드라이브』 『일러스트레이티드 맨』 『아돌프에게 고한다』 『표류 교실』 등이 있다.

 

추천의 글

“이토록 성실하고 솔직한 자기반성의 기록은 없었다. 일본인의 소박한 전쟁관을 통쾌할 정도로 산산이 부서뜨린 책.” _『산케이 신문』

 

“갑자기 신에서 인간으로, 성전의 제일가는 상징에서 ‘민주주의’의 애매모호한 상징으로 바뀐 천황에 대한 독특하고도 예리한 비판을 담은 책.”  _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