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S

  • 화염 조선 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
  • 지은이 | 박재광
  • 옮긴이 |
  • 발행일 | 2009년 02월 10일
  • 쪽   수 | 357p
  • 책   값 | 18,000 원
  • 판   형 | 152*223
  • ISBN  | 9788996215509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_역사적으로 고증되고 과학적으로 해부된 전쟁의 역사
_새롭게 드러나는 첨단무기 강국 조선의 면모 
이 책은 우리 민족이 가장 장기로 여기는 활과 국가적 사업으로 개발돼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화약병기, 다연장로켓의 원조인 화차, 해상에서의 탱크 거북선, 조선 최고의 전함 판옥선, 신관 장치로 자체 폭발하는 비격진천뢰 등 고구려부터 조선까지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첨단무기들을 열전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제목에 대한 설명: 조선시대 무기들이 대다수이고, 조선시대가 전통무기의 역량이 최대화된 시기라는 점에서, 화력무기를 위주로 다뤘다는 점에서 책의 제목을 ‘화력 조선’이라 정했고, 각 시기 첨단무기들은 모두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끔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 기술개발이 이뤄졌기 때문에 ‘전통 비밀병기의 과학적 재발견’이라는 부제를 사용했다.)
이 책의 의의는 첫째, 전쟁사와 전통무기를 연구한 학계의 전문가가 지난 10여년 진행해온 전통무기 및 전쟁에 대한 연구를 이 한권에 집약함으로써 전통시대를 대표하는 무기들이 개발되고 사용된 역사적 배경, 작동원리, 파괴력, 활용 실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무기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 한 점에 스며든 각 시대의 처한 현실, 왜 그러한 무기가 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런 형식으로 탄생했으며, 기술적인 난점을 극복하는 과정, 외국의 무기들이 우리나라 지형과 전쟁형태에 맞게 변형되어 수용되는 모습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서술했다.
둘째, 활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화력 무기를 위주로 다룸으로써 최무선의 화약병기부터 대원군이 개발한 소포·중포까지의 발전사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나라가 조선중기까지 첨단무기의 과학성과 위력 면에서 결코 세계적인 수준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조선중기 이후 당쟁에 휘말리면서 이러한 무기개발 노력이 심각하게 둔화됨으로써 현대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점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셋째, 이 책은 전쟁과 무기라는 프레임을 통해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우리나라가 수많은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진정한 저력이 무엇인지를 재인식하게 해준다. 특히 이 책은 조선시대의 무기 개발과 관련된 움직임들을 상세히 소개함으로써 바깥으로 드러나는 정치사회사적인 흐름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조선의 운영자들이 어떤 고민과 전망 속에서 외세에 맞서고자 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넷째, 매 장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무기들의 과학적 원리를 설명하고, 관련 도판과 도표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단순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전통무기의 역사와 과학을 독자의 뇌리에 깊이 있게 각인시킨다. 한 점의 무기에 한 국가의 과학역량이 모두 투입된다는 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철포와 각궁에 구현된 전통시대의 물리학과 화학, 세밀한 수학적 계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는 본문의 주요 대목을 직접 인용하면서, 전통 비밀병기의 구체적인 면모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역사적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의 최첨단 금속제련 기술 재조명
화약 개발에 기울인 최무선의 노력 재조명

“고려의 금속 기술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수준이 훨씬 높은 것이었다. 이미 청동기 제품이 대량생산되었고, 거대한 불상을 창조해낼 정도로 제철기술이 발전했다. 또 거푸집 기술과 규격화된 제품의 대량생산 기술이 집약된 청동 활자라든가, 중국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고려동高麗銅’, 팔만대장경에 쓰였던 순도 97~99퍼센트의 마구리 구리판 등은 놀라운 동 제련기술을 보여준다. 고려 금속기술은 화약병기를 제조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탁월했다. 다만 관건은 화약을 어떻게 제조하는가였다.”_ 14쪽 ‘화약 개발을 둘러싼 모험’

화약병기는 고려와 조선의 획기적인 조선술 발전 불러
현재 조선 강국도 이런 전통이 없었다면 불가능

“특히 진포해전은 우리 해전사상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만하다. 우선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장비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겠고, 또 하나는 해전술상 화포가 장비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대형 화포를 장착한 군선의 등장은 기존의 해전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고대와 중세의 해전은 배를 타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육상 전투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양측은 배를 몰며 활을 쏘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면 서로의 배에 뛰어올라 창칼을 겨누고 육박전을 전개했다. 이처럼 배위에서 벌어지는 백병전의 성공률은 매우 낮은 것으로, 비록 승전을 거두더라도 피차간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화약병기가 등장하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해졌고, 화포를 많이 싣기 위해서는 더 크고 튼튼한 배가 필요해 조선술의 발달도 뒤따르게 되었다.”_32쪽, ‘세계 해전사의 흐름을 바꾼 최무선’

 

세종 대에 화력 무기 전면 개량 착수…『총통등록』간행
사거리 1300보 최장거리 대형화포 ‘천자총통’…정밀과학의 산물

“고려 말 급진적으로 발전하던 화약병기는 1392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일시적으로 주춤하다가 이후 부국강병책으로 새롭게 인식되면서 재도약하기 시작했다. 특히 세종은 지상 전투에서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화약 병기를 개발하는 데 주력했는데, 이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산악과 삼림이 많은 지형적 조건을 교묘히 이용하여 상습적인 침입을 일삼던 여진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화포를 개량하고 표준화·규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이를 1448년(세종 30) 9월에 『총통등록』 편찬으로 마무리 지었다.(…)개량 전에 사거리 400~500보에 불과했던 천자총통이 개량 후에는 최대 1300보로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세종대의 화약병기 개발과 관련된 우리의 과학기술은 세계에서도 우수한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이나 『국조오례의서례』 「병기도설」 등의 문헌에 기술된 각종 화약병기 설계에 사용되었던 자[尺]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가장 작은 단위인 ‘리釐’가 0.3밀리미터의 아주 작은 크기였다.”_41쪽, ‘사거리 1300보 대형 화기의 개발’

 

한산대첩 승리의 비결은 대형 화포
학익진으로 중간에 몰아 넣고 일제 사격으로 47척 격파

“임진왜란 시 육전에서의 연패와 달리 해전에서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을 구가했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대형 화포 덕이었다. 당시 조선 수군이 운용하던 거북선과 판옥선에는 고려 말부터 개량해온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별황자총통 등 대형 화포가 장착돼 있었다. 이순신이 견내량에서 와키자카 휘하 일본 전선 47척을 격파하고 12척을 나포했던 데에는 이들 대형화포의 활약이 지대했다.”_46·50쪽, ‘사거리 1300보 대형 화기의 개발’

 

손가락 2개 길이의 최소형 화기 ‘세총통’ 등장
무게·크기 획기적 축소로 휴대 간편…철흠자로 발사 충격 흡수

“조선초기의 화기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세총통이다. 전체 길이가 14센티미터, 구경은 0.9센티미터에 불과해 조선시대에 제작된 화기 가운데 가장 작다. 이런 형태는 사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다. 당시 사용된 소형 화기들은 무게가 꽤 나가 애로 사항이 많았다. 『태종실록』에 당시 화기는 힘이 센 사람만 쏠 수 있고, 설사 쏜다 해도 두세 발이면 팔이 아파서 더 이상 쏘지 못한다는 기록도 나온다. 결국 크기를 줄이고 무게를 가볍게 개량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성과로 나타난 것이 세총통이다. 세총통은 극소형으로 제작하다보니 총신이 너무 가늘게 형성돼, 모병에 나무 자루를 만들어 끼운다 하더라도 발사 시 폭발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루가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루 대용으로 탄성이 강한 주철로 만든 철흠자를 고안해 총통을 잡고 쏘도록 했다. 이처럼 14센티미터의 작은 세총통에는 우리 과학기술의 우수성과 선현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_60~61쪽, ‘휴대용 대포의 출현’

 

세종대에 단발식에서 다발식으로 진화하는 화약병기
재장전 시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문제 극복

“일반적으로 전통시대의 화약병기는 화약과 발사물(화살) 내지는 탄환을 총구 쪽에서 장전한 다음 심지에 불을 직접 점화하여 발사하게 되는데, 재장전 후의 발사도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이 때문에 화기를 한 번 발사한 후 두 번째 발사할 때까지는 몇 분의 시간이 소요되어 사격 속도가 극히 느릴 뿐만 아니라, 일단 발사한 후 재장전하는 동안 병사가 적의 공격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는 취약점이 있었다. 따라서 동서양 모두 병사들의 훈련을 통해 재장전 시간을 줄이는 데 주력했고, 한꺼번에 다량의 화살을 발사하는 기술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우리나라도 결국 세종대에 독자적으로 일발다전법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1433년에 첫 실험에 성공하고 1455년(세종 27) 3월에는 마침내 거의 완벽한 일발다전법을 완성했던 것이다. 이총통(세장전 6발, 차세장전 9발), 팔전총통(세전 8발, 차세전 12발) 등이 그 성과물이다.”_65~66쪽, ‘휴대용 대포의 출현’

 

조선 수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승자총통’ 계열의 무기들
순수 토격형 화기총통으로 화살보다는 철환을 전문으로 발사…가늠쇠로 조준사격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당시 조선 수군들이 승자총통 계열의 총통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승자총통은 어떤 장점을 가진 무기였기에 이토록 많이 사용된 것일까? 조선중기의 승자총통과 전기의 소형 총통에서 보이는 결정적 차이점은 겉모양이 아니라 그 내부구조에 있다. 초기의 소형 화기는 기본적으로 격목형 총통인 데 반해, 승자총통은 격목을 사용하지 않는 순수한 토격형 총통(격목/토격 차이는 22쪽 참조)이라는 점에서 대조된다. 이후 조선중기에 등장한 소형 화기는 화살을 발사할 때는 격목을 사용하고, 철환을 발사할 때는 토격(흙)을 사용했다. 그러나 승자총통은 격목을 사용하지 않고, 토격만 사용하도록 특수 설계한 순수한 토격형 화기총통이다. 그렇기에 화살보다는 철환(3~15개)을 주로 사용하는 최초의 총통이라는 것이다. 소형 화기의 경우 화살보다는 철환을 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소승자총통이 조총과 같은 신식 총과 몇몇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소승자총통에는 가늠쇠[前照星]와 가늠자[後照星]가 있다. 이것은 지향 사격을 한 것이 아니라 눈 옆에 총을 붙이고 조준 사격을 했음을 의미한다. 둘째, 총가(銃架, 개머리판)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화약무기 발달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_70~72쪽, ‘휴대용 대포의 출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의미의 조총鳥銃…조선의 참패 불러
임진왜란 후 개발에 착수, 철물부족 등 뛰어넘고 일본보다 우수한 수준 도달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을 이용한 보병전술에 맥없이 당했다. 조선은 항복한 왜병[降倭]을 동원해 조총 기술을 알아내고, 노획한 조총을 분석해 시험 제작하는 동시에, 명군을 통해 보다 발전된 화기 제조술을 배우려는 등 다방면에 걸쳐 노력했다. 그런 끝에 마침내 조총 제조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총의 총신 제조기술이 교묘하여 제조가 쉽지 않았기에 성능도 떨어졌고, 그 재료가 되는 철물이 부족하고 재정이 궁핍해 제조해낼 수 있는 조총의 수량이 적었던 점 등 난관이 도처에 있었다. 그럼에도 조총은 꾸준히 제조되었고, 그 기술도 점차적으로 향상되었다.(…)인조연간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 일본의 것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자신감까지 표명하게 되고, 제조 수량도 꾸준히 증가해 1627년(인조 5)에는 연간 1000정이던 생산량이 10년 후에는 두 배로 증가해 주력 무기로서 사용되었다.”_84·86쪽, ‘일본의 조총 기술을 따라잡다’

 

세종대 개발돼 문종대 대량 발사된 신기전…폭탄 장착돼 적에게 파편 공격
19세기 이전 전 세계 우수 로켓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어

“신기전은 1451년 문종이 화차를 제작하면서 대량으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즉 주화와 신기전은 화약의 힘을 빌려 스스로 적진에 날아감으로써 한 번에 많은 양을 발사할 수 있고, 비행 중에 연기를 분출함으로써 적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며 적진을 불사를 수 있었다. 특히 신기전 앞쪽에는 발화통이라는 폭탄이 장착되어 있는데, 이 통 속의 화약에는 전체 화약 무게의 27퍼센트에 달하는 쇳가루가 들어 있어, 발화통이 터질 때 뜨거운 파편 구실을 한다. 이때 주위에 있는 적이나 말의 몸에 뜨거운 쇳가루가 박혔다.(…) 우리나라의 주화나 신기전은 19세기 이전의 외국 로켓과 비교해볼 때 결코 그 기술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가장 근대화된 인도의 아리 로켓이나 영국의 콩그레브와 비교해도 구조 및 형태, 성능 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_100~102쪽, ‘달리는 불, 나는 창’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시한 작열탄 ‘비격진천뢰’…조선의 가장 독창적인 화기
죽통 속에 나선형의 홈 파서 화약선 10~15회 감는 획기적인 고안물

“동서양을 막론하고 초기 대포의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단순한 고체 덩어리 발사체solid projectile에 불과했다. 포탄이 적에게 도달할 때까지 폭발을 지연시키는 기술을 개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체탄은 폭발력이 없어 단순히 충격력만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 실제 적을 살상하는 것보다는 성이나 선박 같은 구조물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됐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만은 내부에 화약을 충전하고 신관 장치를 갖추고 있었기에 적의 위치에 도달할 때쯤 자체 폭발을 일으켜 파편으로 적을 직접 살상할 수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선조 때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시한 작열탄으로 그 위력은 유성룡의 『징비록』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흩어지니, 이를 맞고 즉시 쓰러져 죽은 사람이 30여 명이나 되었다’.(…)그렇다면 과연 비격진천뢰는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무기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그 대답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은 비격진천뢰와 유사한 작열탄 종류인 진천뢰라는 무기를 12세기부터 사용했다. 하지만 이는 철로 만들어진 용기 안에 폭발성이 강한 화약을 채워넣은 것으로, 도화선을 사용해 점화함으로써 손으로 던지는 휴대용 폭탄에 가까웠다. 그러나 비격진천뢰는는 오늘날 폭탄의 신관 역할을 하는 죽통竹筒이라는 것이 들어있다. 죽통 속에는 나선형의 홈이 파여 있는 목곡木谷이 들어 있고, 목곡에는 도화선인 화약선을 감았다. 여기 감긴 화약선의 숫자에 따라 폭발 시간이 길고 짧고 한데, 빨리 폭발하게 하려면 열 번을 감고, 더디게 폭발하게 하려면 열다섯 번을 감았다. 화약선이 목곡을 타고 돌며 타들어갈 때 화약이 폭발하지 않도록 죽통에 넣은 점은 매우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_125~138쪽, ‘별처럼 흩어지는 무서운 쇳조각들’

 

포루투갈에서 건너온 ‘불랑기’…화포 개량의 외부적 계기
모포와 자포로 구분돼 재장전 간격 줄이고 일정하게 유지

“불랑기佛狼機의 명칭은 프랑크의 한자식 표현으로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무기다. 중국에 먼저 전래됐고 우리나라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 전투 때였다. 불랑기의 가장 큰 특징은 포가 모포로 불리는 포신과, 포탄과 화약을 장전하는 자포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 기존 화포에 비해 규모가 작아 전투에서 효용성이 높고 성능도 우수했기에 이후 적극적으로 도입돼 거북선 등에 장착됐다. 불랑기는 운용 조작이 매우 간단해, 먼저 모포의 포신 속을 청소한 다음 탄환이 장전된 자포를 자포실에 끼워 넣으면 바로 발사 준비가 끝났다. 이는 1차 사격 후에 재장전·사격까지의 발사 간격이 매우 짧아, 다른 대포와 비교할 때 불랑기만이 지니는 최대 장점이었다. 특히 어떤 탄환을 사용하더라도 장전수가 미리 자포에 탄환을 장전해놓는 방식이기 때문에 발사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도 있었다.”_143~158쪽, ‘포루투갈에서 건너온 고성능 신식 화포’

 

조선 후기 들어 단조와 절삭 기술 적용해 포신 기술 개량
쌍포, 갑인명포, 을축명포 개발해 적중률 높이고 내구성 강화

“19세기 들어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는 가운데 조선의 화포 제조기술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데, 그 과정에서 최천약과 같은 기술자들의 역할이 컸다. 이 때 발명된 화포가 쌍포와 갑인명포, 을축명포이다. 이들 세 화포는 거푸집을 이용한 주조 방식이 아닌 단조 방식으로 제작됐다는 점이 특징이다.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해와야 하는 비싼 재료여서 세종 대부터 주철로 대포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철은 구리만큼 인장 강도가 높지 못해 번번이 사격 시 포신이 파열되고 말았다. 그리고 긴 총신에 작은 구멍을 뚫는 것은 주조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주조 방식으로는 정밀도를 요구하는 총신의 두께와 구멍의 균일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에 화포는 주조와 단조, 절삭 가공기술을 종합적으로 이용해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쌍포와 갑인명포, 을축명포는 바로 이 단조 기술이 적용된 최초의 대형화기였다.”_178~182쪽, ‘단조 기술이 이뤄낸 포신의 혁명’

 

물에서 사용하는 지뢰 ‘수뢰포’…소형배는 20미터 높이로 솟구쳤다가 부서져
시간지연장치, 방수기술, 기폭장치를 절묘하게 맞물리게 한 최첨단 무기

“1867년 가을 한강 노량진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별난 구경거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날 훈련대장 신헌은 자신이 만든 수뢰포水雷砲를 대원군 앞에서 실험했다. 당시 고종을 비롯해 관리와 백성들이 몰려나와 구경했다. 강 가운데 떠 있던 조그만 배는 수뢰포를 맞고 10여 길(성인 키의 10여배)을 공중으로 숫구쳐 올랐다가 부서지면서 떨어졌다.(…)수뢰포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핵심 기술이 필요하다. 첫째는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폭발하도록 만든 시한 지연 장치이고, 둘째는 화약과 점화 장치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방수기술이며, 셋째는 수뢰를 폭발하게 만드는 기폭 장치이다. 가장 중요한 기폭 장치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 해결이 안돼 서양 것을 모방해 만든 청나라 광동성의 것을 수입했다.”_204~214쪽, ‘물의 압력을 이용한 시간 지연 기폭장치’

대원군의 ‘척사’ 활동은 이념적·원칙적인 것 아니었다
대원군 시절 실험·제작된 무기들 재조명…해외유학으로 신기술 도입 적극 추진

“대원군은 그리 철저한 척사파는 아니었다. 그의 최대 관심은 동기·서기 가릴 것이 없이 군사기술을 발달시켜 나라를 지키려는 데 있었다.(…)당시 조선에게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은 군사기술이었다. 이러한 첨단 기술은 대원군에 의해 모두 실험·제작됐다. 또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던 일본과 청나라에 사람들을 보내 배우도록 했다.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로 명명된 이들 유학생은 그곳에 파견돼 무기 제조공장을 둘러보고 기술을 익히려 했다. 청나라 톈진에서 유학한 기술자들은 화약제조, 전기기술, 무기기술을 습득했는데, 조한근은 수전포水電砲, 고영익·김광련은 동화모, 김흥룡·김덕홍·김남수 등도 화기·화약 제조기술 등을 배워 돌아왔다. 이들은 귀국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무기 제조공장인 번사창飜沙廠을 지었다.”_195·218~219쪽, ‘물의 압력을 이용한 시간 지연 기폭장치’

 

거북선을 둘러싼 논쟁들 재조명…2층인가 3층인가, 용머리 용도는? 철갑선 맞아?
거북선에 대한 학계 연구 꼼꼼히 리뷰하고 3층설 제기

“거북선의 내부구조는 3층이었다. 첫째,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한 전함으로, 전투력이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격군·사수·포수가 전투 시 서로 방해받지 않고 각자 임무를 수행할 충분한 공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비전투원과 전투원들의 공간이 구분된 형태의 3층 구조여야 한다. 둘째, 거북선과 판옥선은 기본적으로 구조가 동일하다. 판옥선의 옥상은 개방된 반면 거북선의 옥상은 개판으로 덮여 있다는 점이 다르다. 셋째, 『충무공전서』를 보면 거북선의 좌우 방패에 달린 포구와 별도로 등판에 포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2층과는 별도의 층이 존재하며 그곳에서 포를 쏘았음을 의미한다. 넷째, 이순신의 당포해전 장계에 ”용의 입으로 현자 철환을 치쏘게 하고“라며 거북선의 용구방포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용의 입에서 포를 발사했다면 그곳은 상갑판(3층)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_257쪽, ‘신비의 전함을 둘러싼 쟁점을 해부한다’

 

서양의 배는 바닥이 뾰족하고 조선의 배는 바닥이 평평한 이유 해명
배의 속도는 느리지만, 전복 위험 적고, 좌우 선회능력 뛰어나고, 반동흡수 뛰어나

“서양의 경우 배의 바닥에 용골龍骨이라는 길고 좁은 각재 하나만 깔고, 그것을 뼈대로 삼아 외판을 붙여나가는 첨저선尖底船이었다. 반면 판옥선과 같은 우리나라의 한선은 배의 바닥에 저판 여러 쪽을 깔고 마치 뗏목처럼 그것들을 이어 붙였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배의 이물과 고물 역시 뾰족한 것이 아니라 뭉툭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바닥이 평평하다고 하는 점은 단점이자 곧 장점이 되었다. 우선 이물이 뾰족하지 못하기에 파도를 헤쳐 나가는 능력은 부족했다. 또한 바닥이 평평하기에 첨저선에 비해 물에 닿는 면적은 큰 반면 흘수선은 낮았는데, 이는 배에 대한 물의 저항을 크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배의 직진 능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장점들도 있었으니, 바닥이 평평하기에 갑작스레 썰물이 되어도 배가 좌초되어 전복될 위험이 없었고, 또한 평저선의 경우 첨저선에 비해 좌우 선회능력이 뛰어났는데, 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섬과 암초가 많은 우리나라 바다에서 사용되기에 적합한 특징이었다. 또한 전투 시에 첨저선은 기동력이 유리하지만 일단 선체 하부 구조가 좁기 때문에 상갑판에서 화포를 발사할 때 하중이나 반동을 흡수하기가 불리한 반면, 판옥선은 평저선으로 반동 흡수에 유리한 구조였다.”_268~269쪽, ‘조선은 왜 바닥이 평평한 배를 만들었나’

 

포위된 진주성으로 날아가 친지 구해 30리 밖으로 도피한 ‘비거’
일본 쪽 기록과 국내 문헌 다수에 소개됨…신비의 무기 ‘나르는 수레’ 파헤쳐

“국내의 문헌에 비거飛車가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신경준의 『여암전서旅菴全書』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이다. 『여암전서』 「책거제策車制」에는 “임진연간에 영남의 읍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성의 우두머리에게 비거의 법을 가르쳐 이것으로 30리 밖으로 날아가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영남의 진주성이 왜군에 세 겹으로 포위되자, 정평구는 평소의 재간을 이용하여 만든 비차를 타고 포위당한 성안에 날아 들어가, 30리 성 밖까지 친지를 태우고 피난시켰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30리 밖까지 날아가는 비거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임진왜란 당시 영남의 어느 성이 왜군에게 포위당했을 때 그 성주와 평소부터 친분이 두텁던 어떤 사람이 ‘나는 수레’, 곧 비거를 만들어 타고 성중으로 날아 들어가 성주를 태워 30리 밖에 이름으로써 인명을 구했다.”는 구절이 나온다.”_284~285쪽, ‘포위된 진주성으로 날아든 구원의 행글라이더’

 

물소의 뿔을 반대로 구부려 만든 ‘만궁’…최고의 탄력으로 강력한 살상력 발휘
활대 재료 풍부한 자연환경과 기마전 및 수성전 위주의 전쟁환경이 만들어낸 산물

“활은 모양에 따라 직궁直弓과 만궁彎弓으로 구분한다. 직궁은 탄력이 좋은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양쪽에 줄을 걸어 약간 휘게 만든 단순한 형태다. 이에 비해 만궁은 본래 굽은 활채를 그 반대쪽으로 강하게 밀어 굽혀서 시위를 건 것으로서, 시위를 벗기면 활채는 시위를 걸었을 때의 굽은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굽어진다. 이 만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소뿔, 참나무, 소 힘줄, 실 등의 여러 재료를 복합해서 만든 각궁이었다. 독특한 기술로 제작한 각궁은 그 탄력성이 외국의 활에 비해 탁월했다. 각궁은 물소의 뿔로 만들어진다. 열대에 사는 동물인 물소는 과거에도 고구려 등 기마민족이 있는 북방지역에는 살지 않으므로 지금의 태국이나 베트남, 중국 남부에서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각궁의 강력한 힘의 비밀이 반드시 무소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활채의 바깥쪽에 소의 힘줄을 붙이는데, 이 힘줄은 활을 당겼을 때 강한 인장력으로 활채를 당겨서 활이 부러지는 것을 막고 복원력을 극대화시켜준다. 이렇듯 각궁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에 제작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활이 우수한 이유는 우선 사계절이 뚜렷하여 탄력성 있는 활대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산재했던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에서 기마전騎馬戰과 수성전守城戰이 널리 유행한 것에 있다. 말을 타면서 전투를 치르는 기사騎射가 중시되었고, 그에 부응하여 기사용의 활, 즉 단궁이 발달했던 것이다. 또한 수성전에서는 단병접전短兵接戰보다는 원거리 공격을 최우선으로 하기 때문에 원거리 공격에 적합한 장궁이 발달했다.”_295~297쪽, ‘물소의 뿔을 반대로 휘어 만든 고탄력 무기’

 

호랑이의 두개골도 관통하는 고구려 각궁의 비결을 파헤친다
날개 활용해 원거리 비행…화살촉 조작해 비행시 회전시켜 충격력 높여

“고구려 각궁은 앞이 편편한 도끼날 촉을 끼운 화살로도 호랑이의 두개골을 관통시킬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실제 동명왕릉 부근 12호분에서 수습된 척추 뼈에는 화살촉이 그대로 관통한 채로 남아 있다. 고구려의 활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위력을 발휘한 데에는 화살의 영향도 컸다. 평양의 고산동 7호 무덤의 화살촉은 도끼날 식(끌날 식)으로 불리는데, 이 화살의 장점은 평면이 거의 수평을 이룬 상태에서 날아가므로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화살 뒤쪽에는 큰 날개가 달려 있어 비행체라 할 수 있다. 이는 현대 비행기에서 앞뒤에 날개를 갖고 있는 이른바 오리형 비행체와 유사한데, 앞뒤 날개에 각각 양력이 생기면서 원거리 비행이 가능하다. 한편 도끼날 식은 상처를 크게 낼 순 있지만 송곳처럼 끝이 뾰족한 활촉에 비해 상처를 깊이 낼 순 없었다. 또한 명중률에서도 끝이 뾰족한 활촉보다 못하다. 그렇기에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가야의 화살촉 역시 끝이 넓적하거나 둘 혹은 셋으로 나뉜 화살촉을 사용했다. 이런 형태는 화살이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현대의 총열에 강선을 넣어 총알이 회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적들의 화살이 미치지 않는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때는 도끼날 식 활촉을 사용하고, 명중률을 높일 때에는 좁은 활촉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_302~303쪽, ‘물소의 뿔을 반대로 휘어 만든 고탄력 무기’

 

활쏘기를 군사기밀로 취급하고, 국가 위신 세우는 데 활용
달리는 말 위에서 다섯 발 쏘면 다섯 발 다 명중

“조선의 활쏘기는 널리 유행했고, 그 솜씨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조선의 활쏘기를 배우려고 했다. 특히 조선은 편전 쏘는 법을 ‘아국장기我國長技’라 하여 군사 기밀로 취급했다. 일본인들은 특히 말을 달리며 허수아비 모양의 표적을 활로 쏘는 기사에 탄복했다. 조명채曹命采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는 “다음에는 기추騎?를 시험하는데, 추인芻人(허수아비)은 우리나라에서 쓰는 추적芻的(풀단)으로 만든 표적보다 조금 컸다. 임세재林世載·인문조印文調·이세번李世蕃 3인은 세 발을 맞히고 그 이외의 사람은 모두 다섯 발을 맞혔다. 말이 매우 살지고 훌륭하여 나는 듯이 달리는데, 이일제李逸濟는 첫 추적을 맞히고서 말안장이 기울어져 떨어질 뻔하다가, 곧 몸을 솟구쳐 안장에 바로 앉아서 나머지 화살을 달리면서 다 맞히니, 사면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일시에 모두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_324~325쪽, ‘“내가 투구를 겨냥해 맞춰 벗겨지면, 재빨리 면상을 쏘게”’

 

고려시대의 초대형 쇠뇌 ‘팔우노’…여덟 마리의 소가 시위 당겨
최대 100여발 발사하니 이것이 융단폭격…성벽에 큰 화살 꽂아 침투용 사다리로

“고려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쇠뇌가 개발되었다. 『고려사』에는 1032년(덕종 1) 3월 박원작朴元綽이 수질노繡質弩와 팔우노八牛弩라 불리는 특수한 쇠뇌를 개발했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당시 이를 본 덕종이 “매우 신기하고 교묘하기 그지없다”라고 찬탄하며 “추가 제작해 각지 요충지에 비치하라”고 했다. 팔우노는 여덟 마리의 소로 시위를 당겨야 할 만큼 강한 활틀[弓體]을 지니고 있다. 활틀은 하나가 아닌 셋으로서 앞에 두 개, 뒤에 한 개로 구성되며, 뒤의 것은 앞의 두 개와 줄로 연결시켜 역방향이지만 탄성의 방향을 앞으로 주게 한다. 이로써 최대 100여 발에 이르는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적의 중병기를 부수기 위해서 거대한 화살을 여러 개 날릴 수도 있으며 100여 발에 이르는 작고 가벼운 화살들을 통속에 넣어 한꺼번에 날린다. 시위가 워낙 강해 방아나 줄을 잡아당겨서는 쏠 수 없고 짧은 방망이로 방아틀 쇠 부분을 쳐서 쏜다. 통에 있던 화살이 허공에서 일제히 산개하듯 날아가다가 비 오듯이 쏟아지게 되는데 오늘날의 융단폭격과 비슷해서 살상 범위가 매우 넓다. 팔우노의 또다른 장점은 힘이 좋은 탓에 곡사형이 아닌 거의 직선형으로 화살을 날릴 수 있어 정확성이 뛰어나고 돌에도 깊이 박힌다는 점이다. 거대한 화살을 적의 성벽에 발사해 계단처럼 만들 때도 사용된다.”_339~341쪽, ‘당나라 황제가 욕심낸 신라의 쇠뇌기술’

 

조선 후기 안보 부실이 잊혀진 쇠뇌의 중요성 환기
10발 연속 발사하는 수노기 개발…쏘기 쉬워 ‘부인노’라 불리기도

“조선후기 영·정조대에 이르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쇠뇌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된다. 군사 훈련이 부실해지는 등 안보 체제가 와해되는 상황에서 중요성이 다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무사들이 익혀야 할 여덟 가지 필수 무예 중 하나로 쇠뇌 사용법을 꼽으면서 무과시험 과목에 이를 포함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비록 대량으로 사용되진 못했지만 조선시대 쇠뇌 중에는 특징적인 것이 많다. 조선후기에 쓰여진 무기 관련 서적인 『훈국신조기계도설』을 보면 탄창을 이용하여 여러 발의 화살을 연속해서 발사할 수 있는 수노기手弩機가 등장한다. 수노는 전갑箭甲이라 불리는 화살 상자를 장착하고 있다. 전갑 속에는 화살 10발 정도를 한꺼번에 넣어 손잡이를 앞뒤로 당기면 자동으로 발사된다. 별도의 장전과정 없이 연발 사격이 가능하므로 수노는 다른 쇠뇌와 달리 발사 속도가 빠른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손으로 손잡이를 앞뒤로 당기는 것만으로 발사되기 때문에 여자도 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부인노婦人弩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_352~353쪽, ‘여자도 쏠 수 있는 10연발 수노기

목차

화약 개발을 둘러싼 모험
– 최무선에서 세종대 기술 혁신까지

세계 해전사의 흐름을 바꾼 최무선
– 대형 화포와 해전술

사거리 1300보 대형 화기의 개발
–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무기들

휴대용 대포의 출현
– 세총통부터 승자총통까지

일본의 조총 기술을 따라잡다
– 진화하는 조총

달리는 불, 나는 창
–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 주화와 신기전

대량살상 무기의 탄생
– 우리나라 최초의 다연장 발사기, 화차

별처럼 흩어지는 무서운 쇳조각들
– 조선의 최첨단 무기, 비격진천뢰

스페인에서 건너온 고성능 신식 화포
– 전란 극복을 위해 도입된 신무기, 불랑기

달리는 말 위에 서서 3연발을 날리다
– 연발식 권총의 원조, 삼안총

단조 기술이 이뤄낸 포신의 혁명
– 신제작 기술이 적용된 화포, 쌍포

대원군의 국방 강화 의지가 만들어낸 신무기
– 고도로 실용적인 중포·소포

물의 압력을 이용한 시간 지연 기폭장치
– 조선판 수중 기뢰, 수뢰포

온몸이 무기인 돌격 전함
– 해상의 탱크, 거북선

신비의 전함을 둘러싼 쟁점을 해부한다
– 용머리, 철갑선 내부 구조

조선은 왜 바닥이 평평한 배를 만들었나
– 조선의 주력 전함, 판옥선

포위된 진주성으로 날아든 구원의 행글라이더
–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 비거

물소의 뿔을 반대로 휘어 만든 고탄력
– 한민족 최고의 장기, 궁시

“내가 투구를 겨냥해 맞춰 벗겨지면, 재빨리 면상을 쏘게”
– 조선의 궁시

당나라 황제가 욕심낸 신라의 쇠뇌기술
– 활의 또다른 변형, 쇠뇌

여자도 쏠 수 있는 10연발 수노
– 조선시대의 쇠뇌

미리보기

신기전은 1451년 문종이 화차를 제작하면서 대량으로 발사되기 시작했다. 즉 주화와 신기전은 화약의 힘을 빌려 스스로 적진에 날아감으로써 한 번에 많은 양을 발사할 수 있고, 비행 중에 연기를 분출함으로써 적에게 공포심을 일으키며 적진을 불사를 수 있었다. 특히 신기전 앞쪽에는 발화통이라는 폭탄이 장착되어 있는데, 이 통 속의 화약에는 전체 화약 무게의 27퍼센트에 달하는 쇳가루가 들어 있어, 발화통이 터질 때 뜨거운 파편 구실을 한다. 이때 주위에 있는 적이나 말의 몸에 뜨거운 쇳가루가 박혔다.(…) 우리나라의 주화나 신기전은 19세기 이전의 외국 로켓과 비교해볼 때 결코 그 기술이 뒤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가장 근대화된 인도의 아리 로켓이나 영국의 콩그레브와 비교해도 구조 및 형태, 성능 면에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_100~102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박재광
196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사학과를 거쳐 성균관대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0년부터 지금까지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으로 일하고 있으며, 성균관대·건국대·중앙대·한국외대 등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강의를 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전쟁과 전술, 무기 발달을 바탕으로 한 우리 민족의 대외 항쟁사와 이순신·권율 등과 같은 전쟁 영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충무공 이순신》 《임진왜란과 한일관계》 《나라를 지켜낸 우리 무기와 무예》 《망암 변이중 연구》《우리나라의 전통무기》 등이 있다. 앞으로도 여러 문헌자료를 토대로 우리의 역사를 흥미롭고 사실감 있게 재구성해 독자들과 만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