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아
2019.04.25
굴드의 취향, 굴드의 로맨스

(스타인웨이 CD 318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연주하는 글렌 굴드.)

 

 

굴드의 연주를 처음 들은 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은 오디오가 아닌 비디오를 통해서였습니다.
아마 캐나다 방송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였거나, 공연 실황을 담은 비디오였을 테고
풋내 어린 젊은 시절이었으니 그가 연주하던 피아노는 CD 318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매우 높은 가능성으로 그가 아끼던 치커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는 어찌나 환상적이었던지(어쩌면 그것이 영상이었기에 더 그래 보였을 수 있지만)
저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아 이후로 굴드의 연주 모습을 담은 몇 편의 영상과 몇 장의 음반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음악(소리 자체)만을 감상하기보다는
그와 함께 영상(소리와 움직임)을 찾아보는 것을 더 좋아했고,
어쩐지 굴드의 음악은 ‘보면서 듣는’ 편이 더 좋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음반도 모두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지요.
왜 그랬는지도 모르면서요.

 

 

A Romance on Three Legs, 세 다리 위의 로맨스라는 원제를 단 이 책의 원고를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면서
이상한 취향이라고만 생각했던 저의 ‘굴드 감상 습관’의 배경을 밝혀가게 되었습니다.
굴드의 음악을 ‘보고’ 싶어했던 제 습관에 책이 훌륭한 주석을 달아준 것이지요.

 

 

이 책은 굴드의 피아노에 관한 책이지만,
어쩌면 굴드에 관한 어떤 평전보다 굴드의 음악세계를 더 잘 설명해줍니다.
물론 글렌 굴드라는 기이한 천재에게는 많은 사람이 ‘흥미로워할’ 만한 구석이 더러 있지만
괴팍함과 천재성은 늘 붙어다니는 단어들이고 또 굴드에 관해서라면 워낙 알려져 있었기에
여느 평전에서 볼 수 있는 이에 관한 일화들은 저에게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처음 듣는 얘기들로 가득했습니다.

 


굴드가 세 살 때부터 맺은 피아노와의 관계
굴드를 스쳐간 수많은 피아노들
이윽고 발견한 최고의 콘서트 그랜드 스타인웨이 CD 318
그리고 그 피아노의 최후  ㅡ
이것들이 이 책의 한 축이라면
나머지 한 축에는 이 로맨스를 있게 한
굴드의 전속 테크니션(피아노 조율사)이던 베른 에드퀴스트,
그리고 피아노 제작사 스타인웨이의 수많은 노동자가 있습니다.
피아노와 맞닿은 접점에서만큼은 이들의 생애도 굴드의 그것만큼이나 귀중하고, 아름답게 그려지지요.

 

 

에드퀴스트는 어느 날 굴드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비밀을 고백합니다.
어릴 때부터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에드퀴스트는 사실 피아노의 각 선율을 색채로 구분했다고 해요.
“C는 회녹색, D는 모랫빛, E는 따뜻한 분홍색, A는 흰색”처럼요. 화음은 이것들이 섞인 색이었을 것입니다.
굴드는 에드퀴스트의 고백을 듣고 지극히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소리의 높낮이나 크고 작음이 아닌, 다양한 색의 조화와 짙고 옅음이
그들에게는 음악을 듣는 또 다른 도구였던 셈입니다.

이렇게 피아노에 대한 여러 의견을 나누며 굴드와 에드퀴스트는 7년 여에 걸쳐
스타인웨이 CD 318을 명실상부한 굴드의 피아노로 탈바꿈시킵니다.
굴드는 날카로우면서도 찬란하게 부서지는 다이아몬드 같은 소리,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다른 피아니스트라면 겁을 낼 만한) 액션,
굴드 자신만큼이나 민감한 피아노를 원했는데
에드퀴스트는 이를 완벽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피아노를 길들이고, 소리를 구축한 것입니다.

저리도 민감한 액션을 군더더기 없는 연주로 통제하는 모습,
손끝에서 뚝뚝 묻어나는 악기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이 책 내용과 나란히 보면
어째서 저에게 굴드의 연주를 영상으로 ‘본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게 느껴졌는지
얼마간 설명되는 것 같아요.

 

 

끝으로 이 책의 찾아보기에는 무수한 음악가의 이름과 함께
니컬슨Nickolson과 버디Buddy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고백하건대, 이들은 인간이 아닌 개이지만
굴드의 꿈 가운데 하나가 동물보호소를 운영하는 것이었음을,
이들이 그 자신 사랑해 마지않던 친구들이었음을 생각하며,
(원서의 찾아보기에는 없었지만) 바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담아
이들의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