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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의 생각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 지은이 | 김문식
  • 옮긴이 |
  • 발행일 | 2011년 11월 08일
  • 쪽   수 | 272p
  • 책   값 | 15,500 원
  • 판   형 | 140*210
  • ISBN  | 9788993905762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조선을 통틀어 가장 영명했던 군주
조선을 강한 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군주
정조의 깊은 내면을 만나러 떠나는 여행

정조 연구 최고의 전문가 김문식 단국대 교수가 20여 년간 정조의 글을 읽어오면서 만난, 정조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마흔 일곱 편의 글을 번역하고 정갈한 해설을 달았다. 뛰어난 학자, 노회한 정치가, 실존적 고뇌에 휩싸인 인간 정조를 한 권의 책으로 만난다.

“내가 맨 처음에 만난 정조는 뛰어난 학자였다. 스물다섯 살에 국왕이 되었을 때 그는 규장각을 세우고 여기에 편찬 기능까지 두어 수천 권의 책을 편찬하거나 혹은 편찬하도록 독려한 학자였다. 다음에 만난 정조는 노회한 정치가였다. 정조는 비밀편지를 통해 각 정파의 지도자에게 각자의 행동 방침을 알려주고, 상소문의 문구까지 정해줄 정도로 당대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만난 정조는 보통 사람이었다. 정조는 기쁨과 슬픔을 절절하게 느끼면서 살았던 평민들과 다를 바 없었고, 나는 정조의 이런 모습이 제일 마음에 와닿았다.”  _「머리말」

 

정조의 감춰진 내면과 새로운 모습 재발견

“그 사람의 시를 외우고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_ [맹자]

언행을 통해 겉으로 알려진 모습은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을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것은 공인 중의 공인인 조선 국왕일수록 더하다. 조선 후기 국가와 학문의 부흥을 일으킨 군주로 평가되는 제22대 국왕 정조正祖(재위 1776~1800)는 세종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운 군주다. 최근에는 각종 드라마와 수원 화성 등으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와 있는 군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업적으로 포장되고 후세의 받들어 모심으로 추앙된 정조의 속 깊은 내면 읽으려고 한 시도이다. 20여 년 간 조선 후기의 지성사와 국왕 정조를 연구해온 김문식 단국대 교수가 정조의 글을 읽으면서 파악한 정조의 생각을 소개한 것이다. 글감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주로 골랐고, 최근에 발굴된 자료도 포함시켰다.
왜 우리는 정조의 내면일기를 읽어야 하는가. 이 책에 소개된 정조의 일기장 한 페이지가 그 이유를 어떤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좀 길지만 소개해본다.

“홍인한洪麟漢이 평안 감영에서 돌아온 뒤, 다시 정승을 하려는 마음을 내어 정후겸鄭厚謙에게 밤낮으로 아첨하였다. 그때 상(영조)은 천식이 날로 심해져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저들의 간악함으로도 틈을 탈 길이 없었다. 또 내가 오랫동안 곁에서 모시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으므로 틈을 탈 방법이 없었다.
갑오년(1774) 12월 7일, 피곤한 까닭에 거처하는 건물로 돌아온 나는 낮잠이 들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중관中官이 추가로 정한 후보자의 명단을 보여주었다. 급히 일어나 보니, 홍인한은 이미 우의정에 제수되어 있었다. 마음으로 매우 놀라 화완和緩 옹주를 만나러 가서 ‘어째서 이 사람을 우의정에 제수했습니까? 최근 상의 환후를 보면 하찮은 벼슬을 제수하는 것도 분발하여 처리할 가망이 없습니다. 정승을 제수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이루어졌습니까?’ 하였다. 화완 옹주는 정색을 하고 ‘나는 모릅니다’라 하기에,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고 돌아왔다.
이튿날 정후겸이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 ‘우상은 바로 동궁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렇게 특별히 제수된 것은 공사公私 간에 매우 다행스럽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마지못해 ‘정승을 잘 골랐다고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 내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_192~193쪽

우리가 설핏 알고 있는 바로는, 정조는 영조 말년의 병수발을 거의 목숨을 걸고 들었다. 이는 여러 책에서 드라마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 이는 순정한 효심으로 조명되곤 했다. 허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이 책의 저자는 그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정치적 맥락을 읽어낸다.

위의 일기는 세손 정조가 1775년(영조 51) 11월 1일에 작성한 일기의 전문이다. 이로부터 한 달 후 정조는 존현각에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정조는 1762년에 동궁이 되고, 1775년에는 국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행했다. 그러나 정조의 지위는 안정되지 않았다. 1774년 사도세자의 반대파였던 홍인한이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복귀했고, 재상이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정후겸과 긴밀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정후겸은 영조의 딸인 화완 옹주의 양자였으므로 영조에게는 외손자가 되었다. 이 무렵 화완 옹주는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 두 사람의 결합은 정조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정조는 영조의 병수발을 들며 잠시도 국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작당하여 무슨 흉계를 꾸밀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하루는 정조가 피곤하여 잠시 낮잠을 자는 사이에 영조가 홍인한을 우의정에 임명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건이 발생하자 정조는 화완 옹주를 의심했다. 궁중 출입이 자유롭던 옹주가 영조에게 인사 청탁을 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후겸은 화완 옹주에게 미리 홍인한의 인사를 부탁했고, 옹주는 정조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영조에게 접근하여 성사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정조가 이를 따지자 화완 옹주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고, 정조는 그대로 물러서고 말았다. 명백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따지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정후겸은 정조를 만나 홍인한이 동궁을 보호하는 우의정이 된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조의 속마음을 떠보면서 음해할 꼬투리를 찾으려는 속셈에서였다. 정조는 그저 적절한 인사라고만 대답했다. 속마음과는 다른 말이었지만, 신변의 안전을 위해 한 말이었다. 1년쯤 시간이 흐른 뒤, 정조는 그때 자신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고 판단했다. 정조가 사방에 있는 감시의 눈길을 의식하며 조심조심 살아야 했던 시절의 일기이다.

 

글은 내용에 따라 궁궐, 가족, 학문, 출판, 공신, 정치, 경제 분야로 구분했다.

궁궐과 가족을 다룬 글들에서는 보통 사람 정조를 소개했다. 궁궐에서는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 동궁 시절에 거처한 경희궁, 화성에 행차할 때 휴식을 취하던 용양봉저정을 뽑았다. 이곳은 모두 정조의 생애와 긴밀히 엮여 있는 공간이었다. 가족들과 관련한 것으로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고모부, 아우에 대한 기억과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며 당부하는 글이 남아 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잘 배어 있는 글들이다. 학문과 출판의 장에서는 학자로서의 면모를 주시했다. 정조는 첫 스승인 남유용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스승의 문집을 간행했고, 시강원 시절의 스승에게 자신의 견해와 각오를 분명하게 밝혔다. 정조는 국왕이 열람하는 실록인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데 만전을 기했고, 이이의 손때가 묻는 [격몽요결]을 열람한 감회를 밝혔으며, 경학, 주자학, 송시열의 글을 편집한 책을 편찬하면서 그 서문과 발문도 지었다. 이를 보면 정조는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면서도 주자학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공신, 정치, 경제를 다룬 장에서는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봤다. 정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신료들과 매년 친목모임을 가졌고, 그 일원이었던 정민시가 사망하자 ‘천고의 긴 밤에 한바탕 꿈같은 인생이라’며 탄식했다. 정조는 단종과 효종에게 충성한 인물들을 표창하며 자신에게도 그러한 충신이 나오길 기대했고,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거나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킨 인물을 표창하고 그 후손을 관리로 등용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였던 이여송이 원래는 조선인이고, 명나라가 망하자 그 후손들이 조선으로 귀화한 사실은 흥미롭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자신을 감시하는 눈길을 의식하며 살았고, 국왕이 되자 영조의 사업을 계승한다고 선언했다. 규장각에 강제문신을 설치하고 과거제의 폐단을 제거하여 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했고,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폈다. 정조는 국가의 주산업인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려고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매년 새해가 되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는 윤음을 내렸고, 학자들에게 생산력을 높일 방안을 물었으며, 농사에 관한 정보를 집대성한 농서를 편찬하려고 했다. 농사가 잘되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는 것이 국왕의 첫 번째 임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우선 정조가 작성한 글을 번역하여 제시하고, 편마다 그 글이 나온 배경과 정조의 생각을 덧붙여 정리한 것이다. 저자는 “나의 독법에 혹 오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될 수 있는 한 정조의 입장에서 그의 생각을 따라잡으려 노력했음을 밝혀둔다”라고 말했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왕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생각

경춘전 동쪽 벽의 용 그림 -「경춘전기」
궁궐은 정치를 하는 곳이다 -「경희궁지」
먼 곳을 바라보며 정치를 구상하다 -「용양봉저정기」

제2장 가족과 친지에 대한 생각

양녕대군, 사양하는 덕 – 「지덕사 기문」
백성들이 춥고 찌들었기 때문이다 – 「검암기적비」
딸의 집을 방문한 영조 – 「국왕 가마를 수행하여 옹주의 집에 행차한 기록」
왕은 가족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 「영종대왕행록」
길을 잃은 어린아이의 편지 – 「빈전에 직접 향을 올리다」
윤리는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 「홍 봉조하에게 답함」
두 기러기가 남쪽으로 날아갔다 – 아우 이진을 위해 지은 제문
고모부 박명원에 대한 고마움 – 「금성위박명원신도비명」
왕세자의 나라를 위한 대사면령 – 「왕세자 책봉일의 윤음」

제3장 학문과 독서에 대한 생각 

여덟 가지 잠箴에 대한 기억 – 스승 남유용의 『뇌연집』에 부쳐
쳐다보면 더욱 높아지고, 뚫어보면 더욱 단단해진다 – 스승에게 보낸 편지 「답빈객」
밖에서 빌린 것은 끝내 약해진다 – 동궁 관리에게 보내는 「답궁료」
『춘추』를 완독한 날의 ‘책씻이冊施時’ – 정조의 독서기

제4장 지식과 책에 대한 생각

국왕이 열람하는 실록을 완성하다 – 『국조보감』 서문
정조는 왜 즉위한 뒤 『보감』부터 만들었을까 – 「명편국조보감윤음」
율곡의 친필을 보고 감흥을 살려 쓰다 – 『격몽요결』 머리말
정문正文만을 취하다 – 『경서정문』 편찬
국정의 기본 방향에 대한 신념 – 『주자대전차의』 발문
정조가 인정한 두 명의 성인 – 『양현전심록』 서문

제5장 신하들에 대한 생각

위기를 함께 넘긴 동지들에 대한 마음 – 『동덕회축』 서문
한밤중의 종소리를 차마 듣지 못한 이유 – 「정민시 치제문」
충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 「장릉 배식 신하들 의견에 대한 비답」
국가의 죄인, 단종을 도운 엄흥도 – 「장릉배식록」
귀국길에 사망한 한 외교관을 위한 글 – 「경릉과 창릉에 참배한 날의 윤음」
말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국가를 이롭게 한다 – 『유성룡 서화첩』 서문
명나라 제독의 자손들 조선으로 이주하다 – 「제독이공사당기」
주자[朱]로 인해 거미[蛛]도 사랑하다 – 「이여송의 후손인 이원을 발탁함」
조선의 체면을 살린 ‘가짜 대포’ – 「포수 이사룡을 성주목사로 추증함」
송시열 같은 신하를 기다리며 – 대로사大老祠 비문
정조의 생각을 150년 전에 읽은 선비 – 「유형원에게 성균관 좨주를 더하라」

제6장 정치에 대한 생각

세손과 우상의 아슬아슬한 대화 – 『존현각일기』 한 편
첫 조회에서 밝힌 통치 구상 – 「초원조참일윤음」
인재를 배양하는 근본 – 「강제문신을 설치하라」
변화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 – 「과제변통윤음」
우리가 10만 명의 기록을 세웠구나 – 춘당대의 과거시험
호남이 어사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십 년이 되었구나 – 암행어사 심진현에게 내리는 밀서
보고 듣는 데에 마음을 다하라 – 암행어사 정약용에게 내리는 밀서
경은 어찌 그렇게 마음을 몰라주는가 – 「송환기를 부르는 명령」
반짝반짝 빛나는 은하수가 하늘을 도는 것 같다 – 「효종 밀찰의 발문」
정적과도 협력하는 정치적 수완 – 심환지에게 보낸 밀찰

제7장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생각

관청에 바칠 세금을 내기도 부족하구나 – 새해의 권농 윤음
농사는 땅의 재화를 기르는 것이다 – 「농사에 관한 책문」
서울은 의정부에 바치고 지방은 감사에 바쳐라 –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윤음」
남단을 환구단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노력 – 「남단의절문의대신윤음」

 

미리보기

“지난번에 유사가 두 궁궐을 수리하자고 청했지만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경춘전은 수리하지 않으면 무너질 터였고, 무너지면 내가 그곳을 돌보고 아끼는 마음이 아니기에 유사에게 명하여 수리하게 했다. 그렇지만 서까래 몇 개를 갈고 주춧돌 하나를 바로잡아, 기울어지는 것을 받치고 비가 새는 것을 막는 정도였고, 칠이 낡아 벗겨지거나 문창살이 삐뚤어진 것은 그대로 두게 했다.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옛 모습을 보존하여 추모하는 마음을 붙이려는 것이다.” _13쪽

 

“궁궐이란 국왕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들이 향하는 곳이므로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붙이는 것이지, 거처를 호화롭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국 초기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경복궁을 짓고 다시 창덕궁을 지은 것은 국왕이 수시로 이동할 것에 대비한 것이다. 지금 비록 경복궁은 불탔지만 세 궁궐(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이 있어 정치를 하는 장소로는 부족할 것이 없는데 어찌 다시 건축을 하겠는가.” _18~19쪽

 

“무슨 덕德이 제일 높을까? 사양하는 덕이다. 무슨 사양이 가장 지극할까? 명예를 사양하는 것이다. (…) 양녕대군은 우리 태종대왕의 맏아들로 10세에 세자에 책봉되어 훌륭한 요속僚屬들의 도움을 받아 성취를 이루었다. 16, 7세가 되었을 때 세종이 성덕聖德을 타고나서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린 것을 알고, 술에 빠지고 기생과 어울리며, 거짓으로 미친 척하기를 십 년을 하루같이 했다. 그러자 대군은 폐위되었고, 세종은 드디어 세자 자리를 거쳐 왕위에 올랐으며, 예와 악을 정비하여 무궁한 기반을 다져놓았다. 이는 태백이 계력季歷에게 양보하여 주나라 왕업을 이루었던 일과 비슷한 점이 있다. (…) 그는 명예를 사양하기를 잘한 것이니, 태백 이후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지덕至德’이란 이름을 대군이 아니면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_30~31쪽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이고,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윤리입니다. 지금 사람을 보내려는 것은 실로 그만둘 수 없는 정리情理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인聖人은 인륜이 지극한 곳이므로 비록 국왕을 번거롭게 하더라도 어찌 굽어 살피시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또한 죄명罪名은 죄명이고 은애恩愛는 은애입니다. 성상께서 이미 불쌍하게 여기시는 하교가 있었으니, 외손이 어찌 형제간의 친분을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가 죽은 것이 제주도라 느끼는 감정이 남다릅니다. 만일 외손이 돌봐주지 않으면 이 어찌 인정상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인데 스스로 본래의 인애仁愛를 막아버린다면 또 도리상 어찌 편안하겠습니까?” _60쪽

 

“실록實錄과 보감寶鑑은 모두 역사서이지만 그 체제는 다르다. 크고 작은 일의 득실을 모두 기록하여 명산에 간직하고 만년 이후를 기다리는 것은 실록이고, 선대 국왕의 말씀이나 행적 가운데 훌륭한 것을 뽑아서 특별히 기록하고 밝게 드러내어 후대 국왕들의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은 보감이다. 이 때문에 실록은 비밀스럽지만 보감은 드러나고, 실록은 먼 훗날을 기약하지만 보감은 현재에 절실하다. 둘 다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_98쪽

 

“나는 이 책으로 인해 특별히 느낀 바가 있다. 지난번에 영남에서 이문순李文純(이황)공이 직접 쓴 『심경』을 구했는데, 이번에는 또 이 책을 얻었다. 두 현인은 한 시대에 태어났고, 두 책이 나온 것도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마치 기다린 것 같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유학의 기풍은 점차 멀어지고 성인의 말씀은 날로 사라져, 경연에 나갈 때마다 그들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한탄을 멈출 수가 없다.” _109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김문식

서울학연구소.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정조의 제왕학』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정조의 생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