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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의 탄생 의정부에서 도화서까지 관청으로 읽는 오백년 조선사
  • 지은이 | 김문식 노경희 문중양 배우성 이민주 이익주 이현진 정승혜 황정연 서울학연구소
  • 옮긴이 |
  • 발행일 | 2015년 07월 20일
  • 쪽   수 | 315p
  • 책   값 | 19,000 원
  • 판   형 | 160*220
  • ISBN  | 9788967352295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정치적 균형을 잡기 위해 줄타기를 하다, 의정부와 육조 
조선시대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정치기구는 의정부와 육조였다. 의정부는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을 주축으로 하며, 육조는 이·호·예·병·형·공조의 여섯 가지 조직으로 이뤄져 있다. 사실 이 두 기관은 중국 당나라에서 먼저 발전했다.
당나라에서 시행된 3성 6부제는 조선의 것과 형태가 조금 달랐다. 3성에는 정책을 입안하는 중서성, 심의하는 문하성, 집행하는 상서성이 있었다. 6부는 문신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 재정을 맡는 호부, 제사·의례와 외교 및 교육을 처리하는 예부, 국방 및 무신 인사의 업무를 다스리는 병부, 사법을 관련된 업무를 부담하는 형부, 토목사업을 집행하는 공부로 나뉘어져 있었다. 고려는 건국 당시 정치제도를 정비하면서 이미 멸망했던 당나라를 모범으로 삼았다. 대신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고 고려 나름의 해석을 도입했다. 권력을 분산시켜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원나라의 등장으로 3성 6부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원나라는 고려의 정치제도가 중국의 정치제도와 비슷한 것을 트집 잡았고, 정치제도를 새로 개편하도록 했다.
고려 멸망 뒤 세워진 조선은 새로운 정치제도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의정부와 육조였다. 3성이 폐지된 한편 육조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졌다. 하지만 의정부의 역할이 명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시기에 따라 의정부와 육조의 위치가 달라졌다. 태종이 육조직계제를 만들어 왕권을 강화시켰던 것과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었던 문종과 단종대에 의정부의 역할이 비대해졌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의정부와 육조는 마치 천칭과도 같았다. 그 사이를 잘 조율하는 역할은 왕에게 있었다. 이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결국 조선 후기에 비변사라는 새로운 권력기구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비변사의 등장으로 의정부·육조의 권력은 약해져갔다. 이는 왕권 역시 약화되었음을 뜻한다. 그 뒤 갑오개혁이 일어나 500년을 이어져 내려온 의정부와 육조 제도는 역사의 뒷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가깝고도 먼 권력기구, 비변사 
비변사는 막강한 인사권을 행사했던 기구다. 최종 인사권자는 물론 왕이었지만, 후보자를 뽑아 올릴 권한은 비변사에게 있었다. 이들은 국방과 재정, 또 암행어사처럼 특수한 임무를 띠는 주요 관직에 대한 추천권을 가졌다. 사실상 거의 모든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비변사는 국정 문제 대부분을 처리했다. 지방에서 올린 지역 현안을 정리해 왕에게 보고하거나 재가를 받아 시행했다. 그런 까닭에 득세하는 세력은 저마다 비변사를 장악하려 애썼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했던 안동 김씨 역시 비변사를 오랫동안 장악했으며,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가장 먼저 비변사부터 개편한 데서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비변사는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정부기구다. 하지만 조선 왕조는 비변사를 궁궐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정확한 위치는 파악하기 힘들지만, 광해군 때까지는 주요 관청들이 배치되었던 육조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터를 남산으로 옮겼다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뒤에는 각각 동궐과 서궐에 가까운 위치에 청사를 두 곳 설치했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정무 과정이 지연되고 국가 기밀이 누출되는 일도 발생했다. 또 청사가 두 군데이다보니 빈 비변사 관청을 사대부들이 남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왕조 내내 비변사가 궐 안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유교를 깊이 숭상하던 왕조가 비변사라는 직접적인 권력기구를 들이는 데 아마 불편함을 느꼈을 듯하다.

 

계급사회 조선의 현실을 드러내다, 내의원·혜민서·활인서
조선에서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기관은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 이렇게 총 네 군데였다. 여기서는 양반 이상의 신분을 담당했던 전의감을 제외하고 세 기관을 다룬다. 내의원은 최고 실력의 의원들로 구성돼 왕실 의료를 담당했으며, 혜민서는 도성 내 거주민을, 활인서는 도성 밖 거주민을 구료했다.
내의원 관사는 두 군데에 위치해 있었다. 창덕궁에 본청이 있었고, 경희궁에도 따로 두었다. 내의는 의과에 합격해 추천된 사람들로 총 12명으로 구성되었다. 1년에 두 번 인사고과를 거쳐 승진 여부를 판가름했다. 그 외에 침의라고 하여 침구를 놓는 의원을 따로 12명 선발했다. 의약동참이라는 이들도 12명 있었는데, 의술이 뛰어난 사대부나 일반인을 이 자리에 임명했다. 이들은 의과에 합격하지 않은 상태에서 활동했다. 어의는 내의 중에서 특출한 이들을 가려 뽑았다. 어의의 인원수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혜민서는 고려시대에 혜민국을 그대로 이어받은 곳이다.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병원보다는 약국에 더 가까웠으며, 국가 재원으로 구매한 약재들을 도성 내 백성에게 팔았다. 그러나 이후 역할이 확대되어 약국의 기능뿐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의원의 기능도 맡게 되었다. 의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의 기능도 수행했다. 각 마을의 여종 가운데 영리한 자 70명을 뽑아 올리게 해서 그들에게 의학 지식을 가르쳤다.
활인서는 병든 사람을 모아두는 의료 기관이었으나 실상은 격리 시설에 가까웠다. 그런 까닭에 조선 후기에는 활인서活人署 대신 사인서死人署라 불리기도 했다. 종종 무당을 통한 주술 치료도 행해졌다. 유교 국가에서 무당은 용납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징수하는 세금이 활인서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기에 국가는 그들의 행위를 묵인해주었다. 활인서의 위치는 조선시대 내내 조금씩 변해왔다. 하지만 비변사가 궐내로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활인서도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도성 내에 들였다가 병자가 모여들면 질병이 쉬이 퍼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숨겨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계급·지역 차별의식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활인서는 도성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했고, 이에 따라 두 곳은 명백히 다른 차원의 장소로 인식되었다. 도성 안팎을 구분하는 또 다른 입구였던 것이다.

 

악공들의 피땀으로 예악정치를 이루다, 장악원
장악원은 조선의 궁중음악 전문 기관이다. 이곳에 소속된 이들은 왕실 의례에서 음악 연주를 담당했다. 특히나 높은 노동 강도에 시달린 것으로 유명했는데, 제례악만 해도 1년에 열 번을 연주해야 했다. 장악원을 관리하는 관직으로는 장악원 제조가 있었다. 이 자리에 음악 전문인을 임명하진 않았다. 음악적 자질은 보되 일반 문신에게 겸직케 했던 것이다. 음악 전문인이 오를 수 있는 최정점은 전악으로, 음악과 관련해 총체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음악 감독 및 노래와 무용을 지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악기 구입, 악기 재료 선별, 연주 기법 전승, 연주자 배치 주관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시행되었다.
전악 밑에는 악기 연주를 담당하는 악생과 악공들이 있었다. 이들의 업무는 과중했고, 녹관으로 분류되지 않았기에 오늘날 최저임금에도 못 미칠 만큼 박봉에 시달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때를 틈타 많은 이들이 도망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런 연유로 악공과 악생 선발은 각 지역에 일정 수를 분배해 충당하도록 하는 비자발적인 방법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장악원에는 다른 일로 생계를 잇는 일이 잦은 악공과 악생을 위한 배려로 정기 연습일이 정해져 있었다. 매달 2와 6이 들어가는 날짜에 모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장악원에서는 1년에 4번 정기 실기시험이 행해졌는데, 시험의 응시 자격은 3개월 내 30일 이상 출근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결국 이 날짜를 채우려면 정기 연습일 외에도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연말에도 연주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이 있었는데, 이때 실력이 좋지 않으면 징계를 받았다.
조선은 건국 이후 악과 예가 상보 관계를 이루는 예악정치를 지향했다. 악을 담당하는 장악원은 그 중요도가 높은 기관이었다. 하지만 정작 장악원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악공과 악생은 주체가 아닌 객체였다. 낮은 신분 탓에 명령에 따라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되고 만 것이다.

 

운현궁의 어원, 하늘로 미래를 점치다, 관상감 
흥선대원군이 살았고 고종이 나고 자란 곳이며,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으로도 익숙한 운현궁. 이곳의 어원이 관상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고려시대에 천문 관측 업무를 담당했던 기관의 이름은 서운관이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서운관은 폐지되고 관상감이라는 기관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운관이라는 이름은 쉬 사라지지 않았다. 관상감 자리에는 서운관이 있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궁궐은 운현에 있던 궁이라는 뜻으로 운현궁이라 불렸다.
관상감은 과학기구였다. 천문학과 지리학, 명과학을 모두 담당했으며, 물시계를 관리·운영하고 시보를 전담하는 역할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천문학은 역법이었고 지리학은 풍수지리, 그리고 명과학은 길일을 점치는 점복활동을 뜻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비과학적일지 모르나 조선시대에는 모두 과학에 해당됐다. 관상감이 맡은 업무는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먼저 역서 편찬 및 배포다. 역서는 곧 책력을 말한다. 관상감 재정의 대부분은 역서 편찬으로 확보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업무이자 관상감의 활동 중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다. 역서는 절기의 시작이나 길일 등을 알려주는 각주를 달았으며, 가격을 미리 예상하고 찍어내 매해 발행 부수가 바뀌었다. 두 번째는 일월식의 예보 및 구식례 진행이었다. 해와 달이 사라지는 일월식은 조선시대에 흉조로 받아들여져 이를 예상하고 제를 올리는 일이 무엇보다 정확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변칙적인 천문활동 관측이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조가 하루에 두 번 하늘을 보고 관측한 바를 기록했다. 언제나 하늘을 보고 있어야 했기에 업무 강도가 높았는데, 주로 하위직이 도맡아 했다.
당시 관상감에서 일하던 천문역산가 집단은 조선 후기에 와서야 어느 정도 틀을 갖췄다. 관원을 뽑는 잡과를 통해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집단끼리 뭉치면서 천문학의 명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문인 집단인 만큼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들은 서양의 시헌력 체제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역법의 자립을 일궈내게 되었다.

 

까다로운 만큼 앞서 있었다, 사역원 
국가 무역에서의 통번역을 담당하는 사역관을 배출했던 사역원은 외국 문화를 제일 먼저 접하는 기관이었다.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곳이 고려시대에도 있었는데, 바로 통문관과 사역원이다. 육조거리에 위치한 사역원은 주로 역학 업무를 도맡았지만, 관리를 지방 관아로 파견하여 교육하는 일도 했다. 이런 교육은 보통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졌으며, 인접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외국어 교육기관과 통·번역 기관의 두 가지 역할을 수행했던 만큼 사역원의 입학 절차는 복잡했다. 사역관이 되려는 이는 먼저 녹관청에 현직 역관의 추천서와 부·모·처의 4대조 신분을 조사한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15명의 녹관은 이 서류들을 검토한 뒤 입학시험 여부를 비밀투표에 부쳤다. 15표 중에서 반대표가 3표 나오면 탈락했고, 3번 이상의 투표에서 탈락한 사람은 시험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입학시험을 볼 자격을 얻은 후 이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예비생도로 등록됐던 것이다. 그러나 예비생도가 된 뒤에도 수많은 시험을 거쳐야 했다. 매월 6번의 정규 시험이 있었으며, 3개월에 한 번씩 기말고사 격인 원시를 쳤다. 최종적으로는 과거제도인 역과를 통과해야 정식 역관이 될 수 있었다. 비로소 역관이 되었다 해도 고강이나 취재 같은 내부의 인사고과제도를 통과하려면 끊임없이 경쟁해야 했다. 이에 사역원에서는 외국어 사용이 강제된 우어청이란 곳을 두어 효과적인 교육을 꾀했다. 현대의 외국어 마을이나 회화교실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전용 외국어로 얘기하지 않으면 매를 맞거나 심한 경우 파직을 당했다.
엘리트 양성 기관인 만큼 사역원 내부의 규범은 까다로웠다. 그러나 사역원을 통해 역관이 된 이들은 선진 문물을 누구보다 먼저 받아들였고, 그에 대한 거부감도 적었다. 역관들은 조선 전기에는 주로 실질적인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조선 후기엔 중국 등을 통해 서양의 문화를 들여옴으로써 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목차

머리말

1장 의정부와 육조, 왕과 함께 통치한 최고의 권력 기관 |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2장 비변사,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다 | 배우성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3장 규장각, 국왕의 글이 빛나는 곳 |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4장 봉상시, 예의 나라에서 국가 제사를 총괄하다 | 이현진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5장 주자소와 교서관, 조선의 지식 권력을 창출하다 | 노경희 울산대 국문학부 교수
6장 내의원·활인서·혜민서, 백성을 살리는 덕德을 펼치다 |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7장 상의원, 왕실의 보물창고를 지키는 이들이 갖춰야 할 자질 |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8장 장악원, 모든 음률을 주관한 예술의 정점 | 송지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9장 관상감, 하늘에 관한 지식과 일을 다룬 전문가 집단 |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10장 사역원, 화려한 외국어 실력의 소유자들 | 정승혜 수원여대 비서과 교수
11장 도화서, 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화폭에 담은 세상 |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서울학연구소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정조의 제왕학』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정조의 생각』 등이 있다.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저서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조선과학인물열전』 『원통함을 없게 하라』 『조선의 명의들』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 역서로 『신주무원록』 등이 있다.

 

노경희

울산대 국문학부 교수. 저서로 『17세기 전반기 한중 문학교류』, 공저로 『목판의 행간에서 조선의 지식문화를 읽다』, 『동아시아의 문헌교류』, 번역서로 『명말 강남의 출판문화』, 논문으로 「다산 저술의 전승과 유통에 대한 서지학적 고찰」 등이 있다.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저서로 『우리역사 과학기행: 역사 속 우리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조선후기 수리학과 수리 담론』, 역서로 『중국의 우주론과 청대의 과학혁명』 등이 있다.

 

배우성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독서와 지식의 풍경』 『조선과 중화』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공저로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한국 과학기술 인물 12인』 『우리 옛지도와 그 아름다움』 등이 있다.

 

송지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저서로 『한국 음악의 거장들』 『조선의 오케스트라, 우주의 선율을 연주하다』 『정조의 음악정책』, 공저로 『조선 전문가의 일생』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새로 쓰는 예술사』, 역서로 『시경강의 1~5』 등이 있다.

 

이민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 저서로 『치마저고리의 욕망』 『용을 그리고 봉황을 수놓다』, 공저로 『조선의 역사를 지켜온 왕실 여성』 『조선 궁중의 잔치, 연향』 『종묘, 조선의 정신을 담다』 『조선의 국가 제사』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등이 있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저서로 『이색의 삶과 생각』, 공저로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역사의 길목에 선 31인의 선택』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 『세종 리더십의 핵심 가치』 등이 있다.

 

이현진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연구교수. 저서로 『조선후기 종묘 전례 연구』 『왕의 죽음, 정조의 국장』, 공저로 『종묘와 사직』 『왕의 행차』 『궁방양안宮房量案』 『영·정조대 문예중흥기의 학술과 사상』 『조선의 국가 제사』 『조선 국왕의 일생』 등이 있다.

 

정승혜

수원여대 비서과 교수. 저서로 『조선후기 왜학서 연구』, 공저로 『原本老乞大』 『吏學指南』 『박통사 원나라 대도를 거닐다』 『알타이어 계통 제언어의 기초어휘 연구』 등이 있다.

 

황정연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저서로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공저로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왕과 국가의 회화』 『조선 궁궐의 그림』 『일기로 본 조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