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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다산
  • 지은이 | 김상홍
  • 옮긴이 |
  • 발행일 | 2010년 05월 10일
  • 쪽   수 | 256p
  • 책   값 | 11,800 원
  • 판   형 | 145*215
  • ISBN  | 9788993905250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다산 정약용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 아버지상을 묻는다

6남3녀를 둔 多産한 아버지, 자식 여섯을 요절로 보낸 아버지, 유배지에서 원격 교육한 강한 아버지, 며느리의 묘지명을 쓴 아버지, 조카들을 품어준 아버지

위대한 학자이자 지식인인 다산 정약용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버지로서의 다산의 면모를 만나본다

국회도서관에서 “정약용”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단행본 455건, 학위논문 566건, 학술논문 930건이 검색된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경전·문학·철학·기타 잡학 방면에서 다산이 남긴 유산에 대한 연구에 비해 자연인으로서의 정약용에 접근하는 ‘평전·전기적’ 연구는 다소 소략하다고 할 것이다.

이 책 [아버지 다산]은 자연인으로서의 다산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창으로 ‘아버지’를 선택했다. 경학자이자 실학자로서의 다산의 위상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로서 다산 정약용이 지녔던 꿈과 사랑, 슬픔 그리고 정과 한을 다각적으로 조명했다.

우리는 ‘다산 정약용’ 하면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큰 학자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다산도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였고 작은아버지였다. 이 책은 척박한 유배지에서 자식들을 혹독하게 원격 교육한 강인한 아버지 다산, 가난 속에서도 도덕성을 지킨 아버지 다산, 자녀 9명(6남 3녀)을 낳은 다산多産한 아버지 다산, 요절한 자녀 6명(4남 2녀)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 다산, 스물아홉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자부子婦를 둔 시아버지 다산, 자신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킬 후계자로 여겼던 17세와 20세의 조카 두 명을 허망하게 잃은 작은아버지 다산의 따뜻한 사랑과 정 그리고 시리고도 아린 슬픔과 한을 오롯이 조명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후기 학술문화사를 찬란하게 빛낸 학자이기 전에, 너무나 비극적인 아버지였다. 유배 죄인으로 아들의 과거길을 막은 아버지는 자녀교육 문제에 누구보다 더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먹고 입는 것조차 어려운 지독한 가난을 괴로워하였으며, 자녀 9명 중에 6명을 제대로 보듬어 주지도 못한 채 떠나보냈다. 오랜 유배생활을 끝나가고 고향에 돌아갈 날이 다가왔을 때 젊은 며느리가 요절하고 어린 조카들이 연이어 세상을 뜨는 허망한 인생사에 가슴을 쳤다.

그러나 아버지 다산은 고민만 하지 않았고 괴로워만 하지 않았으며, 혈루만 뿌리지 않았고 가슴만 치지 않았다. 궁핍한 유형지에서 항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때로는 다정하게 더러는 혹독하게 편지와 가계家誡로 자식들을 가르쳐 내일을 도모했다. 또한 요절한 자식과 젊은 나이에 가버린 자부와 어린 조카들을 위해 “누구와 다산은 어버지와 자식 사이였고”, “누구와 다산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였고”, “누구와 다산은 작은아버지와 조카 사이였음”을 기록으로 넘겨 하늘나라로 먼저 간 슬픈 영혼들을 위로하였고 또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알게 하였다. 이렇게 다산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감동적인 아버지였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따뜻한 사랑과 한, 시리고도 아린 아버지의 정[父情]이 있었기에 다산은 그 정을 나라와 백성들에게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당나라 한유韓愈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로 보고 같이 사랑한 ‘일시이동인一視而同仁’과 가까운 것을 도탑게 하고 먼 것도 함께 한 ‘독근이거원篤近而擧遠’을 실천한 것이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아버지의 위상이 점점 작아지는 세태에 이 책은 아버지란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려줄 것이다. 또한 우리 주변의 아버지가 바로 다산과 같은 아버지임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다산 자신이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로서 어떻게 자녀교육을 해야 하는지 그 기본자세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생각거리들이 있으며, 부정父情의 아름다운 세계를 다산이라는 훌륭한 거울을 통해 비춰보는 기쁨도 있다.

저자 김상홍 교수는 지난 30여 년 다산을 연구하여 그동안 다산학 연구서 7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여덟 번째인 이 책에서 다산의 아름다운 아버지 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왕의 연구들을 쉽게 풀어쓰는 데 주력했다.

 

내용 요약

이 책은 총 6부로 이뤄져 있다.

제1부에서 ‘살아남은 자식들의 아버지’로서 두 아들을 원거리에서 어떻게 ‘원격교육’했는지를 다산이 집에 보낸 편지와 가계家戒를 통해 살피고 있다. 다산은 술 마시는 법부터, 폐족의 처세법, 서울의 10리 안에 거주해야 하는 이유, 과거길이 막혔지만 과거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문장보다는 경학 공부에 치중하라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쳤다. 경제적인 궁핍을 이겨내기 위하여 개노주의, 즉 누구 한 사람 노는 손 없이 모두 일해야 한다는 것, 뽕나무를 심어 잠상을 크게 하라는 것, 영농을 다각화하고 닭을 기르되 학문으로 연결시켜[계경鷄經]을 저술하라는 것, 돈놀이와 상업과 약장수는 절대 하지 말라는 것, 의원으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지 말라는 것 등 실용경제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또한 두 아들이 자신의 학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수시로 격려하여 의지를 북돋고, “독서가 애비를 살리는 길”이라며 독서를 강조하고, “내가 죽으면 너희가 저서들을 수습해서 책을 내야하지 않겠냐”며 그렇지 않으면 “이 아버지는 유배죄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며 애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효제孝悌 두 글자를 머리맡에 두고 날마다 되새기며 학문하는 근본으로 삼을 것, 지음知音을 만나면 지체없이 섬길 것, 공부의 뜻은 백성을 윤택하게 하고 사물을 육성하는 데 둘 것 등을 가르쳤다.
저자는 다산이 두 아들에게 가르친 교육의 핵심이 바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제1부에서는 다산 가족이 유배 이후 생활을 수습해나가는 과정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유배 초기에 다산은 집에 편지를 보내 “장남 학연은 말을 사서 아버지를 보러 오라”고 했지만 학연이 온 것은 5년이 지난 뒤였으며 말을 살 돈이 없어서 새끼당나귀를 끌고 왔다. 그것도 마늘 농사가 풍작을 이뤄서 겨우 마련한 노자였다.
그리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다산의 모습이 잘 부각되어 있다. 폐족에게는 과거의 길이 막혀 있지만 그 대신 문장가와 성인이 되는 길은 열려있다며 “부잣집 아들과 가난한 집 아들이 갖지 못한 독서의 조건”을 가지고 있음을 아들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했다.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마당에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며, 손님이 오면 회를 곁들여 나물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겠다는 자신의 꿈을 펼쳐보이며 “이것이 사람이 사는 가장 기본이니, 차마 이마저도 하지 않겠느냐”면서 약해지는 두 아들을 채근했다. 편지를 통해 공부가 나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했으며, 조금이라도 나태함이 감지되면 역사적 사례를 들어서 두 아들을 코너로 몰아부쳤다. 조나라의 조괄이 비록 역사의 죄인이지만, 아버지의 저술을 읽어서 장군 자리에까지 올랐다며 “너희들은 왜 내 책을 읽지 않느냐”며 압박을 가했다. 다산의 두 아들은 농사를 지으랴, 공부 하랴, 아버지에게 변명하랴 심리적 스트레스를 막대하게 받았을 것이다.
큰아들 학연이 내려왔을 때 다산은 유배지에서 거처조차 제대로 없었다. 지역 우두머리들의 감시와 현지민들의 해꼬지를 받아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할 수 없이 주막집 토방에서 몇 년을 수인囚人처럼 지낸 다산은 아들이 내려오자, 두 사람이 지낼 수 없어 아들 손을 붙잡고 산 위의 절에 찾아가 구걸하여 방을 얻은 뒤 겨울을 나며 [주역]을 가르쳤다. 이 장면은 눈물겹기 그지없다.
다산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너무나 강인한 아버지였다.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였다. 때로는 엄했고, 때로는 다정다감했으며, 때로는 두 아들에게 협박과 회유, 애원을 일삼는 한마디로 말해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 온몸을 바쳐 희생한 아버지였다. 우리는 제1부에서 이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

제2부는 꽤 오랫동안 벼슬을 했지만 물러날 당시 호박 심어먹을 밭 한 뙈기 마련하지 못한, 그렇게 청렴했기에 암행어사까지 할 수 있었고, 암행어사까지 할 정도로 존경받는 사대부였지만 처자식을 쫄쫄 굶겼던 ‘가난한 아버지’ 다산을 조명하고 있다. 그의 신혼살림부터 자식들을 키우며 맞닥뜨린 배고픔과 고난의 장면들을 보여준다.
다산이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집에 끼니거리가 떨어지자 계집종이 이웃집 호박을 훔쳐다가 죽을 끓였는데 이를 알고 안주인이 벌을 주자 다산은 그만두게 하고 직접 이웃집에 찾아가 사과하는 에피소드에서 시작하여, 어렵게 모았던 애장서들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것, 아내가 자주 한숨을 내쉬어 가장으로서 기풍이 서지 않았던 일, 다산이 유배 가 있던 시절에 안주인 홍씨 부인이 투호投壺를 팔아서 먹을거리를 구했던 일, 유배지에 있는 아버지에게 밤 한줌밖에 보내지 못했던 아들, 그 아들이 밤을 수확하고 포장해서 보내는 모습을 상상하며 감동하는 아버지 다산을 보여준다. 또한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도덕성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강조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더라도 이웃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되며, 사대부 가문으로서 법도를 지키라고 끊임없이 강조했으며, 홀아비로 지내던 유배시절 꿈에 미인이 나왔으나 뿌리친 후 그 사실을 시로 적어 기록으로 남긴 다산의 모습에서 이러한 모습을 읽어낸다.

제3부에서는 ‘多産한 아버지 다산’과 자식을 앞세운 상처투성이 아버지로서 다산을 다룬다. 6남 3녀를 낳은 다산의 자식농사는 동시대 다른 가정과 비교할 때 그닥 풍년이라 볼 수는 없지만, 유배지로 떠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자식을 낳았을 것이다. 아무튼 저자는 이 6남 3녀의 면면을 일일이 소개하고, 이 가운데 4남 2녀가 돌림병으로 요절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다산의 절망을 추적한다.
첫딸은 생후 나흘 만에 죽어서 이름조차 짓지 못했으며, 그후 연이어 낳은 장남 학연과 차남 학유는 건강하게 자라서 이를 기뻐하는 시문을 지었다. 3남 구장은 천연두와 싸우다 요절했는데 다산은 아들이 병마와 외롭게 싸울 때 자신은 이를 모른채 진주 촉석루에서 기생들과 유람하며 놀았던 것을 두고두고 자책하기도 했다. 이는 [억여행憶汝行]이란 시로 남겨졌다. “지난번에 네가 병마로 고통받을 적에 / 애비는 즐겁게 질탕히 놀았느니라 / 배 타고 북 치며 물놀이하고 / 기생 끼고 촉석루에서 놀았느니라 / 방탕했으니 재앙받는 것이 마땅한 일 / 어찌 너를 여의는 벌을 면할 수 있으리”라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이것이 아버지 다산의 “자책自責”이기도 하지만, 죽은 아들과 자신을 단단히 묶어놓으려는 부정의 일환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아이들의 죽음은 계속 이어진다. 둘째 딸 효순은 낳을 때 순산해 효녀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효순孝順이라 지었는데 22개월 만에 천연두로 요절했고, 셋째 딸은 다행히 살아남아 윤창모에서 출가하여 조선 후기의 저명한 학자 방산 윤정기의 어머니가 되었다. 4남 삼동은 그를 낳을 당시 집안에 세가지 기쁜 일이 생겨 이름을 삼동三童이라 지었지만, 이 아이 또한 22개월만에 천연두가 돌아 입술과 잇몸이 헐어 썩는 병인 아감창牙疳瘡이 심해지더니 죽고 말았다. 그후 5남은 생후 열흘 만에 요절하여 이름조차 짓지 못했고, 6남 농아는 죽은 아이들 중에서는 35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지만 결국 천연두로 요절했다. 다산이 신유사옥에 연좌되어 유배되기 전인 1799년 12월에 낳은 아들 농아는, 다산이 세로世路의 어려움을 감지하고 아들이 농사를 지으며 안정된 삶을 살라는 뜻으로 이름을 농장農?이라 지었고 농아라고 불렀다. 다산은 이 아들의 죽음을 “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이라고 표현했는데, 다른 아이들은 죽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지만 농아는 먼곳에 떨어져 있어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바닷가에서 주워 보내준 소라껍질을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던 농아는 아버지가 두 번째로 부친 소라껍질이 도착하자마자 죽었다. 다산은 “좋은 약을 썼다면 어찌 죽었겠는가”라며 한탄했다.
저자는 이 장의 끝머리에 다산 부부와 자녀 9명의 생몰년월일을 표로 정리하였다.

제4부는 요절한 자녀의 묘지명을 쓸 정도로 ‘자상하면서도 특별했던 아버지’로서의 다산을 다룬다. 자식 앞세우는 게 흔한 일이었던 조선시대였지만, 죽은 자식을 위해 묘지명의 일종인 광지壙誌·광명壙銘을 짓는 아버지는 흔치 않았다. 다산은 광지·광명에서 “누구누구는 나와 부자 혹은 부녀 관계였다”는 것을 꼭 밝힘으로써 자식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3남 구장에 대한 [유자구장광명]에서는 다산의 부친이 회갑일 때 태어난 손주 구장에 대해 ‘나와 동갑’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송구스러워 이름에 두려울 구懼를 썼다는 것, 뒤어어 앞서 얘기했듯 촉석루에서 유흥했던 것을 자세히 자책했으며 ‘영혼은 천상에 오르니 희고 깨끗하여 / 꽃 아래서 놀고 있으리라’라는 시로 마무리했다. 둘째 딸 효순이의 죽음을 슬퍼한 [유녀광지]에서는 아이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기도 했다. “그를 부를 때의 권설음 때문에 음이 전하여 ‘호동’이 되었다. 조금 컸을 때는 감아 빗는 머리가 이마를 덮어 늘어진 품이 게의 촉수와 같았다. 그러므로 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다시 한글로 ‘게압발’이라 불렀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4남 삼동의 [유자삼동예명]에서는 “나면서부터 정수리에서 이마까지 뼈가 볼록 튀어나와 모가 져서 ‘복서’라고 불렀다. 이것은 나하고 비슷한 모양이나 나보다 더욱 크다…슬프다. 종 돌이를 시켜 광주 초부의 조곡에 묻게 하였다가 이듬해 봄에 두척의 기슭에 옮겨 묻었으니, 이곳은 증조부의 묘지 근처이다”라고 슬퍼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은 잃은 슬픔에 지쳐 다산은 삼동을 위한 시에서 “구름 속은 천리만리 멀기도 하여 /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라고 애통하게 울부짖었다.

제5부는 시아버지 다산과 작은며느리 청송 심씨의 애틋한 정을 다룬다. 청송 심씨는 명문가의 자녀로 다산의 가문에 시집 와서 둘째 아들 학유의 아내가 되었다. 유난히 살갑게 시어머니를 대해 집안 식구들과 잘 지내지 못했던 시어머니의 유일한 벗이었다. 다산이 유배에서 돌아오자 며느리의 무덤엔 벌써 풀이 묵어 있었다. 시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이 며느리는 유순하고 침착하고 삼갔다. 시어머니를 어머니처럼 섬기고 시어머니를 어머니처럼 사랑하여 같은 이불에 참자고 먹다 남은 것을 먹으며, 18년 동안 서로 목숨을 의지하고 살았다. 시어머니가 병이 많아 겨울밤에 설사를 10여차례나 하였는데, 효부는 번번이 일어나 따라 나와 측간에 가는 일을 돕고 그 신음하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비록 눈보라가 치는 매서운 추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며느리에 대한 다산의 마음도 각별하여 “18년 동안 서로 목숨을 의지하고 살았다”는 표현을 묘지명에 썼는데 이 표현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며느리가 시집에서 보낸 세월은 16년하고 몇 개월이지만 다산은 어째서 18년이라 했을 까. 이는 다산이 며느리를 보던 1800년 봄에 세로의 위험함을 알고 벼슬을 사직한 후 초천 별장으로 낙향했다가 유배를 받아 경상도 장기 땅으로 떠날 때까지 며느리의 봉양을 받은 1년의 시간을 합산한 것이다.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 다산의 배려가 이처럼 섬세했다. 다산은 며느리 청송 심씨를 위한 시에서 “시아버지를 겨우 한 해를 섬겨 / 나는 그 어짊을 알지 못하지만 / 네 시어머니 열아홉 해 섬겼으니 / 시어머니는 네가 가련하다고 하네”라고 했다.

제6부는 자신의 학문적 뒤를 이을 재목이라 여겼던 조카 학초와 학수를 잃은 슬픔을 묘지명을 통해 읊은 다산의 애끓는 인생을 조명하며 ‘아버지 다산’의 대단원을 짓는다.
정학초는 다산의 둘째 형 정약전의 아들로, 어릴적부터 총명하여 “6~7세에 이미 서사書史를 읽고 그 득실을 의논할 줄 알았다”고 한다. 학초는 공부하다 의문점이 생기면 편지에 적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귀양에 처해진 곳에 보냈는데, 다산은 이런 조카를 무척 사랑했다. 그리하여 강진으로 내려오게 하여 아버지가 있는 흑산도로 보낼 요량이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다. 이는 다산이 흑산도에 있는 둘째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내가 유배된 이후로 저술한 육경, 사서에 관한 학설 240권은 학초에게 전하려 하였더니 이제는 그만이로다”라고 슬퍼했다.
정학수는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맏아들로 2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다산은 “학수는 문자를 좋아했고, 문장을 정성껏 다듬어 기록하였는데, 모두 소쇄하여 탈속하였다”라며 그의 재능을 높이 샀다. 또한 “사촌형들과의 우애가 동복형제와도 같았고, 사람됨이 관후하고 평이하며 남을 포용하는 아량이 있었다”고 그 사람됨을 칭찬했다. 다산은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오기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다산에게는 자신의 학문을 물려줄 유일한 후세였는데 이토록 허망하게 잃고 말았으니 그 슬픔이 어땠겠는가. 이어지는 묘지명에서 다산은 “아, 애석하도다. 그가 남긴 시편과 묵은 글씨 가운데 집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안 되는데 모두가 놀랄 만큼 청아한 시구에 힘찬 글씨로 조금도 궁색하거나 위축된 기미가 없었다. 이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가문이 쇠퇴하고 시운이 비뚫어졌으니 무슨 방법으로 이 아이를 보전하랴”고 애통해했다. 그리고 시를 남겼는데 “문채 있는 사람은 혹 경박하고 / 돈독한 사람은 질박하기 쉽다 / 문채 있고 돈후하니 / 범이나 표범의 문채요 털을 뽑아낸 가죽일 뿐만 아닐세 / 듣지 않고도 깨닫는 것을 슬기롭다 이르고 / 막아도 전진하는 것을 확고하다고 이른다 / 이러한데도 그를 잃어버렸으니 / 우리 집안의 손실이다”라고 하였다.

목차

제1부 살아남은 자식들의 아버지

-폐족의 생존법을 가르치다
· 술은 이렇게 마셔라 · 폐족에게 학문이란 무엇인가 · 서울 10리 안에 거주하라
· 과거를 준비하고 경제를 파악하라 · 가문을 중흥시켜라 · 성인, 문장가, 선비의 길

-사대부의 생활 경영
· 개노주의, 예외 없는 노동 · 잠상을 7층으로 올려라 · 전략적인 영농의 다각화
· 농사와 글은 반드시 병행하라 · 삼금三禁-돈놀이, 상업, 약장수 · 의원 노릇을 하지 마라

-학문 전승의 꿈
· 자질이 있으니 정진하라 · 독서가 애비를 살리는 길이다 · 나의 역사를 너희에게 맡긴다
· 이 두 책만은 버릴 수 없다 · 지음知音이면 지체없이 섬겨라 · 백성의 윤택과 사물의 육성
· 현실주의와 실용주의 교육

제2부 가난한 아버지의 슬픈 도덕 

– 훔친 호박으로 끓인 죽
· 책을 팔아 생계를 꾸리다 · 옷 한 벌로 4개월을 버티다 · 귀양지로 밤을 보내온 아들
· 굶주려서 투호를 판 홍씨 부인 · 마늘 팔아 아버지 면회 온 큰아들
· 수염이 덥수룩한 둘째 아들 · 꿈에서 미인의 유혹을 물리침

제3부 6남 3녀를 낳은 다산한 아버지 

– 열다섯에 결혼하여 6남 3녀를 두다
· 죽은 애가 산 애의 두 배 · 생후 나흘 만에 죽은 첫딸 · 시문과 의술이 뛰어난 장남 학연
· 「농가월령가」를 지은 차남 학유 · 천연두와 싸우다 요절한 3남 구장
· 22개월 만에 요절한 둘째 딸 효순 · 방산 윤정기를 낳은 셋째 딸
· 22개월 만에 요절한 4남 삼동 · 생후 열흘 만에 요절한 5남 · 간장이 끊어지는 참척, 6남 농아

제4부 요절한 자녀의 묘지명을 쓴 아버지 

– 너무나 인간적인 슬픔
· 참회를 토로한 「유자구장광명」 · 애한을 그린 「유녀광지」
· 참척을 시로 쓴 「유자삼동예명」 · 통한이 서린 「농아광지」
· 위대한 학자이기 전에 정 많은 아버지

제5부 며느리의 효심을 뒤늦게 듣다 

– 요절한 자부에 대한 시아버지의 정한
· 스물아홉의 애틋하고 슬픈 삶

제6부 작은아버지 다산 

– 네 분의 어머니와 가족 이야기
· 서모의 은혜를 잊지 못한 다산 · 형제와 조카들
· 학초의 묘지명을 쓴 작은아버지 · 학수의 묘지명을 쓴 작은아버지

미리보기

술은 이렇게 마셔라

1816년이면 유배된 지 16년이 지난 시점이라 다산 부자는 유배지에서 술상을 두고 대화할 만큼 삶의 여유를 찾고 있었다. 아버지는 결혼하여 자식까지 않은 큰아들 학연에게 숭상을 차려주었다. 고작 나물에 탁주였겠지만, 학연은 눈물이 났으리라. 술은 부모에게 배우는 것이라 했거든, 학연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이제 나이가 들 만큼 들어서 아버지가 따라준 술을 받으니 그 감회는 슬픔인가 기쁨인가. 부모 앞에서 마시는 술은 긴장해서 취하지 않는다. 학연의 모습은 다산에게 술이 센 것으로 인식되었다. 아들이 아버지가 쳐놓은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다산은 차남 학유가 술을 잘 한다는 소리가 들려오던데 주량이 얼마냐고 물었고, 학유의 주량이 학연의 주량 “2배도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술을 좋아한다는 것은 학문하는 자의 성벽이 아니고, 다산이 그토록 경계해왔던 음풍농월하는 시인들의 기질이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글공부에는 이 애비의 성벽을 계승하지 않고 술만은 이 애비를 넘느냐.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다”라고 개탄한 다산은 이어서 자신의 주량을 밝혔다.

_23~24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김상홍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금산동중 졸업 후 우재愚齋 유인택 柳寅澤 선생 문하에서 4년간 한문 수학. 공주고와 단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고려대학교에서 논문 「다산 정약용 문학연구」로 문학박사 취득. 1978년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로 부임 후 교무처장, 사범대학장, 교육대학원장, 대학원장, 부총장 역임. 현재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 초빙교수

교육부 교육과정심의위원회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자문위원, 한국한문교육학회장, 한국한문학회장, 법제처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위원회 위원 역임. 반부패 청렴교육 전문 교수로 중앙공무원교육원, 국가청렴위원회, 교육과학기술연수원, 국세공무원교육원,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 법무연수원 등에 출강중.

저서로 『다산 시선집 유형지의 애가』, 『다산 정약용 문학연구』(제18회 문화공보부 추천도서), 『한국 한시론과 실학파 문학연구』, 『다산학 연구』, 『다시 읽는 목민심서』, 『한시의 이론』, 『중국 명시의 향연』, 『한국 한시의 향기』,『다산 문학의 재조명』(2004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조선조 한문학의 조명』(2004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다산의 꿈 목민심서』(조선일보 2007 ‘거실을 서재로’ 8월의 도서, 대한출판문화협회·한국출판문화진흥재단 2007 올해의 청소년도서), 『꽃에 홀려 임금을 섬기지 않았네』, 『다산학의 신조명』 등이 있음.

일석학술상(1987), 모범스승상(1999), 연구업적상(1999), 서울시교육공로상(2002, 2010), 교육공로상(2003), 다산학술상 학술대상(2003), 한국노동교육원 2007년도 최우수 강사상, 서울특별시인재개발원 2007년도 유공 강사상. 옥조근정훈장 수훈(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