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런 게 사는 것!”
집을 나와 더 많은 가족을 얻은, 혼자여서 즐거운 여자들의 솔직하고 짜릿한 이야기들
결혼하지 않는 삶을 우리 사회는 자동적으로 ‘독신獨身’이라는 말로 직결시킨다. 독신-, 지난해 겨울의 눈발처럼 아득하고 외로운 고양이 같은 이 단어는 대략 1980년대 중후반 성공한 캐리어우먼이 치러야 할 사회적 대가라는 의미로 이 땅에 수용되어 그 옷차림 그대로 이십여 년째 늙어가고 있다. 요즘 살만큼 살아본 ‘언니’들은 이 단어를 쓰지 않는다. 왜냐고? ‘비혼’이라는 심플하면서도 명쾌한 라이프스타일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비혼은 독신과 같으면서도 다르다.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지만 결코 혼자 외롭게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비혼주의자에겐 나만의 달콤한 파트너가 있다고!! 그러면 누군가는 비혼이 ‘식 올리지 않고 같이 사는 동거를 의미하냐’고 물을 것이다. 빙고! 음, 그렇긴 한데 그것이 비혼의 전부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혼이란, 냉정하게 극단화시키자면 파트너를 갈아치울 수 없는 법적인 구속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과의 다양한 열린 관계 속에 자신을 놓아보고 겪어보고 마치 돌림판 위에서 돌아가는 도자기처럼 자신의 삶을 빚어나간다는 ‘수행적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비혼의 삶이 얼마나 지속적인 사회적 맥락(부모의 맹목적 구속이나 자아구현 등) 속에서 파생되고, 얼마나 미묘한 가족관계의 구덩이(사랑하지만 벗어나고 싶다는 심리?) 속에서 기어 나와, 또한 얼마나 다양한 스스로의 선택으로 귀결되는지를 스물여덟편의 경험담을 통해 들려주는 일종의 에세이-고백-보고서이다. 하지만 이 책은 비혼만을 다룬 책이 아니다. 자신만의 공간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사회생활을 누리고 싶어 하는 20~30대 여성의 홀로서기라든지 시부모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나쁜 며느리의 생존기와 같은, 전통적인 가족관계와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함께 실려 있다.
이 책은 전위주의자들의 아지프로가 전혀 아니다. 물론 비혼이라는 선택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고, 널리 알리고 싶은(가령 출산율 저하와는 무관하다는 등) 삶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가장 절박한 생활적 필요성 속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간 결과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비혼이라는 것이 무슨 대단한 사회운동이거나 반항심리이거나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활의 발견’이며 지속적으로 확장되어갈 유력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008년 통계청이 실시한 사회조사에서 ‘결혼은 선택’이라고 답한 여성(46.8%)들이 필수라고 답한 여성(46.5%)을 앞지를 정도로 여성들의 결혼관이 바뀌고 있다. 물론 이런 통계자료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늦은 나이까지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 상태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결혼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부적격’으로 낙인찍고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 이런 제도와 풍토에 의해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많은 여성들이 끊임없이 결혼을 강요받고 시달리면서 스스로의 삶을 자유롭게 꾸려갈 용기를 잃어간다. “나이 들면 아파도 곁에 있을 사람도 없고 너무 외로울 거야” 하는 충고들 속에서 ‘온전한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가겠다는 다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흔들리게 된다.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다양한 비혼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가족과 결혼 제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응원하기 위해 기획됐다. 결혼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섹시하지도, 외로움의 끝도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 주변의 현실을 냉정히 돌아보면 이 말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혼 안 하는 여자들을 불행하다고 바라보는 시선에 ‘결혼하면 무조건 행복하니?’라고 물음을 던지고, 결혼해서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고 살아야 제대로 인생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에게 헌신하는 여자가 행복한 것이냐’고 반문한다. 이들은 결혼이 얼마나 여자들의 삶을 망쳐놓았는지를 보여주면서 또다시 묻는다. “아직도 결혼을 믿으세요?” 그리고 결혼에 의문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넌지시 한마디 던진다. “비혼하세요, 그럼.”
이 책은 너무 거창하거나 현실에서 저만치 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모든 여성(혹은 남성)이 결혼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비혼할 자유를 허하라’는 소박한 출발점을 찍으려는 것뿐이다. 억지를 부리고 강요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28명의 여자와 남자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독자들은 마음을 열어 자신과 타인을 응원하는 풍요로운 삶들을 바라보면서 때론 분노하고 때론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제1부 ‘눈물 흘리지 않고 가족과 이별하기’에는 우리가 완전히 떨칠 수 없는 원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시도할 수 있는 삶의 여러 모습들이 담겨 있다.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갈등하는 딸, 아버지에게 매 맞는 엄마를 떠나 독립한 착했던 둘째 딸, 자식을 빚더미에 안기고 친자식에게 고소를 당한 아버지 등등 가족제도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또한 결혼하지 않는 두 딸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내심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엄마,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동생의 삶이 ‘골드 미스’의 삶이 아니어서 실망한 언니, 시부모 말을 안 들어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며느리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가족관계를 되짚어 보게 한다.
제2부 ‘이토록 다양한, 결혼하지 않고 잘 살기’는 우여곡절 끝에 부모로부터 독립한 여자에서부터 결혼이 배우자에게 매우 불리한 제도라는 것을 깨닫고 비혼을 선언한 남자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과정에서 결혼을 지운 사람들의 경험담들이 펼쳐진다. 서울에서 혼자 살 만한 방 구하는 방법과 여자 혼자 잘 살려면 잘 싸워야 한다는 생활의 지혜, 섹스에 대한 발칙하고 열린 생각들을 만나볼 수 있는 이야기들은 혼자서 ‘좀 놀아본’ 여자들의 좌충우돌 생활백서라 할 만하다.
특히 2부에서는 소위 ‘정상가족’의 바깥으로 분류되는 삶도 얼마든지 괜찮다는 것을 매우 다양한 사례를 들어 얘기하고 있다. 여자들끼리 모여 사는 성산동 301호와 연희동 301호 두 가족이 만들어가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관계의 방식은 흥미롭다. 성산동의 다섯 여자들은 ‘같이 살지만 그 안에서 혼자 잘 서는’ 담백하고 느슨한 관계를 형성하는 반면, 연희동의 세 여자들은 서로가 비빌 언덕이 되는 끈끈한 관계를 추구한다.
각방을 쓰면서 각자의 스타일대로 함께 사는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는 연인관계를 풍요롭게 할 만한 여러 방법들을 보여준다. 이밖에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불만, 비혼 직장인 여성의 푸념, 어렵게 독립한 장애 여성의 고민들을 들을 수 있다.
2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독립 다큐멘터리 ‘쇼킹 패밀리’ 감독 인터뷰는 ‘돌아온 싱글’의 이야기. 궤도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면 남들이 강요하는, 보기에만 그럴듯한 행복의 길을 걷지 않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제3부 ‘뻔한 질문 따윈 두렵지 않아’는 지속 가능한 비혼의 삶을 내다보며 준비해야 할 것들을 풀어내는데,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가 결혼하지 않는 여자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기도 하다. “혼자 사는 데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할래?” “도둑이라도 들면 어떡해?” “혼자서 뭐해서 벌어먹고 살래?” “혼자서 나이만 들면 어떡해?” “그래도 남자 하나는 있어야지 않겠어?” 이런 따위의 질문들 말이다.
3부의 필자들은 그런 질문들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지레 걱정’일 뿐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 질문들 속에는 결혼해야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편견이 담겨 있는데, ‘결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면서 수많은 위험에 쉽게 빠지고, 궁핍한 경제적 여건 속에서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혼자서 쓸쓸히 병들어 죽을 것이다’라는 협박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해서도 위험은 언제나 찾아오며, 벌어먹고 사는 것도 여전히 힘들며, 외로움 역시 피할 수 없다는 건 웬만한 상식을 가졌으면 다 아는 것이다.
3부에 나오는 글들은 이런 뻔한 질문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만의 삶을 가꾸고 미래를 준비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꾸며진다. 비혼 여성들을 위한 의료생활협동조합을 준비하는 의사, 자기방어 훈련을 통해 위급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몸을 발견한 사람, 남자 스태프 하나 없어도 영화를 잘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감독, 귀농을 통해 생태적인 삶을 꿈꾸는 직장인, 빵을 만들어 행복과 건강을 나누는 일에 기쁨을 느끼는 빵집 주인, 춤과 축구와 같은 몸을 움직이는 취미생활에 삶의 잔재미를 늘려가는 여자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