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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산드로스 원정기
  • 지은이 | 아리아노스 J. R. 해밀턴
  • 옮긴이 | 오브리 드 셀린코트, 박우정
  • 발행일 | 2017년 01월 31일
  • 쪽   수 | 472p
  • 책   값 | 22,000 원
  • 판   형 | 152*223
  • ISBN  | 9788967353827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가장 신뢰받는 판본의 알렉산드로스 전기 최초 출간

알렉산드로스 부관의 진술을 로마 군 지휘관이 고증하여
신화적 존재로 부각되기 전 알렉산드로스의 사실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스 사상과 문학, 나아가 서양 문명과 함께 읽어야 할 책”
“영웅이 아닌 인간 알렉산드로스를 만난다”
“이 책 이후의 알렉산드로스는 신격화되었다”
“무패 행진을 이어간 전쟁 영웅의 원정 과정에 집중한 객관적 원전”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의 주요한 특징은 원정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 아리아노스는 로마시대 카파도키아 총독과 아테네 집정관을 지낸 군사 전문가로, 선대 역사학자의 연구를 철저히 숙지하여 만년의 역작인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에 녹여냈다. 아리아노스는 오랫동안 편린 상태였던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터무니없는 오류와 모순된 정보를 선별했고, 더욱이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직접 참가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루스의 진술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는 판단 아래 그 둘의 역사서를 기초로 삼았다. 그래서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관계나 애마 부케팔로스에 관한 일화 등 신비주의적 내용은 과감히 생략한 채 오로지 출정 기간에 발생한 사건에 몰두했다. 특히 동행했던 지휘관이나 적장들의 이름과 직위, 군대 규모, 전투 과정, 지리와 지형 등을 세밀히 고찰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살인적 폭력을 부르는 주벽과 오만함, 자제력 부족, 신이 되려는 열망, 과도한 정복욕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을 숨기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자세로 인해 아리아노스는 가장 공정한 알렉산드로스 분석가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는 가장 신뢰받는 판본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전기의 최초 출간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고대 원전으로 알렉산드로스를 만나야 하는 까닭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위인은 그 빛나는 업적 때문에 박제화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33년이라는 짧은 생애에 그가 이룬 전적은 가히 놀랍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왕좌에 올라 11년 만에 그리스와 페르시아 제국을 평정하고 광활한 아시아 대륙까지 정벌했으며, 그로 인해 인류사에 헬레니즘이라는 국제화 문명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교 불가능한 불세출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돼왔고, 그에 걸맞은 전설적인 일화들이 세상에 뿌려져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이러한 기록들이 반복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라는 인물은 점점 신화적 존재로 화석화된 측면이 있다. 물론 알렉산드로스 본인조차도 자신이 아킬레우스나 디오니소스와 같이 신으로 숭배되기를 염원했으나, 사실 그는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뒤에 자책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약점 많은 인간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알렉산드로스 사후 가장 앞선 시기에 발표된 저작물들을 다시금 재조명해봐야 한다. 이 사료들은 패배할 줄 모르는 전쟁 영웅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내면을 좀더 제대로 살펴볼 수 있는 정황적 근거들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가장 앞선 시기의 1차 사료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약 300~500년 뒤 로마제국 당시의 저작들이다.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디오도로스, 쿠르티우스, 아리아노스 등의 저작이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는데, 그중 가장 공정하고 분석적인 전기는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로 알려져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국내 최초로 번역된 이 원전을 통해 알렉산드로스라는 인물의 생생한 면면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아리아노스, 가장 공정하고 분석적으로 영웅을 해부하다

“내 이름은 밝힐 필요가 없고, 나라와 가족 그리고 내가 맡은 관직을 구체적으로 말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쓴 이 책이 나의 국가, 친족, 관직의 지위보다 더 중요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러했다. 실제로 내게는 이 책이 나의 국가이며 친족이며 관직이다.”

저자 아리아노스는 2세기 로마시대에 카파도키아 총독과 아테네 집정관을 지낸 행정가이자 역사가이며 철학자였다. 원래 로마의 속주인 비티니아에서 태어난 그에게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는 그의 삶에서 필생의 과업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무한한 존경을 품고 있었고, 군사와 행정 분야의 전문가였으며, 선대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철저히 숙지한 상태였고, 저술 경험도 풍부했을 뿐 아니라 당대 유명한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제자로서 철학적 기반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만년의 역작인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에는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이해와 상식, 전투 지형이나 전략 등이 깊이 있게 녹아들어 있다. 특히 집필 과정이 원정기의 품격을 더하고 했다. 아리아노스는 오랫동안 편린 상태로 떠도는 각종 자료들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터무니없는 오류와 모순된 정보들을 매의 눈으로 선별하여 취사선택하는 과정을 거쳤다. 더욱이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에 직접 참여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불루스의 진술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는 판단 아래 그 둘의 역사서를 기초로 삼았다. 주로 군사 분야에 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을, 지리학과 자연사에 관한 정보는 아리스토불루스에 근거했다. 원정에 동반한 다른 여러 인물들의 증언과 기록 중에서 개연성이 높은 내용들도 채택하되, 진실이 아니라고 판단한 부분에 대해서는 냉철한 입장을 취함으로써 선정주의를 피했다.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의 주요한 특징은 원정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 원정 이전의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복잡한 동맹관계, 왕자 시절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관계나 애마 부케팔로스에 관한 일화, 부왕인 필리포스 2세와 어머니 올림피아의 관계나 출생에 얽힌 신비주의적 내용들은 과감히 생략한 채 오로지 출정 기간에 발생한 사건에 몰두하고 있다. 특히 동행했던 지휘관이나 적장들의 이름과 직위, 군대 규모, 전투 과정, 지리와 지형 등을 세밀히 고찰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살인적 폭력을 부르는 주벽과 오만함, 자제력 부족, 신이 되려는 열망, 과도한 정복욕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을 숨기지 않는다. 이러한 자세로 인해 아리아노스는 가장 공정한 알렉산드로스 분석가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동방 원정의 배경에는 ‘왕의 친구들’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32년 8개월을 사는 동안 12년 8개월간 통치했고, 그중 11년간(기원전 334~323) 출정 길에 있었다. 그의 총 원정 거리는 약 2만7000킬로미터에 달했고, 오늘날의 그리스, 터키, 이집트, 레바논,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지역을 차지했다. 맨 먼저 선왕인 필리포스 2세가 죽자 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그리스 동맹을 제압한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소아시아로 출정하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과 세 번에 걸친 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집트 땅을 접수하고 돌아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움으로써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소아시아 땅까지 접수했다. 서쪽으로 진군한 알렉산드로스군은 인더스 강과 히다스페스 강을 건너면서 코끼리 군단을 앞세운 수십만의 인도군에 맞서 연전연승했고, 연이어 인도 본토까지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오랜 행군과 전투에 지친 병사들의 반발에 밀려 의지를 꺾고 회군길에 올랐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에 도착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열병에 걸려 최후를 맞았다. 그의 원정 경로 곳곳에 건설된 70여 곳에 신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무패의 신화를 증명하는 깃발로 남았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전투에서 그가 승리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지략 덕분이었다. 그러한 지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최고 기병대 병력인 헤타이로이Hetairoi(왕의 친구들)연대가 있었기 때문이고, 팔랑크스phalanx(밀집대형)로 공격하는 페제타이로이Pezetairoi(보병 친구들), 가공할 무기인 사리사sarissa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정예된 부대를 기반으로 전형적인 전략보다는 상황에 따른 변형을 구사하여 적의 허를 찔렀으며, 경우에 따라 창의적으로 전술을 변형함으로써 이후 시대에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군사 전략의 교본이 되었다. 여기에는 각각의 전투 전개 과정을 세밀히 묘사한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알렉산드로스는 어떻게 무패행진의 기록을 이루었는가

전투 장면에 관한 한 아리아노스의 해설은 그 누구보다 정확하고 타당하며, 정확한 전문적 지식을 보여준다. 특히 전투에 앞서 어떤 부대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공략을 펼쳤는지, 각각의 지휘를 맡은 인물이 누구인지, 양쪽 병력의 숫자 및 싸움 뒤의 전사자와 포로의 숫자까지 상세히 밝히고 있다.
기원전 334년 봄,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은 보병 3만~4만3000명, 기병 4000~5500명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넜다. 이후 페르시아와의 첫 전투인 그리니코스 전투에서는 강 건너편에 대기하고 있는 적군의 위협적인 공격에도 과감히 도강을 결정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이수스 전투에서는 고도의 지략전을 전개하여 60만 대군을 이끌고 총력전에 나선 페르시아군을 패퇴시켰다. 높은 성벽으로 둘러친 티레 섬을 공략하는 7개월간의 전투에서는 육지에서 섬까지 이르는 800미터 바다 위에 제방을 쌓았다. 티레군의 화공선 공격으로 제방이 불에 타버리자 또 다시 제방을 쌓는 데 성공했고, 끈질긴 함선 공격을 물리치고 공성무기로 성벽을 무너뜨린 독보적인 전략은 오늘날까지 유명하다. 가우가멜라 전투의 경우 페르시아군의 낫전차들이 돌진할 때 보병들의 밀집형태를 해체하여 낫전차가 그대로 통과시키는 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중앙을 향해 과감히 공략함으로써 다리우스 왕을 또다시 달아나게 했다. 인도 지역의 히다스페스 전투는 그야말로 알렉산드로스 지략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라니코스 강에서의 치열한 전투와 마찬가지로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포루스 왕의 대군은 히다스페스 강에서 알렉산드로스군의 도강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에 알렉산드로스는 병사들을 강의 위아래로 계속 움직이게 하여 적의 감시를 느슨하게 한 뒤 은밀히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기병대를 벌벌 떨게 하는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코끼리가 아군을 공격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대승을 이루었다.
그 밖에도 아리아노스는 요새와 성벽을 공격하는 전술, 협곡의 관문을 통과하는 전략을 비롯하여 적의 사기를 꺾어 투항을 이끌어내는 다양한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뒤 후회할 줄 알았던 고귀한 품성의 ‘영웅’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의 미덕은 정복 과정의 세밀한 기록에만 있지 않다. 아리아노스는 단순한 관찰 기록자로서 접근하기보다는 스토아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의 제자답게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여 인간 알렉산드로스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윤리적 개입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신화적 장치에 가려진 영웅의 약점을 확인할 수 있는데, 오히려 그러한 약점으로 인해 알렉산드로스라는 존재가 새삼 빛나고 있다. 예컨대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사랑했던 동료 헤파이스티온이 죽었을 때 이집트 총독에게 모든 악행들을 눈감아줄 테니 친구의 사당을 세우라고 지시한 부당한 요구에 대해 아리아노스는 크게 질타하고 있다.
물론 자신이 존경하는 영웅에 대한 찬사도 빼놓지 않았다. 전투에 임할 때 빛나는 왕의 복장을 한 채 앞장서서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용맹함, 사막을 횡단하는 과정에서 지독한 갈증을 해갈할 한 줌의 물을 받아들었을 때 병사들 앞에서 과감히 그 물을 쏟아버림으로써 자신의 의리를 보여준 결단력, 다리우스 왕을 주검을 고향으로 보내주어 왕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그 가족들을 정중히 예우한 관대함, 인도군을 무찌른 뒤 적장인 포루스 왕을 죽이는 대신 오히려 인도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친구로 삼은 지도력 등에 대해서는 그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덕목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도 아첨꾼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뉘우칠 줄 아는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라고 했다. 예컨대 술자리에서 자신의 절친 클레이토스가 충고하자 이에 분노한 알렉산드로스는 창을 던져 죽이고 말았는데, 친구를 죽인 자는 살아선 안 된다며 창의 손잡이 부분을 벽에 대해 몸을 창끝에 밀어 죽으려 했던 사실을 전하면서 그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했다.
반면 페르세폴리스 궁전을 불태운 사건에 대해서는 왕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주벽과 자제심을 잃은 젊은 왕에 대한 개인적 연민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왕이 스스로를 신의 혈통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디오니소스나 아킬레우스처럼 신의 반열에 오르기를 갈망한 부분에 대해서는 부하들 앞에 자신의 존엄성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적인 장치였다고 우호적으로 해석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과연 ‘신의 자손’이었을까

영토에 관한 알렉산드로스의 갈증은 거의 병적이었다. 그는 아직 정복하지 않은 아라비아, 에티오피아, 리비아를 돌아 아틀라스 산 너머 유목민들의 땅을 지난 뒤 지중해까지 진출할 생각이었다. 나아가 흑해와 아조프 해 주변의 스키타이 족을 정벌하고, 당시 기세 좋게 성장하고 있던 로마인들을 저지하기 위해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남부까지 갈 계획이었다고도 전한다. 이렇듯 원대한 야심을 지닌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한 영토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그 너머 미지의 땅을 찾아 나섰을 인물이었으며, 그것은 “경쟁자가 없으면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천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라고 아리아노스는 평가했다.
이러한 욕망은 결국 그토록 충성스러웠던 병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점점 넓은 영토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왕국을 좀더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다양한 조치를 세워나갔다. 각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지휘관들을 정복지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관리하게 했으며, 나중에는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에게 총독의 지위를 내주거나 이민족을 마케도니아군에 편입했고, 스스로 페르시아 전통복장을 즐겨 입고, 다리우스 왕의 딸과 인도 족장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에 병사들은 왕이 아시아의 이민족으로 마케도니아인들을 대체하려 한다고 여겼고, 여러 차례 실망과 분노를 터뜨렸다.
특히 왕 앞에 엎드려 절하는 동양의 궤배례 의식을 알렉산드로스가 도입하려 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가 병사들을 대신하여 불만을 토로한 것은 그러한 대립 국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리아노스는 이에 대해 알렉산드로스의 오만한 면모와 칼리스테네스의 무례한 태도를 동시에 개탄하고 있지만, 왕이 화를 낼 법하다며 두둔한다. 아리아노스는 왕의 이 모든 조치들에 대해 거시적으로 ‘융합’을 위한 정책 의지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렉산드로스의 위대한 업적으로 빼놓지 않고 말하는 ‘헬레니즘’ 문명은 어쩌면 정복의 우연한 소산이 아니라 왕의 미래 계획에 따른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아리아노스의 판단이 타당하다고 인정될 수 있다면 알렉산드로스가 ‘최고의 군사 전략가’라는 평가는 뒷자리로 밀릴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상 최고의 통치자였다는 평가가 그 앞자리에 와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위대한 왕이 그토록 신의 반열에 들어서려 했던 것도 단순한 자만심의 발로로 치부하기 어려운 점이 있겠다.

목차

아리아노스와 고대 그리스 문학 | 약어

서문
1권
2권
3권
4권
5권
6권
7권

부록 1 | 부록 2 | 참고문헌 | 출처 | 역자 후기 | 찾아보기

미리보기

아리아노스의 책은 인내심, 상식, 인간사에 대한 예리한 이해뿐 아니라 군사와 행정에 관한 상당한 경험을 담고 있다. 특히 군사 문제에 관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진술을 주로 채택하여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아리아노스는 마케도니아의 핵심층과 긴밀한 일급 정보원을 둔 셈이다. 아리아노스의 책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서술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며 깎아내리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그러한 폄하는 부당하다. 이수스 전투나 가우가멜라 전투에 대한 아리아노스의 해설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책을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퀸투스 쿠르티우스의 해설에 비교했을 때 훨씬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_30쪽

 

한편 알렉산드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덤에 화관을 바치면서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위업을 알리고 길이 보전했으니 아킬레우스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호메로스 같은 저술가가 없었으므로 그로서는 아킬레우스의 이런 행운을 부러워할 만했다. 알렉산드로스에게 없었던 한 가지, 말하자면 성공이라는 기나긴 연결고리에서 빠져 있는 단 하나의 사슬은 그의 위업을 세상에 알릴 만한 훌륭한 기록자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로스에 관한 어떤 산문도 서사시도 쓰이지 않았다. 히에로, 겔로, 테로 혹은 그 외에 알렉산드로스와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사람의 이름과 행적을 칭송하는 노래 가운데 알렉산드로스를 찬양하는 노래는 없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알렉산드로스의 삶과 놀라운 업적은 고대의 아주 사소한 일들보다 덜 알려져 있다.

_75~76쪽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그대에게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가?” 그러자 포루스가 대답했다. “왕으로 대하라.” 알렉산드로스는 이 대답에 만족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겠다. 그런데 자신을 위해 원하는 건 없는가? 말하라.” “이 하나의 요구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이 위엄 있는 대답에 더욱 만족한 알렉산드로스는 포루스에게 왕국을 계속 통치하도록 했고 더 넓은 영토까지 얹어주었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는 용맹한 자를 왕으로 세웠고, 그 이후 포루스는 모든 면에서 충직한 친구가 되었다. 히다스페스 강 너머에서 포루스와 인도인들을 상대로 한 전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헤게몬이 아테네의 집정관이던 5월에 벌어진 일이다.

_303쪽

 

나로서는 알렉산드로스의 정확한 의중을 추측할 만한 자료가 없으며 추측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분명 원대하고 야심 찬 계획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의 제국을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유럽에서 영국 제도까지 확장했다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여 편하게 지내기보다는 정복한 영토 너머 미지의 땅을 계속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는 경쟁자가 없으면 자기 자신을 뛰어넘으려는 천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_373쪽

 

“알렉산드로스 왕이시여, 모든 사람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만큼의 땅만 소유할 수 있소. 그대는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돌아다니며 성가신 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느라 항상 바쁜 것을 제외하면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이오. 그대는 곧 죽을 것이며, 그러면 그대의 몸이 묻힐 만큼의 땅만을 소유하게 될 것이오.” 알렉산드로스는 이 슬기로운 말에 동의했지만 그의 실제 행동은 정확히 그에 반하는 것이었다.

_373쪽

 

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직접 보길 원했으며 주검이라도 보고 싶어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미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호위대가 왕의 죽음을 감추고 있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병사들은 왕을 잃는 슬픔과 감당하기 힘든 혼란 속에서 왕을 직접 보고 싶어했으며, 그런 그들의 뜻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병사들이 줄지어 침상 옆을 지나가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말없이 누운 채 머리를 들어 올리려 애쓰면서 병사 한 명 한 명에게 알아보았다는 눈빛을 보냈다.

_402쪽

 

누구든 알렉산드로스에게 불리한 증거들을 가지고 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비판은 그의 삶과 활동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에 대해 악평을 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먼저 본인과 본인이 비난하는 대상을 비교해보라. 그토록 하찮고 유명하지 않은 자신에 비해 상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만큼 두 대륙의 군주로 군림했으며, 세상 전체에 명성을 드날린 인물이다.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얼마나 사소한 일을 하고 있는지, 심지어 그 일마저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히 알렉산드로스를 욕할 수 있을까?

_「본문」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아리아노스Arrianus

정식 이름은 루키우스 플라비우스 아리아노스Lucius Flavius Arrianus. 서기 90년 이전에 로마의 속주인 비티니아의 수도 니코메디아에 있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부친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었기에 아리아노스는 로마 제국에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서기 108년경 에픽테토스Epictetus 문하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스승의 말을 엮은 『담화록Discourses』과 가르침을 요약한 『편람Manual』을 편찬했다. 공직을 맡고 있을 때 빠르게 승진하여 129~130년에 집정관 지위에 올랐고, 1년 뒤 하드리아누스 황제로부터 그의 군사 및 행정적 능력을 인정받아 국경 지역인 카파도키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로마의 두 군단과 수많은 지원군들을 지휘했는데, 당시 그리스인에게 이 정도의 지휘권이 주어진 것은 이례적인 경우였다. 134년 아르메니아에서 알란 족의 침략을 막아냈고 당시의 작전을 설명한 『알란 족과의 전투 대형The Formation Against the Alans』을 펴냈다. 또한 기병대를 위한 『전술편람Tactical Manual』과 131~132년 트라페주스에서 디오스쿠리아까지 여행한 기록으로 『흑해 주유기Circumnavigation of the
Black Sea(Periplus Ponti Exuini)』를 남겼다. 138년 히드리아누스 황제가 서거하기 전 소환 명령을 받아 총독직에서 물러난 뒤 아테네에서 집필생활을 했다. 아테네 시민권을 얻어 145~146년 집정관의 지위에 올랐고 아테네 최고 통치기구인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의원 자격을 얻었다. 아테네 시절의 저작으로는 『수렵론On the Chase』 『알렉산드로스 원정기The Campaigns of Alexander』 7권, 인도에서 페르시아 만까지 알렉산드로스 함대의 항행을 그린 『인도지Indica』가 남아 있다.

 

편저

J. R. 해밀턴J. R. Hamilton

뉴질랜드 오클랜드대에서 고전과 고대 역사를 가르치다가 1987년에 은퇴했다. 저서로는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로스: 주해Plutarch’s Alexander: A Commentary』와 『알렉산드로스 대왕Alexander the Great』 등이 있다.

 

옮긴이

오브리 드 셀린코트Aubrey de Selincourt

고전학자이자 번역가로, 리비우스의 『로마 건국사The Early History of Rome』 5권, 『한니발 전쟁The War with Hannibal』 21~30권, 헤로도토스의 『역사The Histories』, 아리아노스의 『알렉산드로스 원정기』를 번역했다. 1896년에 태어나 럭비 스쿨Rugby School과 옥스퍼드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26년간 교사로 일한 뒤 1947년에 은퇴하여 생을 마감하는 1962년까지 와이트Wight 섬에서 번역활동을 이어나갔다.

 

박우정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 단편선』 『태양을 기다리는 아이들』 『남성 과잉 사회』 『역사를 이긴 승부사들』 『역사를 수놓은 발명 250가지』 『야성의 부름』 『케네디가의 형제들』 『퓰리처상 사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