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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들의 기독교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 지은이 | 김영민
  • 옮긴이 |
  • 발행일 | 2012년 12월 31일
  • 쪽   수 | 144p
  • 책   값 | 9,000 원
  • 판   형 | 148*210
  • ISBN  | 9788967350314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나는 기독교인이다’라는 언명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먹은
허깨비들의 장송곡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랫동안 독창적이고 농밀한 시선으로 한국 사회의 풍경을
속속들이 깨단했던 철학자 김영민의 본격 기독교 비평

7년째 십이조十二祖를 드리는 옹골지게 독실한 교회 재무부장 A, 남편과 부모의 사랑을 대신하는 기독교에 푹 빠진 B, 성서 강의가 끝나면 꼬리곰탕을 먹고 유흥가로 향하는 목사 C … 집사들끼리의 동호회를 이끌며 잃었던 삶의 재미를 찾는 h 등 각양각색의 에피소드 속에서 오늘날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갖는 의미를 세밀하게 되묻다

 

에피소드 소개

(1) 낙타의 길: 당신들의 기독교, 예수를 향한 나아감이 없는 습관으로 가득찬 독실함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공부를 매개로 모종의 신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제 ‘마음’대로 믿음을 얻은 뒤에 그제야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 탓에 신학은 애초 그 정당성(legitimacy)이 의심스러운 신념을 정당화(justification)하는 장치로서 동원되곤 한다. 이 때문에 믿지 않고는 사유(공부)할 수 없는 한국 신학의 독특한 풍경이 연출된다.”(11~12쪽)

A는 지난 10년간 한 차례도 주일 대예배에 빠진 적이 없으며, 40대 문턱을 넘어서면서부터 십일조가 성에 차지 않아 ‘십이조’를 한 지 7년째 접어든 독실한 신앙인이다. 저자는 A의 이러한 독실함에 의문을 품으면서 이는 습관의 상식에 의해 나타난 일종의 노동이 아닌가 묻는다. 그러면서 신앙의 생성 과정에서 말씀의 종교라는 기독교에서 신념이 융통되는 방식이란 정작 언어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것이 앞서 있음을 질책하며 신앙의 맹목성을 꼬집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론의 노동 없이 이루어진 생활의 관성이 보수주의를 만드는 과정은 곧, 신앙의 보수주의 형성에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는 특히 예수를 향한 신앙을 키우기 위한 노력 없는 세태를 비판하며, 죄와 은혜의 관계 속에서 “은혜를 받기 위함이라면 차라리 죄라도 좋다”는 식의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도착적 신자들이 문제임을 강변한다.

(2) 울고 있는 아이 혹은 증상의 미래: 당신들의 기독교, 풍진 세속을 견딜 사랑의 환상 

“합리적이고 다감한 치유의 언어가 빈약한 사회에서, ‘성도의 사랑’이라는 어휘를 남발하면서, ‘외롭고 괴로운 이들은 다 내개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달콤하게 속살거리는 미남자-그것이 금발의 예수든, 혹은 남성적 카리스마로 넘실대는 부흥사든!-가 주재하는 종교는, 두 명의 부모와 두 명의 남편에게 인정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세속의 각질과 곡절에 내던져진 B의 심혼을 단번에 휘어잡았다.”(27쪽)

B는 교회 권사에 봉사부장까지 맡아 충량하고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70대의 노파다. B에게는 빨치산이었던 과거가 드러나 제대로 연을 맺지 못했던 첫 번째 남편, 시골 부호의 외아들이자 인텔리였지만 숨겨놓은 중병 걸린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후 파경을 맞은 두 번째 남편, 그리고 유달리 사랑과 배려로 서로 안아주지 못한 부모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B는 40대 후반에 들어 교회생활을 시작하며 사랑이라는 말 자체를 실감나게 주고받았고, “욕망의 상대를 부모나 남편 대신 신이라는 환상적 대상선택(Objektwahl)으로 교체”(31쪽)하기에 이른다. 저자는 B의 삶을 분석하며 B에게 종교란 “부재했던 사랑에 대한 보상적 환상이 집결하는 장소”(31쪽)였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녀의 신앙생활이 20세기 한국사의 풍진 세속에서 대표적으로 불행했던 한 여인에게 가능했던 마지막 형식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3) 룸살롱의 목사들: 당신들의 기독교, 사이비와 가장 멀다고 느낄 때 가장 사이비적인 

“‘목사’요 교수라는 사회적 기표를 페르소나로 삼아 살아오면서 어렵사리 숨기고 억압해야만 했던 어떤 욕동(Trieb)은 이 수컷 동아리의 패거리 의식 속에 순발력 있게 추진(Trieb-en)된다. (…) 기업가의 삶이 기획이듯이, 그들의 삶은 ‘추진’이다. 그리고 오입(悟入)의 칸트와 오입(誤入)의 사드 사이를 왕래하는 이 목사들의 순례처는 이스라엘의 어느 곳이나 사회적 소외자의 어느 장소가 아니라 강남의 환락가다.”(36~37쪽)

C는 특정 교회를 담임하지 않지만 틈틈이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목사이자, 어느 유수한 서울 소재 대학에서 성서를 강의하는 성서학자다. 그는 한 주간의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더불어 꼬리곰탕 같은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은 뒤 강남의 유흥가로 향한다. 저자는 소스타인 베블런의 ‘과시적 소비’론을 통해 신의 말을 전하는(대리하는) 사람들의 지위와 그 행위에서 오는 타락을 설명하며, ‘지금 이 세상의 C(들)’이 제도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가장 그 제도의 사이비성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가는 이유를 묻는다.

(4) D와 팔선녀: 당신들의 기독교, 신도들의 공상 속에 가벼이 재단되어질 누군가의 삶 

“하지만 경천동지할 신비체험도 필경은 ‘사람의 무늬[人紋]’ 속에 스며든 한 겹이자 한 층일 터, 인간의 삶과 인간의 세상보다 길거나 진하진 못할 것이다. 일상 속의 사람들이, 그들의 어울림과 갈등이, 그리고 그 욕망과 희망이 없는 곳에서야 종교나 신비가 대체 무슨 소용이 닿겠는가?”(58~59쪽)

D는 여덟 명의 아가씨로 구성된 일종의 종교공동체인 ‘팔선녀’를 이끌었던 신자로, 교회 안에서 늘 화제의 대상이었다. 선녀들은 매일 교회의 으슥한 골방에 모여 기도와 찬송으로 밤을 샜고, 그러던 와중에 방언이나 통변의 은사 등으로 대변되던 신비체험을 자주 한다는 것을 비롯한 갖가지 소문에 휩싸이게 되었다. 교회 안에서 이들의 행태를 신비화·우상화하는 추세도 간헐적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 목회상의 공식 지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저자는 점점 늘어가는 소문과 질시,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린 D와 친해지면서 그녀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낸다. 이 의미 읽기는 무엇보다 ‘음탕해 보인다’라는 주변인들의 시선 가운데, 이른바 신화와 스캔들 사이에서 갇혀버린 여신도 D의 삶이 비극으로 끝나면서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5) 국수 먹는 예수: 당신들의 기독교, ‘믿기’를 넘어 ‘하기’를 실천하는 이들의 지는 싸움과 그 희망 

“어쨌든 한국의 개신교 교회는 그 배타적 독선주의와 더불어, 선교지상주의에 따른 무장소성(placelessness)으로 악명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특한 수행의 전통을 쟁이고 두른 채 오랫동안 산중에서 그 나름의 장소적 아우라를 계승해온 불교 사찰과는 아예 비교할 수도 없지만, 천주교나 원불교 등과 비교하더라도 개신교 교회당의 장소는 한국의 압축·편파·이식 근대화와 꼭 닮아 있어, 작으면 졸속하고 크면 부박하기 일쑤다.”(58~59쪽)

E는 어느 산골 교회에서 부목사 겸 교육전도사로 일하며 향촌의 땅을 지켜온 노인들을 교인으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의 강의를 청강하는 수준을 넘어 깊은 지적 열의로 제자를 넘어 동무가 된 E와의 사연을 소개하며, 그의 내면적 성실성에 깃든 예수의 삶에 동참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아울러 이를 통해 저자는 E가 단순한 ‘믿기’를 넘어선 ‘하기’의 단계를 맞아들여 이 현실을 극복할 다른 ‘장소’의 현실을 모색하는 참 신앙인임을 밝힌다. 저자의 시선에 따르면, E는 외면적으로는 제도권 목회의 길을 가지 못하며 힘든 목회생활을 하고 있으나 외려 ‘지는 싸움’을 통해 폐허 속에서 돋아나는 역설적인 희망을 기대하게 만든다.

(6)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 많은 목사: 당신들의 기독교, 자기애적 탐닉에 빠진 신의 대리자 

“카리스마나 권위(auctoritas)의 비각이 다름 아닌 ‘비웃음’이라고 하듯이, 타인들과의 인격적 관계, 특히 한나 아렌트가 ‘정치적 사랑(philia politike)’- ‘세계’의 공간 사이에 설정한 거리로부터 누군가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부른 신뢰와 우정의 관계를 얻지 못한 인격적 카리스마는 종종 나르시시즘에 되먹힌 채 우스꽝스러운 꼴을 연출한다.”(83쪽)

F는 현직 목사로 30년째 담임목회를 하고 있다. 천성이 착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며 별반 물욕도 없지만, 사람 좋은 그도 덤벙거리거나 더러 실없는 호기를 부려 보수적 성향의 교인들에게 경솔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저자는 특히 무엇보다 F의 튀는 말버릇에 주목하면서 지나치게 쏟아내는 언사에 스며든 나르시시즘이 성직자로서의 운명을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7) 교회 속의 신(新)신분제: 당신들의 기독교, 세속적 특권들의 심리적 봉토로 전락한 곳 

“‘많이 벌어 많이 내겠다’는 변명이 얹혀 있는 자리가 실은 얼마나 썩고 곪은 코드로 얽혀 있는지, ‘자본제적 풍요의 신학’이란 완벽한 몰신학일 뿐이며, 다수의 기독교인이 내세우는 소망이란 게 자본을 향한 호객을 멈추지 않는 여리꾼들의 가면-다만 자신의 몸에 몹시 가까운 탓에 마침내 제 몸이 되어버려서, 자신의 가면을 가리킬 수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계급’ 혹은 신분에 관한 얘기다.”(93쪽)

G는 규모나 위세에서 으뜸으로 치는 한 교회의 장로다. 10여 년째 교회 재정을 이끌며 담임목사와 교인들에게 신망이 두텁다. 특히 그는 국내 유수한 재벌회사 계열의 종합병원에서 내과과장으로 근무하며 7~8년 월급이 천만 원에 달할 정도다. 한데 G는 어느 사모임 자리에서 제약회사 등으로부터 커미션을 받는 관행을 세세하게 털어놓으며 ‘몇 차례만 응하면 집 한 채쯤은 장만할 수 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꺼낸다. 저자는 이런 G의 내밀한 생활을 돌아보면서 이른바 ‘착한 기독교인’이라는 위치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거나 그냥 외면하려는 것들은 무엇인지 직시한다. 저자는 G의 삶을 통해 “이미 우리 시대의 교회는 사회적 강자와 부자들을 대체하거나 각성시키는 어떤 (초대 교회들과 같이) ‘절실한 약자들로 구성된 희망의 공동체’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8) h, 스피노자가 아닌: 당신들의 기독교, 삶의 욕망과 쾌락을 소비하기 위한 신앙

“예수의 제자로서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각자의 생활양식을 얻은 채 (마치 스피노자의 인상처럼) ‘고독한 현자이자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래밭에 숨은 바늘을 돼지 뒷다리로 찾아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노릇이 되고 말았다. 예수를 만난 게 위험한 ‘사건(evenement)’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양식의 실천 속에서 그 사건과 검질긴 접속을 ‘좁은 문 속의 희망’으로 구체화하려는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107~108쪽)

h는 수년 전 어느 대기업의 부장이었던 남편을 과로사로 여의고 중학교 3학년 딸 하나를 키우며 혼자 살아가는 신자다. 그녀는 목사인 아버지의 기대와 바람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모 신학대학의 종교음악과를 졸업한 뒤 신실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h는 남편의 죽음 이후 세속의 눈을 뜨게 되었고, 그동안 억눌려왔던 정서들을 마음껏 표출한다. 특히 h는 같은 교회에서 만난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 집사들과 모임을 만들어 팬시카페를 통으로 빌려 와인파티를 열거나 동남아 휴양지를 떼 지어 찾아다니기도 하며, 전속 수영강사를 두어 열심을 부리고 그들의 아지트에서 인문학 교양강좌를 열려고 한다. 저자는 특히 h와 친구들의 신앙이 “스피노자처럼 하나의 세계와 그에 대한 관심으로 전념집주해본 적”(106쪽) 없이, “철학마저도 당대의 현안을 해결하려는 외교관적 입장과 시각에서 접근했던 라이프니츠”(107쪽)가 되었다고 개탄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삶의 욕망과 쾌락을 해결하려는 데에만 혈안이 된 채 예수를 더 깊숙이 이해해보려 하지 않고 외교관적 입장과 시각으로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문화적 기독교인’이 늘어나고 있음을 안타까워한다.

(9) i, or Christian, all too Christian: 당신들의 기독교, 세상과 불화할 진지함이 없는 가족주의 

“예수의 가족은, 사회적 동화의 정념 속에서 동일시할 수 있는 혈친이 아니라, 성경 속에 잘 표명되었듯이, 차라리 어떤 희망(‘하나님의 나라’)을 향해 당대의 체계와 불화하면서 걸어나가는 동무공동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118쪽)

i는 저자가 사는 밀양의 고명한 노방전도다자. 그는 ‘세상 끝 날까지 전파할 복음’의 전도자를 자처하며 나대는 신자로, 아무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중뿔나게 나대면서 자신의 종교를 선전한다. 저자는 i의 삶을 통해 그를 광신에 이르게 한 종교적 진지함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진지함이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상적인 진지함으로 탈가족주의가 갖고 있는 관습의 극복, 시대와의 불화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 가운데 당대의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고 민중의 현장에 뛰어들어 스스로 스캔들의 대상이 되었던 예수의 모습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정녕 “정치화한 슬픔이나 공동체가 갖고 있는 명랑함의 수준을 넘어 ‘하아얀 의욕’을 실천할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지 자문한다. 안타깝게도 저자가 보기에 i는 예수를 외친다고 해서 예수의 진지함이 있는 것도 아니오, 당대 체계에 대한 급진적 저항과 혁명의 비전을 장착한 전사도 아니다.

(10) j, 혹은 창의적 스캔들: 당신들의 기독교, ‘사람살이’가 없고 ‘어느 먼 곳’만 바라보는 종교

“대개의 종교가 ‘어느 먼 곳’이나 ‘어느 다른 때’의 유토피아를 명분으로 내거는 대신 지상의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j의 개신교는 차라리 일종의 ‘삶의 종교’-니체가 기독교를 ‘삶을 고사시키는 종교’로 타매한 점에 착안한다면-로서 그의 다소 일탈적인 행위 속에서 역설적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130쪽)

j는 정한 교회를 두고 정기적으로 출석하지 않는다. 그는 특히 개신교적 분위기나 그 신화에 동참하지 않는 차림새를 하였는데, 한결같이 양복에 넥타이를 맨 인간들 사이에서 강기갑 의원이나 처음 등단한 유시민 의원의 입성이 되려 낯설게 보이듯이, 일할 때가 아니면 늘 정갈한 한복을 챙겨 입고 입을 열면 동아시아 고전에다 한시를 주워섬기며 좀처럼 개신교회에서 통용되는 ‘주의 종’ ‘성도’ ‘은혜/은총’ ‘할렐루야’ 따위에 마음을 열지 않는 신자다. 정리하자면, 그는 지역의 현실과 전통에 굳게 착근한 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그를 둘러싼 교회 안팎의 스캔들을 통해 그의 스캔들에 내재한 ‘소외의 힘’에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어느 먼 곳’이나 ‘어느 다른 때’라는 유토피아만을 명분으로 내걸고 정작 지상의 삶을 부차적으로 평가하며 삶을 고사시켜나가는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상의 열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김영민은 “알지 못하므로 부득불 믿게 될 것이나, ‘믿는’ 순간 부패를 피할 수”(4쪽) 없는 역설적인 종교적 상황을 독자와 공유하면서 ‘종교인으로서의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건 과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다. 그는 특유의 문체와 쉽게 온기를 내어놓지 않는 시선으로 “어떤 고백 혹은 신념 그리고 어떤 감동의 울결 따위”가 예수를 믿는 사람의 징표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그는 기본으로 돌아가 “예수의 삶의 정황, 문제의식, 고민과 이어지는 구체적인 활동, 그리고 삶이 그러했으므로 피할 수 없었던 죽음의 성격 등을 헤아리”(4~5쪽)고 있는지를 강력하게 묻는다. 이러한 질문을 그냥 두지 않고 삶에 끌어오는 것만이 생활을 규제하는 현실로서의 종교를 넘어 어떤 현실과 어떤 희망이 합쳐진 (여전히 불가능이기에 때론 진정한) 종교의 완성을 돕기 때문이다.

목차

머리말· 당신들의 기독교와 예수의 희망

당신들의 기독교(1): 낙타의 길
당신들의 기독교(2): 울고 있는 아이 혹은 증상의 미래
당신들의 기독교(3): 룸살롱의 목사들
당신들의 기독교(4): D와 팔선녀
당신들의 기독교(5): 국수 먹는 예수
당신들의 기독교(6):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 많은 목사
당신들의 기독교(7): 교회 속의 신(新) 신분제
당신들의 기독교(8): h, 스피노자가 아닌
당신들의 기독교(9): i, or Christian, all too Christian
당신들의 기독교(10): j, 혹은 창의적 스캔들

미리보기

간단히 정리하자면, 국가는 대자본의 현실을 돕는 안전망이자 심지어 여리꾼 노릇을 하고, 종교는 자본의 성취와 번영에 대해 뒷북을 치며 축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국가와 자본과 더불어 삼위일체를 이루는데, ‘하나의 체계(세계)는 신화라는 지평의 테두리를 통해 완결된다‘(니체)는 격언 속의 ‘신화‘를 종교(개신교)에 대입시켜보면, 주중의 근실한 노도오가 욕망 그리고 주말의 충량한 믿음과 나눔을 통해 마침내 자본제적 삶의 형식을 완결시키는 종교의 역할을 보다 큰 그림 속에서 요량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A의 신앙적 독실은 대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며, 그 성격은 어떤 것일까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_19쪽

 

종교와 몸의 자리가 얼핏 대극적이긴 하지만, 실은 그 상극의 외피가 거대한 원환을 이루면서 내밀한 상생을 이루어간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_56쪽

 

타인들과의 관계, 특히 한나 이렌트가 ‘정치적 사랑(philia politike)‘-‘세계‘의 공간 사이에 설정한 거리로부터 누군가를 존경하는 것-이라고 부른 신뢰와 우정의 관계를 얻지 못한 인격적 카리스마는 종종 나르시시즘에 되먹힌 채 우스꽝스러운 꼴을 연출한다. _83쪽

 

‘많이 벌어 많이 내겠다‘는 변명이 얹혀 있는 자리가 실은 얼마나 썩고 곪은 코드들로 얽혀 있는지, ‘자본제적 풍요의 신학‘이란 완벽한 물신학일 뿐이며, 다수의 기독교인이 내세우는 소망이란 게 자본을 향한 호객을 멈추지 않는 여리꾼들의 가면-다만 자신의 몸에 몹시 가까운 탓에 마침내 제 몸이 되어버려서, 자신의 가면을 가리킬 수 없는 가면-에 불과하다는 사실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의 ‘계급‘ 혹은 신분에 관한 얘기다. _93쪽

 

예수를 만난 게 위험한 ‘사건(evenement)이 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양식의 실천 속에서 그 사건과의 검질긴 접속을 ‘좁은 문 속의 희망‘으로 구체화하려는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_107~108쪽

 

지상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람살이‘인데, 거기에는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풍수를 비롯하여 지역의 민속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더러 과감하게 지원하는 이유도 ‘지금-이곳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려는 그의 일관된 ‘세속적‘ 관심-이것은 가히 사이드(E. Said)를 따라 ‘세속적 관심‘이라고 할 만하다-때문이다. _130쪽

 

나는 종교의 완성-종교는 결국 믿는 자의 일생에 근거한 한시성과 실존성에 제한적으로 유효하므로 ‘완성‘이라는 말 그자체가 어패가 있긴 하지만-이 어떤 정서와 분위기에 젖어 있는 생활양식, 그리고 그 생활양식에 의해 검질기게 몸을 끄-을-고 다가서려는 어떤 희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리라고 전망한다. 그리고 정서와 분위기, 생활양식과 희망은 이미(역설적이게도) 종교의 것을 넘어간다. 종교는 스스로 빈 것으로 남아, 늘 종교가 아닌 것을 도우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생활을 규제해왔던 현실을 뒤집어, 어떤 현실과 어떤 희망이 종교를 완성시키는 식으로-그러니까 종교가 생활을 도와, 바로 그 생활이 다시 종교를 완성시키는 방식으로-재배치되어야 한다. _132~133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김영민

철학자, 한신대 교수. 『서양철학사의 구조와 과학』(1992) 『현상학과 시간』(1994) 『컨텍스트로, 패턴으로』(1996)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1996)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글쓰기와 철학』(1998) 『보행』(2002)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 『산책과 자본주의』(2007) 『동무론』(2008) 『영화인문학』(2009) 『공부론』(2010)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2011) 등 24권의 단행본을 썼다. 그간 세 차례 대학에 초청받았고 세 차례 사직하였으며, 다시 2011년 봄학기 부로 한신대학교에 초청되었다. <장미와 주판>(1992~2009), <문우인>(2009~), <금시평산회>(2009~), 그리고 <인문연대 금시정>(2007~) 등의 인문학술 공동체 운동에 줄곧 간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