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이고, 전투는 피를 흘리는 훈련이었다”
“로마군에게 훈련은 피를 흘리지 않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를 흘리는 훈련이었다.”
이것은 로마와 전투해 패배한 유대인 지휘관 요세푸스가 남긴 말이다. 로마군의 군사훈련, 신체단련, 전쟁실습은 이렇듯 적군에게까지 그 명성이 파다했다.
로마군의 훈련은 놀라울만큼 체계적이었다. 훈련의 가장 기본은 ‘보폭훈련’이다. 트렘펫의 신호에 맞춰 앞뒤로, 좌우로 움직이는 로마 보병들의 방진方陣은 막강했다. 실제 무기보다 두배나 더 무거운 나무로 만든 검과 방패로 훈련하는 것도 전투에서 병사들의 몸을 날렵하게 하려는 의도로 고안된 것이다. 또한 로마군은 보병도 반드시 기병훈련을 받았다. 그 이유는 신체단련 때문이다. 평소 끊임없는 주둔지건설, 다리건설, 각종 노역으로 충분히 신체를 단련하는 로마군이었지만 수십킬로그램의 무기와 갑옷을 몸에 진채 말에 올라타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훈련은 심줄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적인 힘쓰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달에 세 번 있는 행군훈련은 로마군의 기동력을 높여주었다. 한번 걸으면 15킬로미터를 걸었고 여름특별훈련은 35킬로미터에 육박했다. 이는 시간당 6~7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강훈련이었다. 이 덕분에 카이사르 군대는 로마시에서 프랑스 남동부의 론 강까지 7일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또 눈여겨 볼 것은 로마 병사 한 사람이 짊어지는 짐의 총 무게가 50킬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극지를 다니는 탐험가들(라인홀트 매스너 같은)이 최대 용량으로 40킬로그램을 말하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주둔지 건설은 로마군이 적군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었다. 측량사들이 직사각형이 되도록 땅의 크기를 측정하고 각 모서리와 각 면의 중간 중간에 출입문을 낼 곳과 문의 크기까지 재서 짓는 로마군의 주둔지는 적군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리스의 군 지휘관이었던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로마군의 주둔지 건설 방법에서 받은 인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인은 주둔할 때 주둔지가 그 지역의 자연적인 이점에 적합한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참호를 파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인공적인 방어물들이 그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요새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형에 적합한 형태를 채택하려 했고 모든 사람들은 주둔지에서 자신의 위치와 부대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주 불확실했다. 반면 로마인은 단 한 가지 형태의 주둔지를 만들기 위해 참호를 파고 다른 방어물을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한 단 한가지 형태의 주둔지는 변하지 않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익숙했다.”
로마의 토목기술이 총동원되어 구현된 요새공격술
끊임없는 주둔지 건설, 다리 건설, 각지를 연결하는 대로 건설 등의 토목공사는 로마의 유명한 요새 공격술을 낳았다. 로마의 토목공사가 진수를 보여준 것은 마사다 전투다. 서기 73년 산 위에 지어진 유대인의 마사다 요새는 함락이 불가능해 보였다. 유대인은 로마군의 포위에 대비해 엄청난 양의 식량과 철, 주석 등을 비축해놓았고, 빗물을 받아 저장했기 때문에 물 부족 사태를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사방이 가파른 바위로 된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로마군은 병사들과 공성장비들을 접근시킬 수 없었다. 직접적인 공격을 위해 로마군은 마사다 요새 전체를 빙 둘러가면서 6개의 작은 주둔지와 수많은 망루를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경사가 낯은 지역에 병력과 공성 장비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경사진 공격로를 만들었다. 공격로가 완공되어 성벽에 접근하자마자 로마군은 공성 망치로 성벽을 부수고, 투석기로 수많은 돌을 날리고, 횃불을 성 안으로 던져넣었다. 결국 유대인은 2명의여성과 5명의 어린이를 제외하고 모두 자살했다. 주둔지, 도로, 다리 건설로 쌓은 경험이 모두 축적된 것이 요새 공격술이었다. 포위망과 망루, 공격로, 지하 통행로 건설, 공격 탑, 공성 망치, 투석기 장착 등 여러 능력이 필요했다. 카르타고, 파르티아, 게르만족은 이 기술이 부족해 요새화된 로마의 도시들을 공격하지 못했다. 특히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후 이틀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로마시를 공격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지형적인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 대결하는 습성, 필요한 것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사용해야 하는 습성이 로마군의 뛰어난 건설능력을 가져왔고, 그것은 공학 기술의 총체라 할 수 있는 요새 공격술로 나타났다.
그 다음 주목할 부분은 로마군의 엄격한 군기다. 보통 주둔지 에서는 각 초소에 2개 백인대에서 뽑힌 4명이 경비를 서야 했는데, 순번대로 하면 3일에 한번 꼴로 할당되었다. 각 초소의 경비병과 순찰병, 주둔지 주변의 경비병, 이를 담당하는 지휘관까지 포함해 밤에 자지 못하는 인원이 200명이 넘었다. 순찰병들은 초소에 들러 암호판을 받아가고, 모든 초소의 암호판을 빠짐없이 모아 다음 순찰병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경비업무는 점검되었다. 만약 서판을 건네지 않은 초소가 밝혀지면 관련된 자들은 모두 처벌을 받았다. 잘못한 경비병은 높은 계급부터 낮은 계급까지 모든 병사들에게 차례로 매질을 당했다. 매질은 경비병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런 잔인한 처벌은, 경비와 순찰을 잘못하면 동료의 목숨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는 원칙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로마군의 경비와 순찰은 결코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경비를 서는 것을 본 적군이 혀를 내두르는 것은 당연했다.
한마디로 로마군의 움직임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도 매우 근대적인 방식으로 경영되는 ‘움직이는 과학’이었다. 오늘날 각종 발굴되는 문헌에서 밝혀지듯이, 로마군은 병사들의 움직임을 모두 일일이 기록해서 관리했는데, 파견중인 병사가 기록되는 것은 물론이고, 제빵소와 목욕탕, 망루에 몇 명이 있었는지조차 모조리 기록해서 전체 병사들의 동태를 늘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상벌체계의 엄격함
로마군의 철칙은 상은 푸짐하게, 벌은 가혹하게 준다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나면 모든 병사들이 중앙 광장으로 모여 각종 상을 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낭독되었다. 월계수 화관에 긴 리본을 단 금관을 받을 자는 백부장 이상만 받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은관, 시민관 등은 높은 공적을 세운 사람들이 받는 상이었다. 그 다음으로 요새화된 적의 성벽이나 망루에 가장 먼저 올라가서 망루관을 받을 자, 포위한 도시의 성벽을 제일 먼저 올라가서 성벽관을 받을 자, 적의 포위를 풀게 하여 포위 해제관을 받을 자들이 호명되었다. 마지막으로 적에게 부상을 입힌 사람과 적을 죽인 사람이 호명되었다. 부상을 입힌 자에게는 창을, 죽인 자에게는 보병일 경우 컵을, 기병일 경우 말 장식을 받았다. 공적이 더 높은 자에게 한번 사용하면 그만인 창보다는 오래 간직할 수 있는 고가의 제품을 주는 것이었다.
반면, 수상식이 끝나면 처벌이 이어졌다. 주로 전투에서 비겁한 행동을 하거나 아군에 피해를 입힌 병사들이 여기 해당됐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무장해제를 당하고 전리품과 토지를 삭감하는 벌은 가벼운 것에 속했다. 전투에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거나 무기를 잃어버린 병사들이 많을 경우, 패배했을 경우에는 끔찍한 처벌이 뒤따랐다. 바로 ‘10명에 1명씩 처형하기’라 불리는 벌이다. 10명씩 조를 짜서, 그 중 한명을 추첨으로 뽑도록 한 뒤, 죽을 때까지 매질을 가했다. 이 형벌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처음 적용된 것은 BC 471년 볼스키인과의 전쟁에서 병사들이 집단으로 도망갔을 때였다. 제비뽑기로 처형할 사람을 추첨한다는 것은 공정하기는 했지만 부당한 측면도 있어 자주 시행되지는 않았다. 물론 일벌백계의 효과는 충분히 나타났다. 로마군의 규율은 외국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역사가 폴리비우스와 요세푸스가 한 말을 보자.
“로마군이 행하는 처형, 체벌, 보리식량, 불명예제대와 같은 형벌은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동일한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게 만드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로마 병사들은 엄격한 군기 때문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다.”
엄격한 지휘체계
철저한 상명하복은 로마군의 또 다른 장점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서기 19년 시리아의 총독 피소는 잔혹한 군사령관이었다. 그는 두 명의 병사가 함께 휴가를 떠났다가 혼자 돌아오자 “동료를 죽인 것이 분명하지 너에게 사형을 명한다”라고 했다. 병사는 “그렇지 않습니다”라며 조사를 해서 밝혀주길 원했지만 사형장으로 바로 끌려갔다. 그 때 죽은 걸로 간주된 병사가 돌아왔다. 처형을 담당한 백부장이 피소에게 가서 나머지 한 명이 돌아왔으니 처벌을 멈추게 해달라고 했지만, 피소는 “두 병사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바꾸었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두 명이 죽은 이후 백부장마저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다.
물론 이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문 예에 속했다. 군사적 능력은 로마에서 정치적 성공을 보장해주는 지름길이었다. 군사령관이 적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많은데도 전선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지휘하는 것은 자신의 목숨보다 승리를 간절히 원하고, 승리해야 자신의 앞날도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피소처럼 처신했다가는 이번 직책이 최종 관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로마의 군사령관들은 나름대로 합리적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고, 그 판단에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이 복종했다. 그래서 BC 3세기 대카토가 로마인의 특징을 “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은 설득하기 어렵지만 무리로 있을 때는 지도자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한다”라고 요약했던 것이다.
최대 26년이라는 오랜 군 복무로 노련한 군 양성
이번 책에서 저자는 로마군이 이와 같은 특징들을 적절한 예시를 통해서 마치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다. 중간관리자라 할 수 있는 군영장과 천부장의 역할, 병사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가장 가까이서 이들을 이끄는 백부장들의 용맹성, 그들에게 제공되는 각종 특전 등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이처럼 각종 계급의 병사들 실제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로마 군대 내부의 계급을 둘러싼 경쟁, 병사들에게도 가장 중요했던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그리고 먹고사는 문제의 핵심은 군인들에게 주어졌던 급여다. 저자는 이 책에서 최초로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로마 군대의 급여체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계급에 따라 급여의 차이가 확연했기 때문에 로마 병사들은 승진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다. 저자는 로마 군대의 승진 방법, 승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 철저한 경쟁사회로서의 로마군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적은 급여, 혹독한 경쟁을 군대의 강인함으로 연결시키는 그 체계성이다. 혹독하면서도 항상 희망을 갖게 만드는 것, 이것이 로마 군대를 끊임없이 단련시키는 힘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복무기간도 마찬가지다. 공화정기 기병의 복무 기간은 10년이었고, 보병은 16년이었다. 이것이 점점 늘어나 20년이 되었다. 로마의 영토가 작을 때는 전쟁이 끝나면 휴가를 받아 집에 다녀올 수 있었기 때문에 16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하지면 영토가 커질수록 이는 점점 불가능해졌고, 복무기간도 예비군 5년을 포함해 가장 길게 근무하는 병사가 25년을 근무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청춘을 통째로 군대에 바치고 제대하면 바로 노년이 시작되는 구조였다. 결혼문제, 돈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긴 복무기간은 로마군 한명 한명을 노련한 군인으로 만들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훈련으로 단련된 군인들의 체력과 오랜 복무로 인해 축적된 경험은 로마군의 자산이었다.
강점을 버린 로마군의 패망 분석
작은 도시에서 출발해 주변국들과 끊임없이 전쟁하면서 성장한 로마제국. 로마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전쟁했다고 강변했지만 사실은 팽창하려는 욕심,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더 컸다.
약소국의 설움에서 로마가 깨달은 것은 강한 적에게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 편제의 단점이 드러나면 곧바로 개선했고, 적의 무기가 강한 것 같으면 그 무기를 받아들였다.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로마군의 몸에 맞게 끊임없이 연습했다. 마치 원래 로마의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했다.
강대국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강대국이 되기위해, 또 강대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로마가 적이 흘리는 피를 보며 포용하고 동정했다면 제국으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아량을 베풀어도 적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란은 철저하게 진압했고, 침입의 가능성이 있는 적은 공격해 아예 싹을 자르려고 했다.
전쟁을 해서 이기지 못하면 이길 때까지 전쟁했다. 협상을 해도 이긴 상태에서 했지 패배한 상태에서 굴욕적인 평화조약은 하지 않았다. 졌음에도 협상을 거부하고 끝까지 달려드는 로마를 보고 피로스가 기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한니발이 ‘이기면 자신감을 갖고 덤비고, 지면 치욕을 씻으려고 달려드는 로마군과 평생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괴로워했겠는가. 로마의 자존심상 이기지 않고 전쟁을 끝맺을 수는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여러 번 전쟁에서 패하다보니 서부지역이 어느덧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세계 최강이라는 로마군을 믿었으니, 처음에는 곧 회복할 줄 알았다. 그러나 로마는 회복하지 못했다. 그것도 야반족이라고 경멸하던 게르만족에게 빼앗긴 것이다. 야심가들이 제위 쟁탈전에 참여하여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지만 않았어도, 군인들이 제위 경쟁자들의 돈의 유혹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로마의 강점은 끊임없는 훈련 관행, 엄격한 군기, 우수한 요새 공격술, 조직적인 보병 전술을 경시하지만 않았어도 제국은 유지되었을 것이다.
역대 로마가 벌인 전쟁의 승패요인 분석
이 책은 로마 전쟁사 전공자의 저술답게 독자들에게 또 하나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바로 ‘로마군이 수행한 전투의 승패 요인 분석’이다. 저자는 리비우스의 『로마시 건국에서부터』라는 글을 비롯해 폴리비우스, 카이사르, 플루타르코스, 요세푸스, 타키투스, 프로코피우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역사가들이 쓴 전쟁사를 기반으로 이를 작성했다. 칸나이, 폼페이 등 로마의 몇몇 유명한 전투들은 현대 학자들의 글에 잘 설명되어 있지만 과거의 사료 속에는 현대 역사서에서 부각되지 않은 전투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하며, 이 전투들의 승부처를 살펴봄으로써 로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제국으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시각이다. 저자는 이를 “Ⅰ. 국가 존립을 위한 노력 ->Ⅱ. 이탈리아를 장악하다 -> Ⅲ. 지중해를 호수 삼아 -> Ⅳ. 세계 제국에 깃든 평화 -> Ⅴ. 팽창을 위한 힘겨운 노력 -> Ⅵ. 내우외환, 로마제국의 말로”로 나누어 각 장마다 개요를 적어 독자들이 그 시대의 기본 골격을 익히게 한 다음 개별 전투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방대하고 세부적으로 자세하게 작성된 로마군의 전투일지는 아마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