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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말해요, 여기 왔다고 지구별 제주도, 가볍게 빈집에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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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_ 바람에 부쳐
1장, 서울
2장, 서귀포
3장, 서울
4장, 서귀포
이미지 에세이
바람사용법
저녁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큰 소리가 나면서 버스가 한 번 흔들리더니 도로 위에 멈춰섰다. 강정 근처였는데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승용차는 머리가 부서지고 나를 포함해 세 명밖에 없던 승객들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버스 안에서 기다렸다. 바깥은 비가 내려서 나와 있을 수도 없었다. 가서 꼭 해야할 일이 있다거나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서 그리고 다음 버스가 올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버스 안에 앉아 있었다. 버스가 멈춰서 선명해진 라디오 소리 때문에 음악이 잘 들렸다. 음악을 들으며 한참을 기다리면서 앉아있으니까 어느 순간 내가 멈춰 서 있는 버스처럼 느껴졌다.
_30쪽
일어나자마자 들은 것은 바람의 기척이었다. 어제처럼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뒷문까지 열고 앉아 있으니 옆집 돌담의 돌 사이로도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았다. 구멍자국 난 돌 속으로도 바람이 불고 있을지도 몰라. 주인집에서 널어놓은 빨래도 반쯤 후두둑 떨어져 있었다. _41쪽
집주인이 북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낮부터 모두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방에 앉아있는데 “혹시 이거 파도 소리예요?”라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했다. 멀리 떨어진 바다의 파도소리가 집안까지 들렸다. _79쪽
새벽에는 바람 소리 때문에 깨어서 다시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폭포 아래에서 자는 것 같았다. 자연은 영화 같지 않구나. 말이 좋아 폭포지 바람 소리는 집요하고 무서웠다. 짙은 어둠도 무섭고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게 무서웠다. 밤중에 뚜껑 없는 상자 속에 누워 격풍이 부는 사막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_87쪽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저 섬이 뭐냐고 했더니 범섬이란다. 아, 범섬은 법환 포구 앞에 떠 있던 섬이다. 범섬은 가까이서 보니까 콧구멍처럼 동굴 두 개가 뚫려 있었다. _100쪽
주인 할머니가 솎아서 바닥에 버려놓은 배추 모종을 다듬어서 라면에 넣고 끓여 먹었다. 어느 때부턴가 서울에서처럼 한 그릇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한 그릇 음식에 축복을. _121쪽
씨앗들은 왕국의 부드러운 벌레떼들처럼 아주 많아서 황홀했다. 하나씩 따서 조그만 봉지에 넣으니까 금방 부풀어 올랐다. 그 봉지는 아주 값어치가 있어 보였다. 그건 그냥 풀씨를 넣은 한 봉지에 불과했지만 이 식물종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생긴 씨앗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 많을텐데. 이 식물의 이름은 사위질빵이다. _133쪽
길을 걸으면 살아있다는 느낌도 들지만 왜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가두어진 물고기 같은 느낌이 들까. 처음엔 수면과 가까운 것 같은 야트막한 돌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_142~143쪽
야외에 나갔을 때 땅바닥에 누워보자. 하늘이 보일 것이다. 하늘이 보이면 하늘의 구름도 보일 것이다.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천천히 바라본다.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바닥의 느낌이 어깨와 등, 엉덩이와 다리에 느껴지는가.…바람이 몸을 훑고 가고 우리는 스스로 숨을 쉬고 있다. 햇빛 때문에 몸이 따뜻해져 온다. …서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앉아서, 그리고 누워서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_241쪽
지은이
지민희
1982년 진주에서 태어나 혼자 서울로 이주해 방황하며 자기주도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다. 연세대에서 불문학과 노문학을 전공하고 일러스트레이터, 잡지편집자, 독립출판업자로 활동했다. 새로운 일상 체험을 위해 2009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제주도 서귀포의 빈집에 들어가 생활하며 장소의 산물로 설치 및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빈집에서의 전시 이후 현재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해 문학 텍스트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대한 작업을 하며 조금 긴 여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