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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기로 본 조선 규장각 교양총서 8
  • 지은이 | 김남기 구만옥 김상태 김호 문숙자 박현순 이숙인 정호훈 조계영 조영준 황재문 황정연
  • 옮긴이 |
  • 발행일 | 2013년 01월 31일
  • 쪽   수 | 412p
  • 책   값 | 23,000 원
  • 판   형 | 160*220
  • ISBN  | 9788967350390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문자의 나라, 기록의 시대 조선에서
일기 없이는 나도 없고 가문도 없다고 여긴
12명 조선인의 삶의 궤적을 좇다 

생의 끝머리에 들어선 이들을 돌보며 쓴 치병 일기
글씨 잘 쓴다고 서울로 뽑혀 올라간 영리들의 출장 기록
참혹한 전란의 와중에 사대부가 여인이 남긴 [병자일기]
사대부 경화사족이 지닌 문예취향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흠영]
양반 아닌 ‘상놈常漢’이 남긴 기록 [하재일기]
이국땅의 사건과 유배지의 민란을 기록한 [음청사]

 

규장각 교양총서 제8권 [일기로 본 조선] 출간
인생의 궤적軌跡, 일상의 기록-조선시대 일기와 소통하다

증자가 말했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꾀함에 충실히 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귀는 데 신의가 없지 않았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는가?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일기를 쓴다는 것은 바람에 흩어지는 구름처럼 소소한 일상을 선명하게 바라보고 소중히 간직하는 일이다. 우리 모두는 한번쯤은 일기를 씀으로써 속내를 털어놓고 새로운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뎠던 경험이 있다. 어느 하루도 나와 똑같은 삶을 사는 이는 없으니 나의 일상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그러니 삶의 조각을 어딘가에 남기는 행위는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일기가 빛을 발하는 때는 대중과 소통하는 순간이다. 일상의 기록이 사회적 소통의 주인공이 되려면 시간이라는 인내가 필요하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쓴 일기는 우리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삶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어느 면에서 일기에 기록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실을 바라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며, 이를 다시 기록으로 남긴 옛사람들의 뜻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는 일이다.

규장각 교양총서 제8권으로 나온 [일기로 본 조선]에서 다룬 열두 편의 일기는 세 편을 제외하고는 개인의 일상생활 전반을 기록한 생활일기다. 일기를 쓴 기간은 짧게는 1년 여부터 68년에 이르고, 일기가 시작될 때의 연령은 10세부터 80여 세까지 각기 다르다. 우리는 열두 편의 일기가 지닌 독특한 맛과 향을 풀어내어 옛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과 죽음은 인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이다. 치병일기는 조선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과 애쓴 노고의 흔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정청일기]는 내의원 어의들이 고위 관료로 재직 중인 노수신을 치료한 일기이고, [가대인시탕시일기]에는 왕진을 거절당하자 노모에게 단지혈斷指血을 드린 효자 하진태의 절절함이 배어 있다. 생의 끝에 선 이들의 모습을 담은 일기에서 질병의 고통과 이를 지켜보는 아픔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소현세자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분조分朝를 이끌며 국정을 처리했고, 병자호란 때는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었다. 소현세자는 강학講學에서 배운 내용을 100번 이상 읽어 통달하도록 공부했다. [소현동궁일기]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과 비운의 생애를 살다 간 소현세자의 삶과 서연書筵활동이 기록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63세의 나이로 피란길에 오른 남평 조씨는 1년에 서른 번이 넘는 제사를 주관하고 농사를 경영하면서 심양에서 돌아올 남편을 기다렸다. 그녀는 내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죽은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 대한 그리움을 [병자일기]에 한글로 섬세하게 표현했다.

노상추는 혼인하던 해인 17세 때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기를 쓰기 시작해 68년간 지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남이 사망하자 세상일에 흥미를 잃고 일기 쓰기를 노상추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상추일기]는 집안의 대표로서 쓴 일기였기에 주인공 노상추를 비롯해 그의 부모, 자식, 손자에 이르는 4대 가족의 생과 사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 되었다.
조선의 관료제, 행정체제, 경제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던 인물의 일기는 조선 사회의 구조와 실상을 꾸밈없이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다. 조선의 17세기는 사림의 공론인 사론士論이 높은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인데, 김영의 [계암일록]에서는 이 시기 중앙 정계의 동향과 지방 유생들의 활동에대해 살펴볼 수 있다. 김영이 살던 시대는 성리학적 의리를 실천하는 사림들의 상소인 유소儒疏, 사림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처벌인 유벌儒罰이 주요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황사우는 경상감사의 수석보좌관 격인 도사都事로서 지낸 1년의 시간을 [재영남일기]에 상세하게 담았다. 도사는 감사 유고시에 감사의 직임을 대행하기 때문에 아감사亞監司로 불렸다. 감사는 도내 군현을 순력巡歷하면서 향교의 훈도와 유생에 대한 평가, 관리들의 근무 평정, 민원 해결 등을 처리했다. 당시는 감영監營에서 업무를 관할하는 유영留營 체제가 아닌 순력를 통한 행영行營 체제였기 때문에 지방 관료의 고단한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정조가 명한 [오경백편] 선사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상감영의 영리 권계만은 규장각 출장에서의 견문을 [내각선사일록]으로 남겼다. 이 일기는 1797년 경상감영 선사영리들의 규장각 출장 배경과 감회, [오경백편]의 선사 과정과 시상 등을 담고 있다. [오경백편]을 목판으로 간인할 때 사자관寫字官이 아닌 영남서리의 글씨를 선택한 정조의 확고한 신념을 이 일기는 말해준다.
지규식은 궁중에 필요한 그릇을 만들어 사옹원에 조달하는 공인貢人이었기에 [하재일기]에는 그릇의 납품과 매매, 공가貢價의 수취 등에 관한 내용이 있다. 공인활동은 대동법 시행 이후 각 지역에서 중앙에 납부한 쌀이 공물을 상납한 공인에게 공가로 지급되는 체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이 일기에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사옹원 분원 운영의 변화와 서울의 금융 거래에 대한 정보도 자세하다. [하재일기]는 양반이 아닌 미천한 신분의 보통 사람이 남긴 일기로서 희소가치가 있다.
같은 시기 외교와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윤식을 세상에서는 ‘진개화眞開化’로 불렀는데, 그가 당시의 관습과 체면에 구애받지 않고 파격적인 행동을 한 내력은 [음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1년 학도들을 이끌고 무기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중국을 찾은 영선사領選使로서의 경험이나 제주도로 유배되어 이재수의 난을 목격한 사건들은 소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이재수의 난은 소설과 영화로 이어져 과거와 현재를 소통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의 11년 유학생활에서 견문을 넓히고 세계사의 흐름인 제국주의의 약육강식 논리를 체득했다. 1895년 귀국한 윤치호는 한말 개화·자강운동의 핵심 인물로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대한자강회를 이끌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개화·자강운동의 대명사, 일제강점기 조선 기독교의 원로, 일제강점기 말 친일파의 대부로 살았던 그는 60년간의 영문 일기에 자신의 속내와 시대의 모습을 다각도로 기록했다.

18세기 조선의 학술과 문화 지형을 보여주듯 오직 자신의 학문적 열정과 예술 애호를 갈망하며 평생을 추구한 이들이 있었다. [이재난고]를 남긴 황윤석은 십대 후반부터 천문역산학을 비롯한
과학기술과 관련된 서학서를 열람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재난고]는 서학에서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구분해 선택적으로 수용했던 황윤석의 세계관과 18세기 후반 서학서의 유통 현황을 보여준다.

자식이 없던 유만주에게 분신과도 같았던 [흠영]은 18세기 서울에 거주한 양반 가문의 예술 취향과 서화가들의 활동 등을 담고 있다. 서화애호가 유만주는 중국에서 유입된 서화에 관한 저서와 기록을 통해 역대 서화가와 그들 작품에 대한 지식을 탐색하면서 여러 경로로 서화를 축적해나갔다. 유만주는 [흠영]에서 “일기는 가까운 일을 상세하게 하고 멀어진 일은 잊지 않게 하는 자신의 역사이니 소홀히 할 수 없다”며 일기 쓰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인생의 궤적軌跡, 일상의 기록-조선시대 일기와 소통하다

1장 생의 끝자락에 선 이들의 모습을 담다
_조선의 치병治病일기들 김호·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2장 17세기 사림정치의 굴곡을 기록하다
_김영의『계암일록』박현순·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3장 왕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좇다
_소현세자의 삶과 서연활동 김남기·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4장 피란 중 써내려간 사대부 여성의 삶
_남평 조씨의『병자일기』이숙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5장 “흠영이 없으면 나도 없다”
_서화애호가 유만주의『흠영』황정연·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6장 16세기 초, 경상도 도사로 보낸 1년의 시간
_황사우의『재영남일기』정호훈·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7장 서학을 좇는 한 지식인의 기록
_황윤석의『이재난고』구만옥·경희대 사학과 교수

8장 글씨 잘 쓴 경상감영 영리들, 규장각 출장길에 오르다
_권계만의의 기록『내각선사일록』조계영·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9장 무관이 남긴 68년의 생애사
_노상추 일기 문숙자·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10장 미천한 보통 사람이 남긴 일기와 경제생활
_『하재일기』를 통해 본 공인貢人의 일상 조영준·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장 이국땅의 사건과 유배지의 민란을 기록하다
_김윤식의『음청사』황재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12장 일제강점기 한 지식인의 내면일기
_윤치호의 일기 김상태·서울대학교병원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지은이

 

미리보기

노수신의 치병일기 속에 보이는 당대 최고 실력 내의들의 갈등
[정청일기]를 읽다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일기 후반부로 갈수록 허준의 방문은 줄어들고 안덕수와 의약을 의논하는 빈도가 잦아진다는 사실이다. 8월 14일에 노수신의 눈 부위가 붓고 건강 상태가 나빠지자 정탁鄭琢의 요청으로 양지수, 남응명 등 두 명의 내의가 노수신을 방문한 후 ‘폐열肺熱이 심하고 기운이 울체氣滯하다’는 진단을 내리고 안덕수에게 처방을 묻는 기사가 보인다(1589년 8월 14일) 그 뒤 8월 27일 안덕수는 직접 노수신을 방문하여 문진했다. 안덕수는 이른바 양예수-허준으로 이어지는 강하고 효과 빠른 약물을 선호하는 준한峻寒 의학에 반대하여 온보溫補의 의학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러한 두 학파 사이의 갈등이 잘 묘사되어 있다. “양예수의 투약 방법은 패도覇道와 같아서 집중적인 투약으로 효과를 빨리 보는 반면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지만, 안덕수의 방법은 왕도王道와 같아서 효력이 느리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다. 이에 세론世論은 모두 안덕수를 두둔하였다”는 것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의약醫藥]). 허준의 방법은 매우 신속하면서 효과적이지만 몸을 상하게 하는 반면 안덕수의 처방은 비록 효과는 느리지만 몸을 보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애초에 노쇠한 노수신에게는 비교적 강하고 효과 빠른 허준의 처방 대신, 효과가 느리지만 몸을 상하게 하지 않는 안덕수의 약물이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기의 짧은 구절 속에서 당시 쌍벽을 이루던 허준과 안덕수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대결을 간취할 수 있다. _29~30쪽

 

모친 병환 고치기 위해 손가락을 두 번이나 자른 효자
21일 오후에 병세가 한층 더 위독해졌다. 두 뺨과 손발이 모두 차갑고 코와 입에서 나오는 숨이 차츰 차가워졌다. 또 거의 운명하실 정도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아버지께서는 곁에서 시중드는 계집종을 나가게 하고 당숙 어른께서 눈치채고 저지할까 걱정하여 몰래 오른손네 번째 손가락을 잘랐는데 첫 번째 자를 때는 피가 나오지 않았고 두 번째 자를 때는 피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았다. 세 번째 자른 뒤에야 선혈이 나왔는데 세 곳에서 모두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또 미음에 타서그릇에 가득 채워 할머니 입안으로 남김없이 부어 드시게 하였다. 얼마 후에 몸에 온기溫氣가 차츰 돌아왔다. 이때 형님이 아랫방에서 쉬고 있다가 아버지가 할머니 입안으로 부어넣을 때에 병상 곁에 들어와서 처음에는 주사朱砂를 미음에 탄 것인 줄 생각하였다가 두 번째 이렇게 단지를 한 것임을 알고서 마음과 간담이 서늘해졌다. 어제 이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몇 해 동안 병을 앓았고 허약한 체력이었는데, 연일 계속하여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 그날의 정경을 보는 사람마다 모두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은 대변의 맛을 보니 마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썩은 기름 찌꺼기 같다고 하셨다. 인삼 3돈을 넣은 속미음을 드시게 하였다. 양동 숙부님은 흐느껴 울면서 문밖에 나와 장례를 치를 채비를 하였으니, 그 경황이 없음을 예상할 수 있다. _43~44쪽

 

사림의 이름으로 처벌하다: 일기에 나타난 유벌儒罰의 사회상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국은 완전히 달라졌다. 북인 정권의 독주에 반대하다 귀양갔던 사람들이 풀려나고 폐모론에 반대하며 조정을 떠났던 이들도 속속 돌아왔다. 반면 북인 정권에 동참했던 인물들은 처형되거나 유배길을 떠났다. 지방에서도 북인 세력으로 활동하거나 북인 세력을 등에 업고 전횡을 부린 인사들에 대한 단죄가 시작되었다. 각지의 유생들은 유회를 열어 사림의 이름으로 북인 세력을 처벌했다. 예안과 이웃한 안동과 영천에서도 유회를 열어 유벌을 시행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영이 사는 예안에서는 1623년 4월 3일 향교 근처 백사장에서 유회를 열었다.
“밥을 먹은 후 여희·덕여 등과 함께 대사大寺 앞 백사장에 갔다. 봉사금경·영천수령을 지낸 이영도 등 모인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흉당凶黨을 처벌하여 오윤은 영영삭적하고 (…) 이홍익·윤동로는 삭적하였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온계에 가서 서긍의 집을 부수게 하였다. (…) 온계의 동구에 이르러 개울가에 앉아 있는데 서긍의 집에서는 몇 리 떨어져 있었다. 사자士子와 품관品官들이 군사들을 시켜 집을 부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부수기가 쉽지 않자 불을 놓아버렸다. 멀리서 보고 있다가 놀라서 힘써 말렸으나 불이 이미 번져서 꺼지지 않았다.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_68~69쪽

 

공식적인 역사가 담아내지 못한 이면의 진실
[병자일기]는 공식적인 역사 기록이 담아내지 못한 이면의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역사를 읽는 새로운 흥미를 준다. 조씨의 일기에 따르면 남편 남이웅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다들 취하시고’ ‘너무 많이 잡수시고’ ‘취하도록 잡수시고’ ‘취하여 돌아오시고’ ‘반쯤 취하여 돌아오시고’ ‘술에 취해 넘어지시고’ ‘술병이 들어 복통을 일으키시고’……. 1631년(인조 9) 9월 4일 실록 기사에서는 조씨의 남편 남이웅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신임 감사 남이웅은 이 소임에 합당치 않은 것은 아니나, 몸에 병이 있고 성품이 느슨한 데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결점이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조씨의 일기 속 정보들은 매우 정확한데, 공식적인 기록과의 교차적 읽기를 통해 다양한 사실을 읽어내는 재미가 있다. _141쪽

 

글지방관들의 애환 담긴 일기 – 거머리침 일화
일기에는 여러 사람이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습이 적혀 있곤 한데 가장 흔한 것은 종기였다. 영양이 부실한 데다 과로가 겹치면 잘 생기는 이 종기를 지방관들은 자주 앓았다. 종기가 심해지면 아무런 일도 못 하고 쉬어야 했기에 이 병은 여러모로 골머리를 썩혔다. 이때 종기를 치료하고자 주로 썼던 방법이 거머리침이었다. 이 치료법은 달리는 질침법蛭針法으로도 불렸는데, 거머리蛭를 환자의 환부에 대어 고름을 빨아먹도록 해서 종기를 다스렸다.
“철성에 머무르다. 감사의 종기 독이 풀리지 않아 사천으로 가는 것을 중지했다. 감사는 종일 거머리침을 놓았다. 거머리침을 놓는 방법은 이렇다. 짧고 둘레가 큰 대나무 통에 그 한쪽을 막아서 물거머리를 많이 담고 또 물을 채운 다음, 그 대나무통을 종기 부위에 맞춰 댄다. 그러면 통 안의 거머리들이 모두 종기에 붙는데, 배불리 먹은 것이 먼저 떨어진다. 그렇게 하면 큰 수고를 하지 않고도 나쁜 피를 뽑을 수 있다. 통에 물을 채우는 것은, 물이 없으면 종기 부위에 열이 나서 거머리가 붙지 않고, 물과 거머리를 함께 종기 부위에 닿도록 해야 종기 부위가 물 때문에 열이 내려가며 거머리가 붙기 때문이다.(1519년 9월 16일)” _233쪽

 

글씨 잘 써 불려 올라간 지방 관리들의 서울 출장일기
정조는 오경 중에서 평소 실마리를 찾아가며 외우던 부분을 뽑아 책의 부피를 줄이고 글자 모양을 크게 썼는데, 이는 노년에 반복해가며 외우고 이를 일상의 공부로 삼는 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
해서였다. 정조의 나이 47세이던 1799년 7월 10일자 [정조실록]의 기사에도 “나의 시력이 점점 예전 같지 않아 경전의 문자는 안경이 아니면 알아보기가 어렵다”고 토로하였다.
1797년 6월 28일에 규장각으로 들어간 영리들에게 대교待敎 심상규沈象奎가 지필묵紙筆墨을 주면서 각기 1장씩 써오되 마치 한 사람이 찍은 듯이 써오라고 했다. 영리들은 6월 29일 종일토록 글씨를 연습해 윤6월 1일 대유재에 나아가 심상규에게 써온 것을 제출했는데 필법이 크게 차이가 없다고 평하였다. [오경백편]의 정본 선사는 길일인 윤6월 2일부터 영첨청에서 시작했다. 영리들은 한 장씩 쓰고 종이 위쪽에 성명을 써서 대내에 들이면 정조가 서체에 대한 평을 써서 내렸다. 이날 정조는 필력이 몹시 가늘어 정본으로 할 수 없다고 평하였다. 정조는 경상감영의 영리들을 규장각으로 불러 올린 것은 그 필체가 ‘돈실敦實’함을 취하려는 것인데 지금 쓴 필체는 오히려 ‘예쁜 모양娟’에 가깝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곧 정조는 영리들에게 ‘육후체肉厚體’를 따르도록 엄히 신칙하였다. _280~281쪽

 

서민이 쓴 일기엔 웬 음독자살 이야기가 이리 많은지
가족이 겪은 시련도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한켠을 차지했다. 첫째 아들 영인榮仁은 노름과 잡기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국향菊香을 데리고 와서 측실側室로 삼았다. 또1902년 11월에는 이웃 사람의 처에게 1500냥을 빌렸다가 갚지 않아 체포되었으며, 지규식이 현금 700냥과 1300냥짜리 어음으로 빼내기도 했다. 1902년 4월에는 둘째 며느리가 병으로 죽었고, 셋째 아들 영례榮禮 또한 죽었다. 셋째 며느리는 쌍둥이를 임신해 1903년 7월에 출산했는데, 두 아기 중 첫째만 살고 둘째는 죽었으며, 결국 유복자를 데리고 시가에서 청상과부로 살게 되었다. 넷째 아들 영지榮智는 1903년 4월에 돈 300냥을 가지고 충청도 직산稷山으로 도망갔다가 둘째 아들 영의榮義에게 이끌려 돌아왔으며, 막내인 다섯째 아들은 1900년에 죽었다.
가족 및 이웃이나 동료의 사건·사고 역시 일기에 기록되곤 했는데, 자살을 비롯해 성폭력이나 간통 및 소송 등 100여 년 전의 사회상은 오늘날 못지않았다. 예컨대 자살하는 이들은 주로 음독을 했는데, 이는 흔한 일이었다. 1904년 3월에 시집간 딸이 음독자살했고, 같은 해 5월에는 직장 동료의 부인이, 8월에는 금시현琴詩絃의 딸이 음독자살했으며, 9월에는 동네 하인이 양잿물 마시고 자살했다. 1905년 1월에도 무수동無愁洞 이씨의 후처 및 이윤경李允京의 며느리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_338~339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구만옥
경희대 사학과 교수. 저서 [朝鮮後期 科學思想史 硏究 Ⅰ-朱子學的 宇宙論의 變動], 공저 [韓國實學思想硏究 4-科學技術篇] [韓國儒學思想大系-科學技術思想編] 외 다수.

 

김남기
안동대 한문학과 교수. 역서 [역주소현동궁일기] [역주심양일기], 논문 [三淵 金昌翕의 詩文學 硏究] [동궁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세자의 교육] 외 다수.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교수. 저서 [제중원 이야기], 공저 [한국의학인물사]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 [예술 속의 의학] 외 다수.

 

김 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저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조선 과학인물열전], 논문 [조선시대의 ‘學’: 자연과 인간의 총섭總攝] 외 다수.

 

문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저서 [조선시대 재산상속과 가족] [68년의 나날들, 조선의 일상사: 무관 노상추의 일기와 조선후기의 삶], 논문 [17~18세기초 해남윤씨가의 노비 매입 양상: 노비 매입 목적과 流入 노비의 성격에 대한 추론] 외 다수.

 

박현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공저 [서양인이 만든 근대전기 한국이미지 2 : 코리안의 일상] [고문서에게 물은 조선 시대 사람들의 삶], 논문 [16~17세기 예안현 사족사회 연구] 외 다수.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저서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역서 [여사서] [열녀전], 논문 [儒仙들의 풍류와 소통: [需雲雜方]을 통해 본 16세기 한 사족의 문화정치학] 외 다수.

 

정호훈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저서 [조선후기 정치사상 연구] [경민편-교화와 형벌의 이중주로 보는 조선 사회], 공역 [朱書百選] [朱子封事], 논문 [16·7세기 [소학집주]의 성립과 간행] 외 다수.

 

조계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공저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공역 [망우동지·주자동지], 논문 [조선후기 선원각의 왕실 기록물 보존체계] 외 다수.

 

조영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공저 [조선후기 재정과 시장], 논문 [조선시대 문헌의 신장 정보와 척도 문제] [[부역실총]의 잡세 통계에 대한 비판적 고찰] 외 다수.

 

황재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저서 [안중근평전], 논문 [‘환구음초’의 성격과 표현방식] [전통적 지식인의 망국 인식] 외 다수.

 

황정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저서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공저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조선 궁궐의 그림], 논문 [[흠영]을 통해 본 유만주의 서화 감상과 수집 활동]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