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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인문학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
  • 지은이 | 김영민
  • 옮긴이 |
  • 발행일 | 2009년 08월 14일
  • 쪽   수 | 352p
  • 책   값 | 15,000 원
  • 판   형 | 140*205
  • ISBN  | 9788993905045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철학자 김영민의 비평으로서의 영화읽기
어울림, 어긋남을 품은 영화 27편에 대한 숨 막히는 통찰
철학적 내용 이해를 도와주는 개념어집과 용어집 수록!

1. 왜 [영화인문학]인가?

“너무나 세속적인 매체인 영화에서
인문학의 진지함을 읽어내고 구제하려는 시도”

철학자 김영민은 인문학의 미래 형식을 목하 고민 중이다. “장렬하게 지는 게임”이라는 다소 영웅적인 문구로 인용되기도 하는 그의 인문학은 2008년에 나온 [동무론]에 그 방법론의 요체가 담겨 있다. 이 책 [영화인문학: 어울림의 무늬, 혹은 어긋남의 흔적]은 영화를 매개로 삼아 그가 주장하는 人紋學의 한 가능성을 드러내고자 한 실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운위되는 이른바 ‘학제간 연구’가 국가의 그늘과 자본의 토양에서 학문권력의 재분배에 몰두하는 ‘사이비 통합’의 연극일 뿐이라는 점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다. 수많은 칸막이방을 지닌 인공의 고층건물을 다시 뒤섞는다고 해서 그 인공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뭘 하든 간에 보통의 사람들은 대체로 체계에 흡수되고, 조각나고, 칸막이방에 갇혀서 주어지는 환상을 받아먹고, 그것을 짜깁기하며 살아간다. 김영민은 좀더 발본적인 탐문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온몸을 던져 기존의 형식과 문법을 걷어내고 스스로의 형식을 만들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식이다.
그런 그가 상업주의에 포박된 영화 매체와 ‘관계’를 맺으려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지 문화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여타의 이미지 장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압도적으로 대중을 지배한다. 최근 개봉된 지 열흘 만에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해운대]가 가장 가까운 사례다. 제작비 2억 달러(2천5백억 원)를 쏟아부어 최근 전세계적으로 8억 달러의 흥행고지를 돌파한 [트랜스포머2]와 같이 돈 냄새 제대로 맡은 자본의 체계와 가장 열렬하게 속궁합을 맞추고 있는 매체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영화에 “인문학이 매섭게 선손을 걸며 개입”을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라는 것이 [영화인문학]의 한 출발점이다.
또한 영화는 저자가 보기에 자본제적 삶의 양식에 얹혀 있는 볼거리사회, 모의사회, 거울사회, 소문과 고백의 사회 등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특히 ‘대중의 영화보기’는 영화를 상업적 코드 속으로 회수하는 이 시대의 유력한 ‘증상’이다. 여기서 ‘증상’이란 그에 따르면 말하고 싶은 것을 잘못 말하는 것인데, 김영민은 ‘비평’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증상을 뚫어내 다시/고쳐 말하는 재서술의 천공술穿孔術을 선보인다.
또 하나는 왜 ‘영화비평’이 아니라 ‘영화인문학’인가이다. 그것은 전문 분과주의나 장르주의적 글쓰기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어느 특정한 매체에 특권적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목의 자리에서 ‘비평’을 끌어내리고 대신 ‘인문학’을 얹어놓은 것은 ‘영화비평’이라는 상업 시스템에 기생하는 룸펜을 매섭게 꾸짖는 의미도 담겨 있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이 책은 새로운 영화비평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에 “시속의 유행이나 대중의 취향을 버르집고 따져 그 이치들의 맥을 잡고 거기에 틈타는 구조와 체계를 유형화시키며 이로써 외부성의 희망을 조형해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 일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경제사회학적 토대에 관한 이해에서부터 정신분석학적 증상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는 가운데 완수된다.

 

2. 지난 30여년 한국 영화가 만들어낸 ‘빛나는 통찰’ 한자리에

이 책은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에서부터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까지 총 27편의 한국영화를 다루고 있다. 우선 외화外畵가 없다는 것이 눈에 띈다. 그 이유가 책에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한국 영화야말로 한국에서의 삶과 그 속의 상처를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라는 점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30여 년에 걸친 문제작들이 뽑혀 있지만, 도발적인 메시지와 영화미학으로 간주되곤 하는 ‘김기덕’이라는 아이콘은 빠져 있다. 즉, 누구나 인정하는 그러한 기준에 따라 영화가 선별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주제인 ‘어울림의 무늬나 어긋남의 흔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영화를 저자가 선별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최근의 영화에서 점차 과거의 영화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마치 이창동 감독이 “새천년을 앞두고 우리 현대사가 출발했던 시간을 되짚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박하사탕]의 내러티브를 만든 것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사를 한번 쭉 훑어 내려가면서 의미 있는 풍경들을 다시 정리하고 갈무리해보자는 의도가 읽힌다. 당연히 이 작업에는 그 영화가 만들어졌던 시대와의 긴밀한 호흡이 따라줘야 한다. 그 시대를 해석하고 그걸 영상언어로 만들어낸 이는 바로 감독이기에 각 장에서 글을 시작하기 앞서 감독에 대한 설명을 앞세운 것도 바로 그 의미다. 그것이 바로 이 책에 글모음을 넘어서는 통시성과 맥락을 부여해준다.

 

3. ‘빽빽한 빛’에서 ‘하아얀 의욕’까지
촘촘히 읽는 가운데 부풀어 오르는 ‘인문에로의 의지’

이 책에서 소개되는 첫 번째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밀양](2007)이다.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나라를 통째로 줘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듯, 김영민에게 [밀양]은 “[인디아나 존스] 따위의 영화 30개와도 바꿀 수 없는 수작”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종교를 통한 용서’를 나르시시즘의 한 형식으로 정면으로 규정한 다음 그것의 가면을 벗기고 있으며, 진정한 용서는 상처와 상처가 만날 때만 가능하다는 인간적 진실에 도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에 결구結句가 있듯, 영화의 결말에서 빽빽하게, 하지만 한시적으로 빛이 한 곳에 모이는[밀양密陽] 영상을 통해 예술의 경지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가 초대하는 ‘용서’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이 영화의 전반부는 주인공 신애信愛가 자식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는 부분까지다. 저자는 흔하디흔한 이름 信+愛에서부터 “신을 믿으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다”는 종교적 나르시시즘을 읽어낸다. 자신의 아들을 성추행하고 죽인 장본인을 용서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신애는 그를 용서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며, 자신이 원하는 바라는 단계로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신애를 용서의 강박으로 내몰았던 그 신은 유독 신애만의 신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당신을 용서한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신을 통해 용서를 받은” 죄인 앞에서 신애의 의도는 좌절하고 그 충격으로 그녀는 실신하고 만다.
저자는 이 실신이 신애가 “꿈에서 깨는 장면”이며 “자신을 관념적으로 보호하고 변명하던 나르시시즘의 거울방에서 떨쳐 나온” 계기가 된다고 본다. 하지만 종교적 나르시시즘은 견고하다. 균열이 생긴 채로 그것은 계속 유지된다. 신애는 자신의 용서를 가로챈 신에게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다시 신에게로 나아간다. 저자가 [밀양]을 용서와 구원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수작으로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처음엔 용서의 가능성을 보고 신과 함께 웃었던 신애는 이제 신과 함께 울고 있다. 하지만 무릇 억압된 것은 증폭되는 법이고, 용수철을 많이 잡아당길수록 그 되쏨의 탄성은 커지는 법이다. 결국 돌아온 신애는 죄책감의 정점에서 자해하기에 이른다.
[밀양]에서 신애의 출로는 신이 아니라 살인자의 딸로 제시되어 있다. 살인자의 중3 딸은 일탈을 거듭하다가 학교를 때려치운 채 미장원에 취직한다. 이웃주민으로서 살인자의 딸의 일탈과정을 지켜보던 신애는 자해하고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미장원 앞을 지나가다 그 딸을 본다. 신애는 살인자의 딸에게 자신의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맡긴다. 저자는 그 때야말로 용서의 빛이 빽빽하게 응결[密陽]했다고 판단한다. 상처(신애)가 상처(딸)를 만나 상처의 일부(머리카락의 절반이라도)를 흘려보낼 수 있었기 때문일까. 그 빽빽하게 응결하면서도 그늘이 져 있고, 바람 따라 흔들리는 불안한 빛, 용서인지 용서가 아닌지도 불분명한 그 미완성의 빛이 바로 인간적인 용서의 실체인 것일까? 요체는 용서를 매개해주는 대상이 ‘신’이 아니라 ‘인간’(딸)이라는 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가 이 책의 첫 작품으로 [밀양]을 다루면서 ‘인문학의 몸통 혹은 꼴’(삶의 온갖 결에 스쳐 상처 나면서도 건너뛰지 않고 초월하지 않고 빽빽한 빛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면, 이 책의 마지막 작품으로 [바보들의 행진](1975)을 다루면서 “지는 싸움”을 추구하는 인문학이 상정하고 있는 어떤 이념형을 제시하고 있다.
1960~70년대 세계혁명의 거대한 조류의 여파는 일본에서 그쳐버렸다. 김일성과 박정희가 적대적 공생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한반도에는 강 건너의 소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엄혹한 군사독재는 철학과 학생들의 입에서 “고래 잡으러 가자”는 엉뚱한 소리를 불러낸다. ‘역사’를 숨겨야만 ‘역사’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에서 동해바다 속의 ‘하아얀’ 고래는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서의 상상력이 집결하는 지점으로 ‘고안’된다.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체계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그 모든 가욋사람(아웃사이더)들을 견인하는 눈부신 푯대와도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카뮈의 백색 글쓰기나 안정효식의 ‘하얀(전쟁)’과도 다른 인간의 근원적 열정/수난의 층위에서 이념의 저편으로 묵묵히 걸어나가는 보행의 빛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당대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인문적 삶의 양식, 그리고 이념의 색깔들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산책과 연대의 태도를 일컬어 ‘하아얀 의욕’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하아얀 의욕의 행로가 하아얀 고래를 찾아나서는 철학적 바보들의 길, 현명한 동무들의 길이라는 점도 서술한 바가 있다고 밝힌다. 그리고 지금-여기서 저자가 실천하고 있는 ‘동무들의 산책’은 과거의 그 ‘바보들의 행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획이라는 점도 밝혀두고 있다.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영화가 이 책의 가장 말미에 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김영민이 이 책에서 영화를 다루는 방식과 그 내용은 한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판하거나 답을 도출해내는 성격의 글이 아니라, 글 전체를 꼼꼼히 겪어내면서 서서히 차오르는 인문학적 열망과 통찰을 체험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전제한 뒤 그 밖의 영화들이 살펴지는 풍경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이윤기 감독의 [타인의 삶]에서는 “타인은 템포”라는 점을,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서는 “진리라는 것은 아프고 낯설고 기괴한 것이라는 주제의식”을,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에서는 “사랑과 혈연으로 무장한 가족의 배타적 동일성이 주는 이익은 단기적이며 우연적이고 경험적(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읽어낸다.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는 “관리되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있는 조직은 이미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군대나 공장이라는 남성적 체계의 각박한 노동과 그 상처를 잊거나 치유하는 가장 통속적인 방식은 여자의 ‘살’”이라는 점을,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에서는 “허영, 변덕, 냉소의 삼위일체로 드러나는 ‘모방하는 욕망’의 드라마”를, 민병국 감독의 [가능한 변화들]에서는 “상처는 곧 어리석음”이라는 아도르노의 전언을 되새긴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는 “애인의 성기를 왼손으로 쥔 채 오른손으로 그의 순정을 잡았다고 생각한 이들과 왼손으로 제도를 쥔 채로 오른손으로는 양심이라는 최상급의 가상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유사성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일상의 평균치(하이데거)만을 관성적으로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속인들이, 평균치라는 바로 그 소박한 겨냥 탓에 오히려 나날이 평균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세속”이라는 사실을,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는 “인간은 음탕해지면서 성장한다는 것”을,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 바로 그것만이 폭력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점을 살피고 있다.

목차

머리글

첫번째 이야기 [밀양] – 용서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불가능한 용서 | 세속, 그 ‘의도’의 불모 | 상처는 상처를 본다

두번째 이야기 [아주 특별한 손님] – 타인의 삶
지혜, 혹은 ‘돌아/다녀오기’ | 되돌아온 낯선 자아, 그 ‘아주 특별한 손님’ | 나는 영영 ‘스스로’ 바뀔 수 없다

세번째 이야기 [괴물] – 진리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왜 진리는 낯선 것이 되는가 | 괴물, 혹은 ‘진리의 귀환 형식’

네번째 이야기 [가족의 탄생] – 가족, 혹은 어긋남의 자리
가족은 마냥 ‘자연’스러운가 | ‘노릇’이 아닌 ‘버릇’으로 맺는 관계 | 가족, 그 손가락들이 어긋나는 자리

다섯번째 이야기 [달콤한 인생] – 진짜 이유가 뭐죠?
돌이킬 수 없이 | 진짜 이유, 혹은 ‘빈 중심’ | 체계의 노동 대 정서의 노동 | 진짜 이유? 무지(에의 의지)!

여섯번째 이야기 [용서받지 못한 자] – 침묵 속에서 ‘나라’를 지키다 74
저항의 비밀, 그 ‘바닥없음’ | ‘체계의 노동’과 여자의 ‘살’

일곱번째 이야기 [극장전] – 허영의 주체
허영이라는 원죄原罪 | ‘허영, 변덕, 냉소’의 삼위일체 | 나(너)는 과연 너(나)로부터 배우려고 하는가

여덟번째 이야기 [가능한 변화들] – (불)가능한 변화
‘처음’이에요 | 은폐된 정서의 고향 | 오직 네 ‘버릇’만이 네 ‘진실’일 뿐

아홉번째 이야기 [바람난 가족] – 당신, 아웃이야!
새로운 불화의 가능성 | 체계와의 지속 가능한 창의적 불화

열번째 이야기 [와이키키 브라더스] – 세속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리도 ‘피로’한가 | 추억과 선의로 결연한 ‘친구’(브라더스)도 세속의 저편이 아니다 | 어떤 희망도 진보도 ‘생각’ 속에는 없는 것!

열한번째 이야기 [고양이를 부탁해] – 스무 살의 이유, 그 이상의 이유
스무 살, 아버지의 집을 떠나다 | 영혼이 따라잡을 수 없을 만치 빠른 속도로 자라는 몸 |

열두번째 이야기 [복수는 나의 것] – 복수는 너의 것
의도는 외출하지 못한다 | ‘내’가 모르는 수많은 ‘너’로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

열세번째 이야기 [거짓말] – 똥은 무섭다
‘깊은 거짓말’ 혹은 치명적인 사실 | ‘누가’ 자연스러움을 결정하는가 | 니기미 좇도 막 나가니까 오히려 ‘자연’스럽다

열네번째 이야기 [8월의 크리스마스] – 봄날은 간다
무상한 시간 | 사진, 혹은 인생의 근원적 형식을 일깨우는 양가적 매개 | 쾌락은 무지에 기댄다

열다섯번째 이야기 [학생부군신위] – 삶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을 겪어내는 것? 그게 다 사람 사는 것! | 시신의 지위는 어떠한가 | 오직 ‘반복’일 뿐인 삶

열여섯번째 이야기 [넘버3] – 건달은 누구인가?
불한당, 21세기 자본주의의 꿈 | 불한당의 역사적 계보 | 조폭, 혹은 자본주의의 고중세적 판타지

열일곱번째 이야기 [서편제] – 전통문화, 앓음다움을 넘어서
‘소리’란 무엇인가 | 서편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인문학의 운명

열여덟번째 이야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전태일, 혹은 무능의 급진성
진실에 대한 공포 | ‘상실의 지혜’를 어떻게 자기화할 수 있는가

열아홉번째 이야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파리대왕을 죽이는 법
동물과 아이 | ‘선(량)한 개인’의 딜레마 | 체계의 건강은 가욋사람들의 비판적 연대에 기댄다

스무번째 이야기 [하얀 전쟁] – 이야기냐 자살이냐?
이야기(글쓰기)란 무엇인가 | 실재의 귀환

스물한번째 이야기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새와 소
episode | 두 가지 공부길 | 사랑하므로 죽인다 | 비우면서 살린다 | 새에서 소로

스물두번째 이야기 [기쁜 우리 젊은 날] – 기다리는 자와 떠나가는 자
불멸하는 사랑, 그 통속이라는 반무지半無知 | 기다리는 일, 혹은 사치와 낭비 | 떠나가는 일, 혹은 여자의 특권

스물세번째 이야기 [자녀목] – 여인의 길, 혹은 겹의 이중구속
경험, 그 약자들의 영원한 텃밭 | 겹의 이중 구속

스물네번째 이야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난쟁이의 꿈
난쟁이라는 존재의 표지 | 난쟁이의 자리는 대체 어디인가 |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꿈’

스물다섯번째 이야기 [이어도] – 천남석의 자손들
환상, 혹은 인간 존재의 밑절미 | 희생양

스물여섯번째 이야기 [영자의 전성시대] – 창녀의 사랑, 때밀이의 사랑
낭만적 사랑, 그 환상의 계보 | 상처는 어리석음이다

스물일곱번째 이야기 [바보들의 행진] – 하아얀 고래, 하아얀 의욕
풍경은 기원을 은폐한다 | ‘바보’와 ‘고래’의 탄생, 그 풍경의 기원 | 하아얀 의욕, 그 묵묵한 수행적 근기

개념어집
고백과 소문 | 동무 | 친구 | 동지 | 동무 | 듣기 | 몸을 끄-을-고 | 물듦 | 부사적 태도 | 비평 | 사랑 | 산책 | 상처 | 생각 | 세속 | 신뢰 | 알면서 모른 체하기 | 약속 | 의욕 | 인문人紋 | 자서전적 태도 | 죽어주기
한글용어집 ㄱ~ㅎ

미리보기

내 집에서 나오면 곧 ‘송강호 거리’라고 쓰여진 간판이 전봇대 높이 걸려 있고, 잠시 걸어 오르면 종찬이 일하던 그 카센터가 여전히 영업중이다. 종찬은 극히 흥미로운 캐릭터이고, 신애 역에 지지 않는 주인공이다. 종찬은 의 종두(설경구)와 더불어 한국 현대 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남성 연기의 풍경을 이룬다. 종찬이 다만 세속적 욕망에 응해서 신애를 선택적으로 주목했고, 일반자 一般者 중의 한 매력적인 개체를 제 나름대로 소유하려는 것인지, 혹은 신애와의 만남 자체로 그 자신의 존재와 삶의 양식이 뒤바뀐 것인지는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용서의 빛’에서 바라본 종찬의 역할은 의외로 미미하고, 그가 신애에게 바치는 충실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_24~25쪽

 

영화 에서 아이를 잃은 신애信愛(!)가 상실과 자책의 고통과 대면하는 가운데 나르시시즘에 빠져가는 장면들은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나르시시즘은 외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모습을 취하며 깊어간다. 여기서 종교는 결정적인, 그리고 거의 유일한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종교란 사랑과 더불어 대표적인 나르시시즘의 형식이다. 실존의 고독과 고통 속에서 종교에 의탁하는 신애는 제 마음대로 신神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그 의지를 자신의 원망怨望과 동일시 한다. 그러고는 그 용서의 무대,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해야 하는 비극적이며 영웅적인 무대에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물론, 바로 이것(‘자신을 상상적 무대 위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반복적 재연의 형태’)이야말로 우리가 사용하는 ‘환상’이라는 용어의 가장 일반적인 용례다.

_21쪽

 

병태가 찾아서 떠난 동해바다 속의 ‘하아얀 고래’는 현실을 바꾸는 힘으로서의 상상력이 집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 영화 속의 일차적 맥락을 떠나서 보더라도, 생활세계의 가시적 지평을 통히 지배하고 있는 체계를 벗어나려고 애쓰는 그 모든 가욋사람들을 견인하는 눈부신 푯대와도 같은 것이다. ‘하아얀’이란 형용어는 가령 사르트르가 카뮈의 탈정치적 글쓰기를 지목해서 말한 그 ‘백색(글쓰기)’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뉴턴의 흰색과 안정효식의 ‘하얀(전쟁)’과도 다른,인간의 근원적 열정/수난Passion의 층위에서 이념의 저편으로 묵묵히 걸어나가는 그 보행의 빛과 같은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당대적 체계와 생산적으로 불화하는 인문적 삶의 양식, 그리고 이념의 색깔들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산책과 연대의 태도를 일러 ‘하아얀 의욕’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이 하아얀 의욕의 행로가 하아얀 고래를 찾아나서는 철학적 바보들의 길, 현명한 동무들의 길 이라는 점도 공들여 서술한 바 있다. 물론, 이 ‘동무들의 산책’은 ‘바보들의 행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획이었다.

_309~310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김영민

철학자, 한신대 교수. 『서양철학사의 구조와 과학』(1992) 『현상학과 시간』(1994) 『컨텍스트로, 패턴으로』(1996)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1996)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글쓰기와 철학』(1998) 『보행』(2002)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 『산책과 자본주의』(2007) 『동무론』(2008) 『영화인문학』(2009) 『공부론』(2010) 『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2011) 등 24권의 단행본을 썼다. 그간 세 차례 대학에 초청받았고 세 차례 사직하였으며, 다시 2011년 봄학기 부로 한신대학교에 초청되었다. <장미와 주판>(1992~2009), <문우인>(2009~), <금시평산회>(2009~), 그리고 <인문연대 금시정>(2007~) 등의 인문학술 공동체 운동에 줄곧 간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