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 영조를 만든 경종의 그늘 정치적 암투 속에 피어난 형제애
  • 지은이 | 이종호
  • 옮긴이 |
  • 발행일 | 2009년 03월 10일
  • 쪽   수 | 271p
  • 책   값 | 12,000 원
  • 판   형 | 152*223
  • ISBN  | 9788996215530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우리가 몰랐던 경종의 새로운 면모!
무기력함 뒤에 감춰진 차가운 이성과 강인한 신념

이 책은 조선의 제20대 국왕 경종景宗시대의 발견과 그 뒤를 이은 영조英祖 간의 형제애를 주제로 하고 있다.

경종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병약하고 줏대 없는, 한마디로 ‘존재감 없는’ 왕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 책에서는 기존의 이런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말한다. 이른바 ‘바보 왕’ 경종이라는 이미지는 짧은 재위기간, 노론에 의한 핍박과 기록의 왜곡, 독살설에 휩싸이면서 조작된 것이며, 경종 스스로 노론의 틈바귀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고 무기력함을 가장함으로써 반사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경종이 노련한 막후정치를 펼친 구체적인 과정, 뚜렷한 철학으로 일의 경중을 판단하고 자신과 뜻이 맞는 신하들을 등용해나가는 과정, 동생 영조와의 정치적 대립지형을 우애로써 넘어섬으로써 18세기 탕평정치의 토대를 이룩해낸 점 등을 분석하고 ! 파헤친다. 특히 노론과 소론으로 양립된 당파싸움의 긴장된 국면 속에서 배다른 두 형제(경종과 영조)의 운명이 파탄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던 일에 있어서 경종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리고 이것은 역사 속에서 확인되는 부자간, 형제간 권력싸움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예외적인 가치의 구현이었는지 등을 심도 깊게 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가 전혀 돌아보지 않았던 국왕 경종을 재발견함으로써 단순히 ‘신임사화라는 살육당쟁’의 기간으로만 기억하고 있는 18세기 초엽의 조선을 역동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어떤 근거로 저자는 기존의 통설을 뒤집으며 이 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
그간 역사 인물의 전기를 다수 집필해온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읽을 때마다 어떻게 동생 영조가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경종이 죽기 전 서로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감을 먹었던 것, 인삼과 부자를 함께 썼던 것 등이 독살의 정황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독살을 목적으로 이와 같은 음식들이 제공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억지스러운 점이 너무나 많다. 게다가 경종실록이나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에 의한 독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조는 팔십 평생 자신의 형을 존경하고 숭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갔다. 영조가 어떻게 형을 독살하고서 평생 가면 쓴 얼굴로 빤한 거짓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이 저자의 의문이었다. 사실 어떤 역사학자와 저술가도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단 그런 추측이 생기고 나면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그러한 의혹에 기울기 마련이고, 경종은 즉위 4년 만에 독살된 나약한 군주의 오명을 벗어날 수 없다. 영조 또한 형을 죽이고 왕에 올랐다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점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여기서 출발한 경종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좀더 넓은 차원의 저술 구상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권력 갈등’ 일변의 정치사에서 다양한 변수들을 고려하는 관점이다. 여기서는 ‘우애’의 정치사로 이 시대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조명받지 못한 경종과 영조의 형제애에서 비롯되었다. 권력을 둘러싼 부자지간과 형제지간의 싸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예외적 개인들이었다. 붕당정치가 가속화된 17세기 조선의 현실에서 권력을 둘러싼 암투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가 피었다는 어떤 비유처럼, 노론과 소론이 서로를 잡아먹고자 했던 적나라한 대치 국면에서도 형제의 의는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그 시대를 보자 모든 것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다. 경종은 분명 병약했지만 어리석은 군주는 아니었다. 당쟁을 신하들의 손에만 맡겨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안에 뛰어 들어가서 왕권 강화를 모색했다. 동생 영조를 끝까지 보호해서 수많은 모략과 정치적 공격 속에서도 결국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줬다. 영조가 재위에 오른 뒤 정치적 반대파인 소론을 감싸고 나아가 탕평정치를 편 것은 소론이 형을 보필한 신하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이 책에서 영조의 어록과 구체적인 인사 조치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경종은 세종이나 성종, 숙종이나 영정조 등 거물급 왕에 비하면 그 존재감이 너무나 미약하게 인식되어 왔다. 재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경종의 자리는 엑스트라의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짧지만 주인공으로 무대 위에서 반짝거렸고, 그 반짝거림은 역사의 방향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바로 경종의 재발견이다.

 

참담한 정치적 시련
이 책의 묘미는 ‘바보 왕’ 경종이 전혀 의외의 대목에서 그 실체를 언뜻언뜻 드러냄으로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용 전개에 있다. 이처럼 경종의 재발견은 몇 가지 단계를 통해 이뤄지는데 저자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세자 시절 부왕 숙종의 병이 깊어 경종이 대리청정을 하게 된 4년의 시간이다. 경종과 영조는 숙종의 배다른 아들이다. 경종의 이름은 윤?이고 장희빈의 소생이다. 알다시피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은 정치적으로 소론에 속했고, 소론은 일찍부터 세자인 윤에게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걸었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경종의 여섯 살 터울 동생이며 이름은 금昑이다. 금은 똑똑해서 아버지 숙종의 사랑을 받았고 김창집·이이명 등 숙종 말기의 집권 세력 노론 4대신의 지지를 받았다. 둘의 어머니는 앙숙지간이었고 정치적 배후는 서로 적이었다. 형제는 자칫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할 수도 있었다.
만약 윤의 세자 자리가 확고했다면 두 사람의 우애에 금이 갈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윤의 어머니 장희빈이 궁에서 쫓겨나고 다시 들어왔다가 급기야 사약을 마시고 죽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이 첫 번째 위기였다. 숙종은 윤의 세자 자리는 그대로 유지시켰다. 그러나 세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눈에 띄게 사라져갔다. 그러던 중 격무와 노환으로 인해 숙종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대리청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노론의 목표는 숙종 생전에 세자를 폐위하고 금을 세자로 다시 책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윤의 대리청정은 꼬투리를 잡아 폐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시 노론의 영수 김창집이 이이명에게 “어디 한번 시험해보는 것도 좋겠지”라고 말했던 것은 대리를 시켜보았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 대안을 시도해보겠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처럼 윤의 지위는 불안했고 거대 노론 세력은 막강했다. 그들은 자신감이 있었다. 노론 측 인사인 민진원의 기록인 『단암만록』에 따르면 세자는 어머니 장희빈이 죽은 이후로 새벽에 몽유병 환자처럼 궁궐을 정신없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머리를 감지 않아 때가 끼어서 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했으며,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실어증 환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았다. 윤은 약점덩어리였고 누가 봐도 왕으로 세울 재목은 아니었다.
하지만 4년간 이어진 대리청정을 윤은 무사히 버텨냈다. 군사, 재정, 인사, 법제 등 여러 사안에 대해 그는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그런대로 적절한 판단을 내릴 줄 알았다. 학문에 힘써 지도자의 자질을 함양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지방의 수령 누군가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파면을 청하는 일 등에 관해서는 거부하는 태도로 임했다. 지방관의 인사 문제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대신들이 사직을 청하는 의례적인 일에 대해서는 간절하게 설득하여 붇들었다.(51~52쪽) 단, 윤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그가 대리청정 기간에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마땅히 유의하겠소當留念矣”라는 말이었다. 신하들은 임금과의 토론과 질의, 응답이 아쉽다고 매번 토로할 지경이었다. 노론은 윤을 우습게 여기고 간혹 민생에 관한 중요 문제를 직접 아뢰어 재가를 받기도 했다. 무시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노론은 윤의 대리청정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특별한 문제를 잡아내지는 못했다.
노론의 집요한 폐세자 기도는 숙종이 승하할 무렵에 절정을 이루었다. 숙종 또한 세자가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으나 임종을 앞두고도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는 않았다. 숙종이 죽던 해 4월 이이명은 노골적으로 “정신이 조금 나아지실 때는 대신들을 불러보시고, 나라의 일을 생각하셔서 헤아려 하교하여주소서”라고 말하면서 숙종에게 세자를 바꿀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숙종은 세자를 바꾸지 않았다. 윤은 숙종의 뒤를 이어 제20대 왕 경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윤이 경종이 된 이후 노론의 공격은 더욱 집요해졌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소론이었다. 유학 조중우가 경종의 어미 장씨의 희빈 작위를 회복시켜 나라의 체모를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린 것을 계기로 소론과 노론의 싸움이 전면화되기 시작했다. 이 상소가 올라오자 노론 측에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결국 경종은 노론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윤은 겉으로는 노론의 견해를 두둔하는 듯 보였다. “어찌 선왕이 누우셨던 침상이 채 식지도 않은 날에 감히 무망한 말로써 이와 같이 자행하겠는가?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며 어머니의 작위 회복 문제를 일축시켰다. 조중우는 심하게 고문받고 귀양을 떠나는 길에 죽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을 경종의 진심이라고 볼 수 있을까.
노론은 왕을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경종이 30대 초반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청나라에서 숙종을 조문하는 사절이 왔을 때 그들은 경종에게 “저들을 접견하실 때 매사를 소홀히 하지 마소서” “다례를 하고 연회를 할 때 친히 수저를 드시어 저들이 보도록 하소서” 말하는 등 왕을 가르치려 들었다. 윤이 권위가 없고 보니 죄인의 처벌을 명해도 그대로 집행되지 않는 경우까지 있었다. 숙종의 묘지문을 쓴 이이명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만든 사건을 분명히 기록하지 않았다고 올라온 윤지술의 상소 사건이 그것이다. 현왕의 생모라고 해서 죄인을 어물어물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그 이야기는 경종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당연히 경종은 유배의 형을 내렸으나 이는 쉽사리 이행되지 않았다. 계속 명을 거두라는 상소가 올라오고 성균관 유생들은 출근하지 않는 파업투쟁으로 왕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경종은 결국 명을 거두고 그를 파직시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경종의 반격 
왕이 된 이후 경종의 무기력함은 절정을 이루었다. 이어서 우리가 아는 스토리대로라면 왕세제 책립 및 참정 문제가 이어지고,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상왕으로 물러날 처지에 몰리게 된다. 동생 금이 왕세제가 되었고, 경종은 스스로 비답기를 통해 동생에게 국정 일반을 일임하는 대리청정의 명까지 내리게 된다.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에 동생 금을 세제로 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한밤중에 소론 몰래 노론 대신들만 몰려와서 왕을 압박했고 대비전의 수결까지 받아서 일사불란하게 일을 종결지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세제의 정치 참여를 요구했다. 누가 봐도 이것은 왕의 무기력함을 증명하는 사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마치 물러날 것 같던 경종이 계속 자리를 유지하더니 조만간 상황은 급반전되기 시작한다. 왕세제의 대리청정 문제가 신하들의 만류와 연잉군 금의 극구 고사로 무산되었고 정국이 소강상태를 잠깐 보이다가 소론 대신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내모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결정적 근거를 가지고 공격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들의 평소 행동이 불충하고 무례하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런데 세자 시절 대리청정 시 이와 같은 정치공격에 의한 인사 조치를 극히 꺼리던 경종이 이때에는 단숨에 받아들여 노론 4대신을 귀양 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인다. 이후 목호룡이 노론 대신들의 자제들을 얽어넣은 국왕 시해 음모론을 펼치자 경종은 이를 받아들여 죄인들을 잡아들이게 했고, 노론의 씨가 마를 정도로 대대적인 숙청이 일었다. 바로 신축옥사(1721년, 경종 1)와 임인옥사(1722년, 경종 2)다. 그후 정국은 완벽하게 소론이 장악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반전을 소론과 노론의 싸움으로만 바라봐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왕 경종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저자가 먼저 제시하는 것은 경종 즉위 후 핵심 중앙요직을 소론이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조태구, 최석항, 이광좌, 이삼 등은 의정부와 병조·이조 등 핵심 부서를 장악해서 경종을 보좌하기 시작했는데 경종이 노론의 견제를 뚫고 어떻게 소론을 등용시킬 수 있었는지가 본문 143~160쪽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경종은 매사에 노론의 의사에 따르는 거수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지만, 인사정책에서만은 주도면밀하고 적극적인 성향을 보여주었다. 그 예가 조태구를 우의정에 앉히는 과정이다. 경종은 윤지술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독한 사건이 있은 지 한 달 뒤인 10월 12일 좌의정의 자리가 비자 영의정 김창집을 불러들였다. 원래 우의정으로 있던 이건명도 함께 불러서 인물을 추천받아야 했지만, 그는 김창집만을 불러 천거하라고 했다. 처음 김창집은 노론 측 인사인 정호의 이름을 제출했지만, 경종이 이를 거부했다. 또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노론 측 인사치고는 성격이 비교적 무른 김창집이 경종의 의중을 눈치 채고 소론 측 인사인 조태구를 적어 내자 경종이 바로 낙점했다.
조태구와 최석항을 등용할 때 노론의 반대 상소는 빗발쳤다. 특히 최석항이 병조판서에서 이조판서로 옮길 때 장령 박치원이 “그가 병조의 장을 운영할 때 사사로이 친한 사람들을 등용했다”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저자는 바로 이 대목에 주목한다. 이 말은 최석항이 병조판서를 하면서 소론 측 인사를 정부요직에 많이 등용시켰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최석항이 옮기게 될 이조판서는 문관들의 인사를 총책하는 자리다. 그만큼 노론의 반대가 거셌을 것은 명약관하다. 경종은 많은 반대를 일언지하에 물리치고 최석항을 이조의 장 자리에 앉혔다. 또한 눈길을 끄는 것은 경종이 즉위 후 조태구와 최석항 두 사람을 한두 달 건너 승진시킴으로써 정승과 판서의 요건을 갖출 수 있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경종이 즉위했을 때 정부요직에서 소론 측 인사는 8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숙종 때 임용된 사람들이었다. 이는 즉위 후 곧 5명으로 줄어들었다. 노론의 탄핵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즉위 두 달 후인 경종 원년 8월경에는 핵심 정부요직에 소론 측 인사가 13명으로 늘어났다. 숫자도 숫자지면 질적으로도 매우 진전된 것이었다. 이 추세라면 ‘환국’이라는 비상수단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노론에서 소론으로의 평화적인 권력 이동이 가능할 것 같았다. 경종도 이것을 바랐다. 하지만 위기의식을 느낀 노론은 자신들이 장악한 언론기관을 동원해서 탄핵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두 달 동안 노론의 탄핵을 받은 소론 측 인사는 박태항이 15번, 조태구·조태억·최석항·한세량이 10번 등 거의 매일 갖은 이유로 탄핵을 받았다. 저자는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소론이 다시 궁지에 몰렸고 경종이 전면적인 ‘환국’을 도모한 핵심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분석한다. 그해 11월 말 경종은 모종의 결심을 하고 신하들에게 ‘구언求言’의 교를 내린다. 극심한 흉년이 자신의 부족한 덕에서 비롯했지만 또한 신료들이 화합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면서 재난 극복의 방안을 듣고자 했다. 그 10일 이후인 12월 6일 김일경, 박필몽, 이명선, 이진유, 윤성시, 서종하 등 7인이 연명으로 5000자가 넘는 장문의 소를 올려 노론 4대신을 탄핵했다.
우리는 여기서 경종의 물밑 작업의 실상을 일부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이뿐만이 아니라 경종의 막후정치의 유력한 증거로 ‘왕세제 대리청정’의 문제를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애초에 왕세제 금의 정치 참여를 주장한 것은 노론 측 대신들이었다. 그런데 경종은 이 문제를 대리청정의 문제로 키워버렸다. 왕세제가 정치 경험을 쌓게 해달라는 요구를 신하가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멀쩡한 경종이 스스로 상왕으로 물러나겠다고 하는 판국에 이를 부추기는 것은 자칫 목숨을 내거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노론은 자연히 소론과 함께 경종의 명을 거둬들이기 위해 주력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경종의 수완이다. 경종은 노론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함으로써 시달리지 않았다. 그는 훨씬 노련하게 이 문제를 돌파해나간 것이다. 이때부터 노론은 왕의 진심이 무엇인지 몰라 대리가 가능하다 가능하지 않다며 몇 번이나 입장을 바꾸었고, 결국 연잉군의 극구 사양으로 대리청정 문제가 일단락되었을 때는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인 내상을 입었다. 김일경 등의 노론4흉 연명상소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윤의 정치적 승부수로서의 대리청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 흥미진진한 과정이 본문 118~133쪽에 걸쳐 자세히 분석되고 있다.
저자는 당대의 핵심적인 정치적 사안들을 경종의 입장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읽어냄으로써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유력한 렌즈를 제공하고 있다. 그와 한편으로 저자는 윤과 금 두 형제의 우애가 그 과정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지켜지고 시험되고 지켜지는지를 긴밀하게 연관시켜서 서술하고 있다. 윤은 금에게 한결같은 태도를 보였다. 왕세제 책립과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그는 금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다고 계속 뜻을 밝혔고, 동생 금은 이와 같은 형의 뜻을 간곡히 거절했다. 금은 신중한 성격이었다. 그는 “벽에 부딪혀 자결하고 싶은 심정”이라는 상소문을 올리면서까지 국정을 도와달라는 형의 요청을 거부했다. 저자는 금에 대한 윤의 일관된 신뢰와 따뜻한 배려, 그리고 빨리 정치의 전면으로 나서달라는 노론 측의 요구를 끝까지 버텨내고 형과의 우애를 지켜낸 금의 신중한 태도는 둘 사이에 이어진 우애의 끈, 상호간의 깊은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었던 일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경종은 정국이 소론 측에 기운 이후 환관 박상검 등이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동생 금을 모해하려는 시도에서도 금을 보호했다. 박상검은 금이 매일 아침 형에게 문안을 드리러 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청휘문을 여우가 들어왔다는 이유를 대며 폐쇄할 정도로 왕세제를 무시했다. 일개 환관이 한 나라의 세자를 가지고 논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자가 왕과 대립한다는 인상이 계속 부풀려진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이러한 경우에 왕세자의 위치는 지켜지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연잉군 금을 궁지에 몰려는 이 조직적인 왕따 작전은 환관 박상검 무리에게 자결하라는 경종의 명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는 목호룡의 고변에서도 마찬가지다. 왕을 시해하려는 음모가 발각된 것이었는데, 이 사건은 소론 측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다. 소론은 여기에 왕세제 금을 엮어 넣었다. 죄인들을 잡아 심문할 때 왕세제의 이름을 고의로 거론함으로써 왕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고, 이 기회에 확실하게 그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소론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면서 조태구 등이 왕세제를 극력 옹호했고 경종 또한 이 문제에서 동생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고 감쌌다.

 

경종은 독살되었는가
저자는 ‘윤의 타계-독살설에 대한 반론’에서 경종의 죽음을 다룬다. 재위 4년째 들어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경종은 7월 자리에 누웠다. 그 한 달 뒤인 8월 20일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그 전날 대비전에서 보내온 게장과 감을 맛있게 먹은 뒤였다. 게장과 감은 예로부터 상극의 음식 궁합으로 알려져 있다. 의원들이 그 부작용을 우려하여 적당한 약처방을 했지만 병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다. 8월 24일에는 맥박마저 힘없이 뛰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형이 병석에 누운 뒤부터 곁에서 간호하던 왕세제 금을 비롯해 의원이며 신하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모두가 의원이 되다시피 하여 제각각의 처방을 내놓기도 했다. 이때 금이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고 명을 내렸고 의원 이공윤이 이를 반대했다. 그래도 금은 “내가 의약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나,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효능이 있다는 것은 안다”며 약을 쓰게 했다. 그러나 그날 밤 10시경 경종은 위독해졌고, 결국 다음날 오전 3시경 승하했다. 여기서 ‘게장과 감’ 그리고 ‘인삼과 부자’로 인해 경종이 죽었다는 설이 바로 경종독살설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차근차근 의문을 제기한다. ① 먼저 왕을 독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세자의 지위를 경종이 적극 지지하고 보장하는 상황에서 시간을 다투어가며 시해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게장과 감 또한 마찬가지다. 근 한 달 전부터 경종은 입맛이 없어 수라를 들지 못했다. 이것을 안타까워 대비전에서 보낸 것이 게장이다. 감은 제철 과일이라 게장을 먹은 이후 후식으로 올려진 것이었다. ② 저자는 “대비가 감과 함께 게장을 보냈다고 해서 그녀에게 혐의를 두는 경우도 있는데, 대비는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 집안 출신으로, 윤에게 특별히 개인적 원한이 없었고, 금을 편애하여 윤을 해롭게 할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윤의 병세가 악화된 것은 먹은 음식의 종류 때문이 아니라, ③ 공복과도 다름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과식을 했기 때문에 위장에 무리가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의사들도 갑자기 과식했을 때 가슴과 배에 심한 통증이 올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과거 경종이 보인 증세와 비슷하다. 또한 실록을 보면 경종이 문서를 읽다가 화열이 오르고 심기가 폭발했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저자는 여러 종류의 정신적 고통과 울화로 인해 경종의 위장에 이미 커다란 손상이 간 상태였으며, 이는 갑작스러운 과식으로 인해 탈이 난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인삼과 부자도 마찬가지다. ④ 동생 금이 형에게 부자가 들어간 삼차蔘茶를 올리게 한 것은 자신이 평소 복용하면서 그 원기 회복의 탁월한 효능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영조는 나중에 재위 33년 왕비인 정성왕후가 죽은 것을 애도하는 지문에서 “근래 들어 나의 몸이 더욱 쇠하여지고 소모되어 원기가 한번 약해지니 인삼과 부자도 효과가 없을 줄 어찌 알았으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조는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의 부인이 남편의 3년상을 마치고 몸이 허약해진 것을 우려해서 특별히 인삼과 부자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니 형 윤의 위급함을 당해 그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도록 한 것에는 전혀 악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영조가 혹여 형을 시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⑤ 경종이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을 때 시약청을 설치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시약청을 설치하면 왕이 아프다는 것이 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지고, 왕의 죽음에 대비할 수 있지만,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고 경종이 급서하자 독살설에 의한 죽음이라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 만약 영조가 독살을 음모했다면 반드시 시약청부터 설치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윤과 금의 우애가 의미하는 것
이 책의 결말부는 경종 이후 영조가 즉위해 펼친 정책과 어록들이 어떻게 두 형제의 우애를 보여주는가에 대한 검증에 바쳐진다. 영조는 즉위한 후 형의 기억을 놓지 못하고 “사모함이 간절하다” “윤리로는 형제이고 의리로는 부자 사이여서 참으로 지극한 슬픔이 끝이 없다” “대행대왕께서는 타고는 천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셨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도와 우애를 가지셨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리고 새 왕이 즉위하였으므로 승정원에서 표신標信(궁궐문의 개폐, 출입 및 급변을 전할 때 사용되는 증표)에 새겨넣을 글자를 새롭게 택할 것을 건의하자 영조는 “내가 사용하는 화압花押(표신에 넣는 글자)은 선조께서 하사하신 것으로 보배로운 묵향이 아직 남아 있는데 어찌 다른 것을 구하겠소?”라고 답했다. 이광좌가 그 글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영조는 “통通”이라고 답했다. 윤은 아우 금이 신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학문에 달통하며, 하늘의 이치를 정치에 통하게 하라고 이런 글자를 지어준 것이다.
그 외에도 영조는 선왕의 먼 친척들 일까지 일일이 챙겼으며 친히 별제를 지내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있는 삭망제를 자신이 모두 직접 드렸다. 이는 흔한 경우가 아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경종과 영조의 우애를 평가하며 정리하고 있다.
윤과 금의 우애는 인간의 모든 약점을 이겨내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조 역사에서 이들의 우애는 참으로 보기 드문 수준이었다. 개국 초 태종 방원에 의해 일어난 왕자의 난, 세조가 자행한 아우들의 살육, 광해군에 의한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등 윤과 금 이전의 조선은 형제간의 살벌한 역사로 얼룩져 있다. 윤과 금의 우애에 비교될 만한 것이라면 제12대 임금인 인종과 그 뒤를 이은 명종 사이일 것인데, 이 경우 둘은 나이 차도 많고 인종의 일방적인 사랑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인종의 사후 명종이 영조처럼 형의 우애를 되새기며 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영조는 소론보다 노론에 편향될 수 있었던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쟁의 참혹함을 반성하면서 양쪽을 화해시키고자 했다. 저자는 이것을 형에게 쏟은 우애의 정신을 정치면에서 승화·구현하려고 한 자취로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우애의 정수를 금은 탕평책을 통해 정치적으로 실현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우애를 담아내는 그의 마음씨와 총명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덧붙이며 말이다.
대립과 반목을 이겨내는 역사적인 결단, 그것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와 자질이라고 할 수 있는 우애友愛였다는 것이 이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형제를 위하여

제1부 비극의 서막
세상에 던져진 형제
상반된 상황에서의 형제
윤, 험난한 세월을 살다
부왕의 임종 앞에서

제2부 거대한 역전
세자 책립
국정의 대리 문제
윤의 정치적 승부수로서의 ‘대리청정’
노론을 숙청하는 윤
임금으로서의 윤-경종의 재발견
환관들의 모해
또다른 모략-목호룡의 고변
교문敎文의 의문
우애는 변함없다
윤의 타계-독살설에 대한 반론

제3부 끝없는 우애
형을 이은 아우
망형에의 빚 갚기
의심받는 우애
‘황형’에 대한 회억回憶

에필로그
참고문헌

미리보기

숙종은 말하자면 강박증에 걸린 듯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앞에 닥친 일은 내일로 미루지 못하고 당장 처리해야만 속이 시원했고, 과연 생각대로 했는지 처결한 일도 다시 살펴봤다. 그는 누구와 만나도 상대를 대강대강 보아 넘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신 일단 마음에 결정이 내려지면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이런 성격은 금방 불이 붙는 사랑을 하다가도 쉽사리 식어버리기 일쑤다. 여자에게 행복과 불행을 거의 동시에 안겨주는 형의 남자라고 할까.

_22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이종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조 후기 상거래 질서와 사식(詐飾)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경희대학교, 수원대학교, 법무연수원, 서울시 공무원교육원 등에서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영조를 만든 경종의 그늘>, <백범 김구>, <김옥균>, <회재 이언적>, <우암 송시열>, <구봉 송익필>, <매월당 김시습>, <정암 조광조>, <율곡>, <화담 서경덕>, <율곡선생의 현세 기행>, <조선시대의 경제사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