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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간은 강간이다
  • 지은이 | 조디 래피얼
  • 옮긴이 | 최다인
  • 발행일 | 2016년 11월 18일
  • 쪽   수 | 340p
  • 책   값 | 15,000 원
  • 판   형 | 139*209
  • ISBN  | 9788967353957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당연한 명제는 어떻게 부인되고, 힐난받으며, 호도되는가?

강간 피해 여성이 용기와 인내로 사건을 고발했을 때, 우리 사회는 강간범을 향해 범행 동기를 묻는 대신 피해자에게 왜 범죄 피해를 입었는가를 따지곤 한다. 왜 늦은 시간에 외출했으며, 어쩌다 술은 마셨고, 무엇 때문에 옷은 그렇게 입었는가. 어째서 남성을 따라갔고, ‘최선을 다해’ 저항하지 않았으며, 무슨 저의로 이제야 고발하는가. 그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판단한다. 그것은 강간이 아니라고.

가해자의 심기를 건드려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피해자가 강간범의 요구에 응한다. 그러나 그 절박한 생존의 분투는 ‘암묵적 동의’로 둔갑된다. 가해자를 단죄하고 삶을 재건하는 과정에서조차 피해자는 역비난과 무지의 폭력이라는 2차 가해에 시달린다. 이러한 패턴은 과연 여성의 성적 자유를 위한 필요악이며, 오늘 이곳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여성 대상 범죄사건 전문 변호사이자 법학자인 저자는 강간 혐의를 받은 유명인을 비롯해 수많은 가해자의 범행과 사실 부정, 그를 생생히 증언하는 실제 피해자의 인터뷰, 다양한 연구 조사 및 의학적?법률적 기록에 대한 엄격하고 광범위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그것이 오랫동안 형태와 층위를 바꿔 반복돼온 현상임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감정과 편향을 제거했을 때에도 여전히 강간은 강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탁월하게 논증해낸다.

 

사례, 심층 인터뷰, 데이터, 수사 보고서, 변론과 반박, 유언비어와 이론들
실제 발생한 강간 사건을 가능한 모든 층위에서 조명하다

 

_데이터가 말하게 하라

“우리는 올바르게 감별되고 확인된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든, 데이터가 다른 방향을 가리키기를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든 상관없다.”(마이클 스펙터, 과학 저널리스트) 이 말은 피해자를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강간 부정론자뿐 아니라, 강간 근절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만연한 강간 문화를 지적할 때마다 위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한다. 수많은 강간 연구와 통계를 두루 검토하고 과학적으로 합리적이라고 확인된 수치만을 인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가 말해주는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잔혹하다.

살면서 강제 삽입을 경험한 여성은 연구에 따라 1210~1800만 명. 전체 미국 여성의 10.6~16.1퍼센트다. 법적 정의에 부합하는 강간 범죄만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방식으로 통계 낸 것이다. 반면 사건을 경찰에 신고했다고 응답한 여성은 최대로 쳐도 20퍼센트 대에 머문다. 강력범죄, 재산 피해 신고와 비교해도 매우 낮은 수치다. 강간 피해자를 비난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허위 강간 신고율도 예외 없다. 절반 이상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강간 부정론자와, 허위 신고는 단 2퍼센트뿐이라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에는 모두 문제가 있다. 신뢰할 만한 연구들이 보여주는 허위 신고율은 2~8퍼센트다.

신뢰 가능한 데이터를 제시함으로써 저자는 쓸데없는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마땅히 강간 근절에 기울여져야 할 관심이 의미 없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 이는 많은 극우주의 사이트에서 피해자를 공격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악용되는 해묵은 수법을 끝내고, 일부 페미니스트가 이에 대해 대항하며 벌이는 소모적 언쟁을 종결시킨다는 점에서, 또 피해자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신뢰성’의 문제에서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자는 이념이나 감정에 편향되지 않고 오직 확인된 사실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하며, 그것이 어떤 자극적인 드라마나 충격적인 통계보다 더 진실하고 강력한 강간 근절 방법임을 역설한다.

 

_피해자들, 입을 열다

이 책의 또 다른 축은 저자가 다섯 명의 피해자와 직접 나눈 심층 인터뷰다. 피해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강간 사건들의 비슷한 양상과 사건마다 조금씩 달랐던 대처, 그리고 그것들이 복합된 결과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강간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언론 보도나 수사기관의 발표를 통해 듣는 길어야 불과 몇 시간의 사건 경위와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듣는 평생에 걸친 사건의 경과는 똑같은 강간 사건에 대해 전혀 다른 증언을 한다. 한쪽에서 그것은 불유쾌한 섹스 혹은 처리하면 끝날 ‘사건’에 불과한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삶을 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고발의 순간만이 아닌, 사건의 전후 시간을 피해자의 입을 통해 천천히 따라간다. 그제야, 수면 아래 거대하게 자리한 강간 사건, 강간이라는 사안의 전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학 1학년, 사교성 없는 성격을 탓하며 새내기 시절을 보내던 메건은 밖으로 다니며 사람들을 좀 만나야겠다는 생각에 평소에 잘 가지 않던 파티에 가게 된다. 주변은 시끄럽고, 사람들은 술에 취해 정신이 없었다. 파티에 온 것을 후회하던 중 메건에게 체격 좋은 농구선수 한 명이 다가왔다. 그는 신입생인지, 사는 곳은 어디인지 물으며 대화를 건넸다. “여기 시끄럽지. 친구들이 있는 위층에 가서 얘기나 하자.” 메건은 그를 따라갔다. 그와 잘해보려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이 시끄러운 곳에서 빠져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을 뿐.

화장실에 가겠다던 그는 라운지를 둘러보던 메건을 뒤에서 덮쳤다. 억지로 구강성교를 시키고 질에 자신의 성기를 삽입했다. 메건은 저항했고, 거부 의사를 분명히 표시했다. “네가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의 대답이었다. 간신히 숙소에 돌아온 메건은 사건 이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불면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한 자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형벌은 시작일 뿐이었다. 학교 보건소는 강간 검사 키트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녀를 응급실에 보내지도 않았다. 담당 검사는 사건을 신고하고 7개월이 지나기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여성 학과장들마저 “다리 밑에 흘러가는 물”이라며 피해자인 메건에게 극복하고 잊어버리라 했다. 친구들과 나간 사이 누군가가 방에 침입해 침대 시트를 찢어놓기도 했다. 경비에게 사실을 알리자 남을 모함하지 말라는 꾸중만 돌아왔다. 그 후에도 누군가 메건의 방문 밑으로 “네가 질 거야”라고 적은 종이를 밀어 넣은 일이 있었다. 경비대의 태도는 여전했다. 메건은 교수 위원단 앞에서 열리는 교내 청문회도 거쳐야 했다. 적대적 질문이 난무했고, 메건의 자책과 자기의심은 반복되었다.

메건은 어렵게 가해자를 학교에서 퇴학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해자를 신고한 세 명의 피해자가 더 있었다. 메건은 조치를 취하지 않은 학교를 상대로도 민사 소송을 걸었고, 자신도 학교를 옮겼다. 소송이 진행 중일 때 해당 학교 교내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왔고, 메건은 사건이 계류 중이므로 이를 거절했다. 기사에는 가해자의 인터뷰만 나갔고, 메건의 실명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가해자는 “더러운 창녀”라는 폭언을 쓰며 섹스를 해놓고 후회되자 신고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가 나갈 무렵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친구마저 메건을 떠난 뒤였다. 메건은 나중에 비슷한 기사가 여덟 건이나 나간 것을 확인했다. 이어진 소송에서 상대 측 변호사는 메건 자신도 알지 못했던 증조할아버지의 자살 사실을 들먹이며 관심을 끌려는 것, 가족 내력이 아니냐는 질문을 했다. 소가 기각되고, 다시 가해자가 보복 소송을 제기하며 시간은 계속 흘렀고 메건은 점점 더 고립되었다. 강간 사건에서 무관심이 불신으로, 피해자 비난으로, 처벌로 이어지는 과정의 전형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메건의 말을 믿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가해자에게 편향적으로 발언권을 부여했으며, 종국에는 그에게 귀 기울였고, 메건에게 불신을 보내며 그를 외면했다.

“강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끔찍해요. 그런 사건을 겪은 피해자가 사람들, 가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자기를 의심하고 혐오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되는 거잖아요. 주변에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그 사람 편이라고 알려주세요. 명백히 잘못된 일을 목격했다면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침묵을 지키는 것은 중립이 아니에요.”

메건, 라일리, 트레이시, 대니엘, 섀 등 다섯 명의 피해자 외에 책 곳곳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피해자들의 증언은 표어가 아닌 실제 사건의 무게를 감당하며 독자로 하여금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다는 듯이’ 흘려 넘기지 못하게끔 한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가 당위로만 이해해온 것들을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체험으로 이해시킨다.

저자 조디 래피얼이 직접 인터뷰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강간에 대한 몰이해 또는 오해가 강간 사건의 실체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면식 강간은 길을 가다 풀숲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괴한에게 당하는 강간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전체 강간의 절대 다수가 면식 강간이며,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데이트 강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 대다수의 강간 범죄에 대해 피해자의 말에 우선적으로 귀 기울여야 함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강간 사건에서 사회는 오히려 피해자를 침묵하게끔 만든다. 피해자들은 이런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언어를 검열하고, 검열된 말들마저 불신받으며, 발언권을 박탈당한다.

_폭력의 향연: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유일한 범죄

우리는 가능성과 책임을 혼동하는 잘못을 흔히 저지른다. 그러한 잘못이 가장 극단적이고 악의적인 형태로 만연할 때가 바로 누군가 ‘젠더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고 털어놓을 때다. 도난 경보기를 켜두는 것을 잊어버리면 도난 범죄의 표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경보기가 가동되지 않은 것이 피해자를 비난할 구실이 되거나,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에서 도둑의 무죄 방면 사유가 될 수는 없다. 반면 가정폭력, 면식 강간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젠더 권력으로 관계 지어질 때 사건의 맥락은 전혀 달라진다. 피해자의 일거수일투족과 모든 언행은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비난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진정한 강간’을 감히 정의내리며, 그것은 강간이 아니라는 식으로 범죄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무관심과 부정否定 속에서 피해자는 사건 직후부터 육체적으로는 ‘몸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음모까지 빗질해 체모와 섬유를 수집하며, 입과 질 안, 항문, 손톱 아래까지’ 수색당하는 강간 키트 검사를 감수해야 하고, 정신적으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검열하며 책망하게 된다.
강간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폭언은 우리보다 상황이 더 낫다고 이야기되는 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사실 그것은 원초적이기에 오히려 더 닮아 있다.

“강간이라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생명이 잉태됐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그렇게 의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자가 섹스를 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또는 섹스를 즐기지 못했으면 강간이라는 믿음을 퍼뜨리려 한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강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음 날 아침 후회한 것이 여자 쪽이었다는 뜻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툭툭 털고 일어나 계속 가면 돼요. 우리는 남성의 성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요.”

‘앵그리 버드’ 등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 극단적 사이트들에서 이 같은 여성 혐오와 2차 가해가 대중 일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대표적 극우 사이트 말고도 우리나라의 몇몇 커뮤니티에서 소셜 네트워크와 메이저 포털 사이트 등으로 퍼 나르는 혐오 발언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대중 미디어나 청년 문화에서 강간 문화에 입각한 코드를 소비하고, 통계를 왜곡하고, 악의적으로 프레이밍하며, 심지어 알코올이나 강간 약물을 이용해 여성을 동의할 수 없는 상태에 빠뜨리는 수법마저 판박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이자 당시 프랑스 대권 주자였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강간 혐의로 고발당했을 때, 사람들은 피해자를 정당한 근거 없이 비난하고, 피해자의 진실성과 신뢰성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정적들의 사주로 거짓말을 한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2010년 말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강간으로 기소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소위 ‘진보적 대의’ 운운하는 자들, 활동가, 심지어 일부 페미니스트가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강탈 행위를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일탈로 여겼는지를 보면 지금 한국사회의 인식이 사실은 전 세계가 공유하는 고전적인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념이 젠더 논의, 더욱이 끔찍한 젠더 범죄에 대한 단죄를 압도하는 현상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진실은 많은 경우 강간이 잔혹한 범죄자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강간 문화에서, 여러 사람의 공조 속에 탄생한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문화에서는 어떤 이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끔찍한 강간 범죄가, 다른 이에게는 단지 ‘유쾌하지 않은 하룻밤’ 내지는 ‘사랑싸움’에 불과할 뿐인 상황이 가능한 것이다. 만연한 강간 문화에 대한 지적이, ‘남성 혐오’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다.

『강간은 강간이다』는 강간 범죄 자체를 다루는 책이 아니다. 때로는 범죄 자체보다, 그 주변이 사건의 본질을 더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가 있다. 물리력이나 권력을 이용해 여성의 신체를 착취해왔으면서도 사회적 지탄을 받기 전까지 그게 잘못인지조차 몰랐다고 말하는 강간범들, 심지어 합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대척점에서 젠더 권력,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강간 범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묵인하며, 가해자를 단죄하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여성에게 점점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드는 우리의 인식과 제도에 관해 꼬집는다. 그리고 다시 묻는다. 여성 열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라는 강간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 사회가 강간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를. 저자는 직접 당사자의 증언들과 관련 기관의 모든 기록, 연구가들의 이론을 두루 아우르며 그에 정직하게 답한 후 지금의 현실에서 실천할 대안을 찾아간다.

 

_2016년, 한국, 김명순‘들’의 세계

근대 최초의 여성 작가. 소설, 시, 수필, 평론, 희곡 등 방대한 작품을 남긴 문인이자, 에드거 앨런 포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번역가. 올해로 탄생 120주년을 맞은 김명순의 문학사적 자취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에도 그는 줄곧 “건방지고 헤픈 여자” “무절제하고 방종하며 타락하여 순결을 잃은 여자” “남편 많은 처녀” “처녀 과부”로만 불렸다. 도쿄 유학 중 데이트 강간을 당해 자살을 기도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공개되면서, 피해자인 그에게 던져진 돌팔매다. ‘사회적 투석형’은 그가 정신병원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여생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한 세기 전의 일이지만,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강간범에 대해 한국 사회는 유난히 피해자에게 엄혹하고, 가해자에게 온정적이다. 미국에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중범죄도, 이곳에선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범죄자들은 유유히 거리를 활보하며 보복 범행을 저지르거나, 또 다른 표적을 찾는다.

서브컬처에서부터 시작된 성폭력 폭로 해시태그가 출판계, 미술계, 영화계 등 한국사회 곳곳에서 이어졌을 때 분야를 막론하고 안팎에서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 나왔다. 저 상투적인 표현이 내포하는 강간 문화의 만연은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더 우리를 경악케 한다. 끔찍한 범죄 행위가 실은 모두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져 있었고,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누구 하나 가해를 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것이 범죄가 아닌 채 그 긴 시간을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또 무수한 익명의 피의자부터 유명 연예인, 명망 있는 정치가, 원로작가까지 가해자들은 어째서 판에 박은 듯이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가. 왜 가해 사실이 밝혀지고, 범죄자가 구속되어도 여성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지 않는가. 그것은 강간이 끔찍하고 예외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닌, 권력의 카르텔이자 공유된 문화여서다. 이렇게 보면, “세상이 험하니 조심하라”며 여성 대부분을 잠재적 피해자로 모는 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잠재적 강간범으로 몰지 말라”는 불만 섞인 역정의 아이러니한 공존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설명된다.

그렇기에 『강간은 강간이다』라는 이 책의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기도 하다. 강간이 강간임을 선언하는 일,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과 선을 긋고 그들을 단죄하는 일은 강간 근절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책의 정연한 논리는 저마다의 맥락에서 강간에 반대하는 개인들의 선언에 실질적 권위를 부여해준다.

목차

프롤로그

1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의 기소
≫ 라일리Riley
2 강간 통계의 왜곡: 누가, 왜 통계를 왜곡하는가
≫ 트레이시Tracy
3 페미니스트들의 공격: 면식 강간은 여성의 성적 자유에 따르는 대가다?
4 보수주의자들의 공격: 여성이 헤퍼서 강간이 벌어진다?
≫ 대니엘Danielle과 섀Shae
5 강간이 ‘유행병’인가?
≫ 메건Megan
6 허위 강간 신고에 관한 진실
7 스트로스칸을 변호하다
≫ 트레이시를 비난하다
8 부인否認의 효과: 위험한 무관심
≫ 메건을 처벌하다
9 스트로스칸의 석방
≫ 라일리를 믿어준 사람들
10 강간을 부인하지 않는 세상

에필로그
감사의 말

관련 단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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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

이런 개인이나 단체를 대세와 무관한 과격분자로 치부해버리면 간단하겠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큰 실수다. 이들의 생각은 강간 기사에 달린 강간 부정론적 댓글 등을 통해 조금씩 대중의 의식에 스며든다. 이런 댓글을 보면 강간이란 다음 날 아침 후회되는 섹스를 가리킬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뚜렷하게 드러난다. “젊은 여자들에게 어떤 것이 강간이고 어떤 것은 강간이 아닌지 가르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자가 섹스를 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또는 섹스를 즐기지 못했으면 강간이라는 믿음을 퍼뜨리려 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며, 남자의 인생을 망칠 근거가 될 수도 없다.”

_「강간 통계의 왜곡: 누가, 왜 통계를 왜곡하는가」

 

스트로스칸 사건은 강간 부정의 온갖 요소를 집대성해 보여준다.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나 정치적 인물은 강간범이 될 수 없다는 희극적 변호는 강간범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피고가 스키 마스크를 쓰고 풀숲에 숨은 남자라는 강간범의 전형적 이미지와 맞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악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사실을 소화하지 못하고 아예 그런 뉴스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부정과 음모론이 판을 친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결국 법체계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강간을 신고하는 모든 사람의 신뢰도에 악영향을 끼친다.

_「스트로스칸을 변호하다」

 

책임은 여전히 피해자에게 지워진다. 이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대중을 교육한 결과로 얻은 것이라곤 이제 여자들이 강간당하지 않도록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는 기대뿐이다. (…) 강간이나 가정폭력처럼 피해자를 비난하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범죄는 오로지 젠더 관련 범죄뿐이다. 도난 경보를 켜는 것을 잊어버렸든 ‘주민 방범대’가 순찰했는데도 강도를 당했든 절도범이 무죄 방면될 리 없는 반면, 강간 사건에서는 항상 피해자가 사건에 책임이 있을 수도 있음을 전제하는 방식으로 수사가 이루어진다. 그릇된 판단이 사건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_「보수주의자들의 공격: 여성이 헤퍼서 강간이 벌어진다?」

 

침묵이나 비난, 싸움에 맞서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절대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거예요. 치마가 얼마나 짧든, 추파를 얼마나 던졌든, 가슴골을 얼마나 드러냈든, 어디에 가고 누구와 함께 있었든, 무슨 말을 하고 무슨 말을 하지 않았든, 어떤 반응을 보였든 상관없어요. 스스로에게 계속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세요. 하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들, 강간 부정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분개하게 돼요.

_「보수주의자들의 공격: 여성이 헤퍼서 강간이 벌어진다?」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조디 래피얼Jody Raphael

법학박사.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 사건 전담 변호사이자 강간, 가정폭력 등 여성 대상 범죄를 다루는 데 있어 미국 내 최고 전문가로 꼽힌다. 피해자에 대한 법률상담 및 변론과 함께 연구와 강의도 하고 있다. 2003년부터 드폴대에서 가족법을 연구하며, 같은 대학 로스쿨에서 방문교수로 재직 중이다. 20여 편이 넘는 논문을 썼으며, 국제 저널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세 여성의 비극적 이야기를 담은 연작 『버니스를 구출하며Saving Bernice』『태미를 석방하며Freeing Tammy』 『올리비아에게 귀 기울이며Listening to Olivia』 등이 있다.

 

옮긴이

최다인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7년간 UI 디자이너로 일했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지식의 탄생』(공역) 『사랑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행복한 가족의 집』 『대학의 배신』 『잇』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