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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이 말해요, 여기 왔다고 지구별 제주도, 가볍게 빈집에서 살기
  • 지은이 | 지민희
  • 옮긴이 |
  • 발행일 | 2010년 06월 17일
  • 쪽   수 | 272p
  • 책   값 | 12,000 원
  • 판   형 | 126*195
  • ISBN  | 9788993905274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누구나 탈출할 수는 있다…하지만 누구나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벗어나고 싶은 감정. 그런 감정이 어떤 시기에는 더 간절하고 절박하다. 이십대 후반,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또 어찌 보면 소꿉장난을 해온 것 같기도 해서 머릿속이 복잡할 때, 탈출의 필요성은 높아만 간다. 벗어남의 형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여행처럼 유쾌한 일탈일 수도 있고,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 비극일 수도 있다.

여기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무기력한 일상에서 독특한 탈출을 시도한 한 예술가의 내면일기가 있다. 『바람이 말해요, 여기 왔다고-지구별 제주도, 가볍게 빈집에서 살기』는 설치미술가이자 출판 일러스트레이터로 마포와 홍대를 오가며 살아가던 지은이가 두 달간 제주도 서귀포의 빈집에 들어가 ‘바람’과 ‘어둠’을 친구로 하여 지낸 날들의 기록이다. 가장 복잡하고 활력이 넘치는 공간에서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공간으로의 갑작스러운 ‘거주지 변경’. 이러한 지은이의 작은 모험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 덕분에 가능했고, “원래 살던 곳에서 멀리 살고 싶은” 지은이의 열망이 찾아낸 탈출구였다.

제주도 서귀포 월평동 월평로 171번지. 새로 생긴 집은 『어린왕자』에 나오는 ‘소혹성 b612호’ 같았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저자는 서울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가깝게 ‘사물’과 ‘자연’을 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 책은 그 하루하루를 기록한 일기이다. 사람보다 바람이 더 많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너무나 날것의 어둠과 매일 마주해야 하는 제주도에서 그는 어떻게 바뀌어가는가. 섬세한 내면적 문체 속에 담아낸 이 심리적 변화를, 거품을 걷어내고 내 안의 진짜 육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마치 또 다른 나를 지켜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게 이 일기의 독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지은이는 나뭇가지나 돌멩이, 조개껍질, 모래, 떨어진 과일, 각종 쓰레기까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장소의 산물’을 이용해서 ‘본업’에 진지하게 열중함으로써 다양한 설치미술을 탄생시킨다. 그 결과 자신의 빈집에서 전시회까지 열게 되는데, 고용관계에 가까운 서울의 인간관계-지은이는 편집자와 일감으로 소통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에서 벗어나 제주의 예술가 동료들과 영감을 주고받으며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이 과정이 일기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고, ‘이미지 에세이’라는 별도의 챕터에서는 ‘글자 하나 없이’ 오직 ‘이미지’만으로 그 경험의 특수성을 하나의 흐름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일상진화’라는 독특한 목적 아래 이루어진 ‘작은 실험들’이 소개되어 있다. ‘바람사용법’이 바로 그것인데, ‘일상의 소리를 채집해 음악 만들기’ ‘쓰레기에 불지르기’ ‘땅바닥에 누워있기’ ‘비닐봉지에 공기 담기’ ‘효소음료 만들기’ ‘바닷물의 색 확인하기’ ‘겨울옷으로 카펫 만들기’ 등 제주도가 아니었다면 해보지 못했을 행위들을 총 20개로 추려내서 독자들과 공감하고자 했다. 사진과 함께 단계별로 제시한 이 재미있는 일탈들은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존재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다. 이건 마치 손가락 하나 까딱 해서 지구를 들어올리는 일과 같으니 말이다.

 

뭔가 독특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책이 필요해
이 책은 지은이 지민희와 디자이너 김영나의 만남으로 이뤄진 독특한 작품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평소 호감을 갖고 있었던 디자이너 김영나에게 이 책의 디자인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텍스트를 읽어본 디자이너는 흔쾌히 작업에 임했다. 에세이 분야에서는 거의 처음 시도되는 본문 텍스트의 그라데이션 효과(색의 농도를 통해 무엇인가의 변화를 추구한 이 책의 테마를 표현함)를 비롯해서, 여행·에세이 분야의 단행본에서는 잘 시도되지 않는 파격적일 정도로 큰 글자, 차분한 제주의 일상을 더욱 일회적인 아우라로 포착한 흑백의 사진 배치들, 특히 145쪽에서 216쪽까지 이어지는 이미지의 연쇄는 비슷한 것들을 모으고 그 농도의 차이를 음미하는 그만의 안배가 잘 깔려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그 많은 사진을 단 한 컷도 활용하지 않은 ‘표지’에서 잘 드러나듯이 이미지의 즉물성과 과잉을 절제하고 통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알맹이를 감춰둠으로써 이 책의 모든 것이 몇 단계에 걸쳐서 인식되고 감상될 수 있게 배려했다.

목차

서문_ 바람에 부쳐

1장, 서울
2장, 서귀포
3장, 서울
4장, 서귀포

이미지 에세이
바람사용법

미리보기

저녁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큰 소리가 나면서 버스가 한 번 흔들리더니 도로 위에 멈춰섰다. 강정 근처였는데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용차는 머리가 부서지고 나를 포함해 세 명밖에 없던 승객들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버스 안에서 기다렸다. 바깥은 비가 내려서 나와 있을 수도 없었다. 가서 꼭 해야할 일이 있다거나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그리고 다음 버스가 올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버스가 멈춰서 선명해진 라디오 소리 때문에 음악이 잘 들렸다.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기다리면서 앉아있으니까 어느 순간 내가 멈춰 서 있는 버스처럼 느껴졌다.

_30쪽

 

일어나자마자 들은 것은 바람의 기척이었다. 어제처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뒷문까지 열고 앉아 있으니 옆집 돌담의 돌 사이로도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았다. 구멍자국 난 돌 속으로도 바람이 불고 있을지도 몰라. 주인집에서 널어놓은 빨래도 반쯤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_41쪽

 

집주인이 북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낮부터 모두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방에 앉아있는데 “혹시 이거 파도 소리예요?”라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했다. 멀리 떨어진 바다의 파도소리가 집안까지 들렸다. _79쪽

 

새벽에는 바람 소리 때문에 깨어서 다시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폭포 아래에서 자는 것 같았다. 자연은 영화 같지 않구나. 말이 좋아 폭포지 바람 소리는 집요하고 무서웠다. 짙은 어둠도 무섭고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게 무서웠다. 밤중에 뚜껑 없는 상자 속에 누워 격풍이 부는 사막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_87쪽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저 섬이 뭐냐고 했더니 범섬이란다. 아, 범섬은 법환 포구 앞에 떠 있던 섬이다. 범섬은 가까이서 보니까 콧구멍처럼 동굴 두 개가 뚫려 있었다. _100쪽

 

주인 할머니가 솎아서 바닥에 버려놓은 배추 모종을 다듬어서 라면에 넣고 끓여 먹었다. 어느 때부턴가 서울에서처럼 한 그릇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한 그릇 음식에 축복을. _121쪽

 

씨앗들은 왕국의 부드러운 벌레떼들처럼 아주 많아서 황홀했다. 하나씩 따서 조그만 봉지에 넣으니까 금방 부풀어 올랐다. 그 봉지는 아주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그건 그냥 풀씨를 넣은 한 봉지에 불과했지만 이 식물종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생긴 씨앗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 많을텐데. 이 식물의 이름은 사위질빵이다. _133쪽

 

길을 걸으면 살아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왜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가두어진 물고기 같은 느낌이 들까. 처음엔 수면과 가까운 것 같은 야트막한 돌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_142~143쪽

 

야외에 나갔을 때 땅바닥에 누워보자. 하늘이 보일 것이다. 하늘이 보이면 하늘의 구름도 보일 것이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천천히 바라본다.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바닥의 느낌이 어깨와 등, 엉덩이와 다리에 느껴지는가.…바람이 몸을 훑고 가고 우리는 스스로 숨을 쉬고 있다. 햇빛 때문에 몸이 따뜻해져 온다. …서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앉아서, 그리고 누워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_241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지민희

1982년 진주에서 태어나 혼자 서울로 이주해 방황하며 자기주도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다. 연세대에서 불문학과 노문학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 잡지편집자, 독립출판업자로 활동했다. 새로운 일상 체험을 위해 2009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제주도 서귀포의 빈집에 들어가 생활하며 장소의 산물로 설치 및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빈집에서의 전시 이후 현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문학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대한 작업을 하며 조금 긴 여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