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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절판] 한국 인문학의 왜곡된 추상주의 비판
  • 지은이 | 박홍규
  • 옮긴이 |
  • 발행일 | 2008년 08월 08일
  • 쪽   수 | 503p
  • 책   값 | 19,800 원
  • 판   형 | 148*210
  • ISBN  | 9788954606349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추천의 글
책소개

이 책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와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Charles-Henri Maurice Clerel de Tocqueville, 1805-1859)의 사상을 연결시켜 전면적으로 다시 읽어내는 시도이다. 새천년에 들어 한국 언론에서 주목할 만한 사상가로 꼽았고, 그 이후 번역서가 줄줄이 소개된 한나 아렌트는 물론, 그녀가 주창한 민주주의 이론의 기원으로서 토크빌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기존의 접근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민주주의 이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라면 토크빌이 쓴 『미국의 민주주의』는 거쳐야 할 고전이다. 특히 미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해서 적용해온 한국에서 토크빌은 잊혀진 고전이었다. 그 가치는 충분히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깊이 있게 천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자 박홍규 교수는 다작하는 저술가이다. 그간 에드워드 사이드, 윌리엄 모리스, 이반 일리히 등 많은 책들을 번역해왔고 서구의 사상과 예술가들의 평전으로 내놓은 것만 10권이 넘어간다. 물론 이 책 『누가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었다 하는가』도 저자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자유, 자치,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 흐름을 이어가지만, 텍스트를 다루는 측면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이번 책은 이른바 저자가 작심하고 쓴 것으로서, 토크빌과 아렌트를 겉멋으로 추구한, 혹은 한국 현실과 연결짓지 못한 하나의 철학적 도그마로 파고들기만 했던 한국 학계에 대한 정면비판이다. 지금까지의 책보다 훨씬 논쟁적이며, 그 논쟁이 사회적 이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사상사의 고전들의 번역 문제, 해석 문제, 현실에의 적용 문제 등을 두루 아우르고 있어서 그 접근의 무게부터가 기존 저술과의 차별성을 지닌다.
이 책을 통해 박홍규 교수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홀로코스트를 겪고 미국으로 망명한 아렌트가 미국 민주주의를 분석하고 이념적 전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토크빌의 민주주의의 주요 개념을 활용하고, 그것을 자신의 시대에 맞게 변형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두 사상가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도출하고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에 갖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그 과정에서 그간 한국에 잘못 소개되어온 토크빌과 아렌트의 면모들에 대해 하나하나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듯이 조심스럽게 구체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고 바로잡는다.

 

이슈 1 아렌트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토크빌
이 책이 쓰여지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2000년이 개막된 이래 한국 언론과 학계는 아렌트를 주목했다. ‘행위’ ‘작업’ ‘노동’으로 인간의 활동을 구분한 아렌트가 “마르크스는 노동과 행동을 혼동했고, 노동을 강조한 마르크스가 문제여서 사회주의가 실패했으니 이제는 행동을 앞세워야 한다”는 점을 주장했다는 게 당시의 메시지였는데 저자가 보기에 이것은 “후쿠야마 식의 ‘자본주의 만만세’와 무엇이 다른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박홍규 교수는 잠시 의아했지만 이 일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런데 그후 현재까지 8년 동안 아렌트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주요 저작들이 쏟아져서 번역됐다. 저자는 과연 아렌트의 사상이 마르크스가 실패한 자리에서 딛고 일어설 새로운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이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독서에서 저자의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책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변적 철학자,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제자, 인간행위의 탐구자, 전체주의의 고발자 등으로 파편화된 이미지 속에서 무언가를 종합해낸 것은 아니었다. 저자의 눈에는 ‘자유自由’와 ‘자치自治’를 핵심 가치이자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탐구한 사상가로서의 아렌트가 확연히 들어왔다.
그런데 이 아렌트는 기존에 저자가 잘 알고 있는 누군가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그것은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2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을 돌아보고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걸작을 남긴 토크빌이었다. 아렌트의 민주주의론은 토크빌에게서 사상적 자원, 개념적 도구들을 빌려와 아렌트가 살았던 시대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었다. 그 흔적은 너무나 뚜렷하고 아렌트 자신도 그녀의 저술에서 언급하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점에 관해서만은 “아렌트는 토크빌의 아류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아렌트와 토크빌은 함께 논의된 적이 없었다. 아렌트 전문가(김선욱·김비환)들도 아렌트가 토크빌에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지나치며 언급했을 뿐 둘의 연관관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박 교수의 눈에 이것이 들어왔던 것은 그가 토크빌과 맺고 있던 질기고도 오래된 인연 때문이다. 1970년대 서양에서 토크빌 르네상스가 불었을 때 국내에도 노재봉 등의 학자들에 의해 토크빌이 소개되면서 주목을 끌었고, 박 교수는 이때 대학을 다니면서 일찌감치 토크빌의 사상에 심취했었던 기억이 있다. 몇 차례 토크빌에 대해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면서도 저자는 개인적 관심으로, 우연한 기회로 그간 꾸준히 토크빌을 읽어왔다(‘나의 토크빌 경험’ 55~76쪽 참조). 그랬기 때문에 저자는 아렌트의 책을 읽으면서 토크빌을 떠올렸고, 토크빌을 통해 아렌트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슈2 한국 학계의 ‘놀라울’ 정도로 추상적이고 왜곡된 인문학주의
그러나 아렌트가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를 추구했고, 그래서 토크빌과 하나로 묶어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교양독자 입장에서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일은 아니다. 아렌트의 책을 읽어가던 저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국내에 소개된 아렌트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변형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토크빌도 예외는 아니지만, 아렌트가 더욱 심각한 오해를 받고 있었으며 피상적인 동조와 오해 속에서 그 진정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애매하고 난해한 철학자로 전락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한국 인문학이 어떻게 사상사의 고전들을 잘못 소개하고 자기식으로 왜소화시키고 편리한대로 의역하고 변호인이 되어 옹호하기만 하는지 꼬집는 본격적인 메타인문학 비평서로 돌변한다.
이 책에서는 토크빌과 아렌트를 번역하고 연구한 학자들이 범하고 있는 오역과 불철저한 이해와 왜곡된 이해가 낱낱이 지적되고 있다. 특히 정치철학 방면에서 아렌트와 깊이 연관된 2권의 저서를 펴낸 바 있는 김비환 성균관대 교수에 대해서는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제기된다. 김비환의 거의 모든 주장에 대해서 저자는 비판하고 반대하고 있다. 김비환뿐만 아니라 10여 명이 넘는 학자들의 저술과 번역서를 꼼꼼히 읽어가며 오류들을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 전반에서 계속 짚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걸 요약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책의 앞부분에서 토크빌과 아렌트에 대한 몰이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두 가지 사례만 먼저 제시하고, 이어서 김비환에 대한 비판만 몇 가지로 요약한다.
먼저 토크빌이다.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미국의 민주주의』는 1997년 한길사에서 나온 것으로 임효선·박지동 공역이다. 1983년에 나온 박지동 번역을 거의 그대로 펴낸 것이며, 임효선이 새롭게 해설을 달았다. 물론 번역에도 문제가 많아 곳곳에서 지적하고 수정하고 있지만, 저자가 정작 문제 삼고 있는 것은 한국 독자들을 위해 쓰여졌다고 하는 임효선의 ‘해설’이다. 아래의 인용부분에서 저자가 지적한다.

“임효선의 해설은 전반적으로 한국인이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쓴 것이라기보다도 프랑스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프랑스인의 견해를 그대로 번역한 듯한 느낌이 강하다. 이는 임효선이 결론적으로 그 책이 “민주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자들과 귀족적인 비판가들의 우려를 동시에 누그러뜨린다.”고 한 점에서도 볼 수 있다(민주1-54). 이는 토크빌 당시의 두 부류 독자들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적어도 ‘귀족적인 비판가’란 존재하지도 않는 한국의 독자들에 적용되는 평가는 아니다. 여하튼 그밖에 임효선은 한국의 독자를 향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야 한국어 번역판에 대한 해설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34쪽)

토크빌을 한국에 번역 소개하는 이유가 너무나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외국이론이나 사상을 기계적으로 번역해온 한국 인문학의 관행을 꼬집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면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번역한 이진우의 경우 아렌트의 사상을 왜곡하고 있어서 문제가 된다. 아래 인용부분이 저자가 이진우 계명대 교수에게 가한 비판의 내용이다.

“『전체주의의 기원』 해설에서 이진우는 책의 어느 구절을 인용하며 전체주의가 사라지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민주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시대착오”이고 “진부하기조차 하다”(전체1-13)고 하여 아직도 우리는 전체주의에서 살고 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 책을 든 나 같은 독자를 창피하게 만든다. 이진우는 이어 그 책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정치혐오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정치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인식이 보편화되면, 즉 정치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심화된다면 우리의 자유도 역시 위험해진다.”고 한다.(전체1-15) 이는 지금 우리의 자유가 위험한 것이 정치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태도 탓이란 뜻인가?…적어도 아렌트는 이진우처럼 우리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는 않았고, 미국민주주의를 비롯하여 현대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적 위기에 처해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진우는 “다른 전체주의 이론과 아렌트의 차이는 홀로코스트”에 있다고 한다.(전체1-21)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홀로코스트는 모든 전체주의이론의 핵심이 아닌가? 홀로코스트를 다루지 않은 전체주의론이 있는가? 나아가 이진우는 전체주의의 ‘절대 악’을 초래한 것이 ‘옛 정치’라고 한다.(전체1-21) ‘옛 정치’란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진우는 설명하지 않으나, 다시 “전체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적 요소는 근대사회에 만연한 ‘쓸모없는 존재’의 경험”이고 이는 “대중사회가 출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전체1-25) 이진우는 아렌트가 ‘쓸모없는 존재’를 폭민이라고 했고 따라서 “전체주의는 간단히 말해 폭민의 정권”이라고 규정한다.(전체1-26)
그러나 아렌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제국주의 시대에 등장한 ‘폭민’은 전체주의에서는 몰락하고 전체주의는 폭민과는 다른 대중의 시대에 등장한다고 한다. 여하튼 이진우는 21세기의 대중사회는 “개인의 인권과 개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전체1-27)고 하는데 그것이 앞에서 본 이진우의 ‘민주주의관’과 같이 21세기 ‘대중사회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렌트의 20세기 것은 아니다. 아렌트는 20세기의 대중사회를 개인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개성이 아닌 획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보았다. 이처럼 이진우의 이해는 아렌트의 이해와 너무나 다르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서론일 뿐이고, 본론에 들어가면 국내에 토크빌을 소개한 노재봉, 진덕규, 김성건, 백완기 등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반박한다. 또한 아렌트 전문가로서 김비환, 김선욱, 홍선표, 강정인 등에 대해서도 아렌트 사상의 핵심을 무엇으로 보는지, 아렌트를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로 구분하는 문제에서 이들이 어떻게 보는지, 아렌트에 대한 비판에 대한 이들의 옹호가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지 등을 꼼꼼히 살피고 있다. 여기에서는 본론에 나온 김비환에 대한 비판 부분만 하나의 사례로 제시한다.

1) 김비환은 『축복과 저주의 정치사상』에서 아렌트가 말한 ‘축복의 정치’가 “전적으로 새로운 인간과 사회를 만들려는 조직적인 대중동원운동”이라고 말하는데, 과연 아렌트가 말하는 ‘축복의 정치’일까? 도리어 이는 아렌트가 말한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의 ‘저주의 정치’가 아닌가?(42쪽)

2) 김비환은 아렌트가 독일 낭만주의 및 자각한 파리아로서의 삶을 산 바르하겐을 연구하여 완성한 『라헬 바르하겐』으로 “하이데거의 주술에서 비로소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평생 추구한 사상의 기본이었다.(290쪽)

3) 아렌트를 “책임감 없는 공허한 급진주의자”니 “맹목적인 급진주의자”로 보는 비판자들에 대해 김비환은 그들이 아렌트의 “자각한 파리아의 정신성에 관한 이해”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라고 한다. 그는 “자각한 파리아”란 “동화주의적 길”이 아니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를 고수하면서 정치공동체를 결성하고자 투쟁한” 것이고 그것이 “어떠한 철학적 전통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것”이라고 보고 있으나 이는 제국주의나 식민지를 경험한 이면 누구나 경험한 것으로서 제국주의에 반발하는 민족주의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은 아렌트 사상에 대한 비판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304~305쪽)

4)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봤다. 그런데 사실은 반유대주의의 본산지인 영국과 프랑스에는 전체주의가 없었다고 하는 모순을 지적한 비판이 있다. 김비환은 이것에 대해 또 변호를 하는데 “자각한 파리아의 역사인식”은 역사를 인과적 필연성으로 보는 견해와는 다르고 아렌트는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전체주의의 ‘원인’이 아니라 ‘조건’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말장난이다. ‘원인’과 ‘조건’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볼 수 있는 모순은 모순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반유대주의의 본산지인 영국과 프랑스에는 전체주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렌트는 충분히 알 고 있었고, 적어도 영국의 경우 전체주의로 귀결하지 못한 이유도 그 정당제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아렌트가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설명하는 이유는 그 제국주의를 낳은 국민국가의 몰락을 모브의 대두와 함께 본 것이 독일이나 러시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그 관련을 나름대로 추구한다. 그것을 “자각한 파리아의 역사인식”으로 보는 것은 김비환의 자유이겠지만, 적어도 아렌트는 그런 말을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여하튼 김비환의 설명만으로는 그가 애초에 던진 “아렌트는 보수주의자인가 진보주의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306~307쪽)

5) 아렌트는 19세기질서의 3대축으로 국민국가, 정당제, 계급사회를 든다. 이는 우리가 19세기 서양사회를 경제적 인간에 의해 구성된 ‘시민사회’ 내지 ‘시장사회’라고 배워온 것과는 다르다. 아렌트가 말하는 시민은 “공적인 일을 만인의 일로 생각하고 관여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이지 “사적 이익을 척도로 모든 공공제도를 판단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인 부르주아와는 다르다. 김비환은 그러나 아렌트가 이러한 시민과 부르주아의 투쟁을 “근대유럽의 병리현상들에 관한 이야기의 핵심”으로 봤다고 주장하는데, 그렇지는 않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324쪽)

6) 김선욱과 김비환은 『전체주의의 기원』은 『인간의 조건』을 비롯한 아렌트 정치사상과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후자 이전의 초기 저작으로 보고 그 관련성을 부정하여 전자는 간단히 소개하고 후자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아렌트 사상의 전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은 직결되어 있다.

7) 행동의 판단기준인 ‘위대함’은 일상적 행동의 정상적인 기준으로서의 도덕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본다. 여기서 아렌트가 정치에서의 비도덕성 내지 무도덕성을 조장하고 전체주의와 가깝다고 보는 비판이 당연히 나올 수 있다. 이에 대해 아렌트가 말하는 행동이란 “가장 순수하고 전형적인 형태”일 뿐이고, 아렌트는 도덕을 “일상적인 상황에서” “정치를 안정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도덕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김비환237) 그러나 그 근거로 드는 『인간의 조건』의 일절에서 아렌트는 그런 것을 전혀 인정하고 있지 않다. 위 견해도 부연 설명하듯이 아렌트가 도덕을 불신하는 이유는 도덕이 전체주의에서 강조된 탓이라고 이해되는데, 그럼에도 도덕을 무시하고 ‘위대함’이라는 전체주의적 개념을 선호함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이슈 3 토크빌과 아렌트를 읽는가?

“우리가 과연 정말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이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로워야 하나, 민주란 이름 아래 소수나 다수의 폭정이나 전제만이 있고, 또한 극소수의 부자들만이 인간 대접을 받고, 그 아래 신음하는 사람은 없는가? 또는 강력한 중앙집권하에서 몇몇 정치인이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도 몇몇 재벌 자본가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스스로 다스린다는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가장 친숙한 우리 마을을 스스로 다스리는 자치라도 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각종 재판 사건을 우리 자신이 판단하고 있는가? 우리의 여러 가지 이익을 위해 우리가 뭉친 결사의 자치를 통해 공익에 맞는 사익을 추구하고 있는가? 민주주의를 단순히 정치 체제로만 보지 않고 하나의 사회 상태, 나아가 특정한 사고와 감성의 형태인 민주적 모럴을 갖는 인간 유형까지 포함하는 하나의 사회 유형으로 볼 때 과연 민주적 인간으로, 민주적사회에 살고 있는가?”(50쪽)

저자는 우리가 민주적 인간으로 민주적 사회에 살고 있지 못하다는 자각 아래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의식혁명을 통한 생활실천적 과제로 삼기 위해 토크빌과 아렌트를 읽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가능성을 2008년의 촛불에서 발견했다. 이 촛불이 하나의 행동으로만 끝나지 않고 우리의 전체주의적 요소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로 발전하기 위해 토크빌과 아렌트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 중심의 참된 참여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에 대해 천민민주주의라고 비난하는 세력이 도사리는 현실에서 ‘촛불’을 되살려 우리 시민이 직접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참여해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과 주권재민의 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아렌트와 토크빌을 읽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한국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거의 작동하지 않고 있거나 실패했다고 본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참모습은 직접민주주의이고,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일반의 믿음과는 달리 여러 가지로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을 아렌트와 토크빌을 통해서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슈4 토크빌의 주요 개념 – 평등보다는 자유, 그리고 모럴의 중요성
저자는 종래의 추상적 이론 소개의 수준이 아니라 구체적 실천 전략으로 민주주의를 고민하기 위해 토크빌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개념들을 단계별로 짚어보고 있다. 물론 토크빌의 전기적 삶과 저술 연대기, 그의 삶에서 감안해야 할 귀족 출신 성분의 부분 등에 대해서도 짚어보고 나서 토크빌의 기본 개념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토크빌의 기본개념’으로 ‘평등’ ‘사회 상태’ ‘모럴’ ‘자유’ 등을 이야기하고 나서 ‘정치적 자유’와 ‘자유와 평등의 구별’ ‘자유와 평등의 관계’ 등으로 심화시켜나간 뒤 토크빌의 ‘역사관’을 짚고 이 장을 마무리한다.
여기서 저자가 가장 표나게 강조하는 부분은 토크빌이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어떻게 보았나 하는 것이다. 토크빌에게 평등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로 인식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가장 놀란 것은 사회의 전반적 평등 상태였다. 하지만 저자는 토크빌에게는 평등보다 자유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고 말한다. 자유가 토크빌에게 민주주의의 요소가 되는 적극적인 정치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토크빌에 의하면 볼테르조차 영국에서 ‘문학적 자유’만을 보았을 뿐 정치적 자유는 몰랐다. 볼테르는 정치적 자유가 있어야 문학적 자유가 가능하다는 걸 보지 못했다고 토크빌은 비판했다.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도 자유거래나 통상과 산업의 자유방임을 주장했으나 정치적 자유에는 무관심했다고 토크빌은 비판한다. 토크빌이 보기에 1789년의 프랑스혁명 때 프랑스인들은 평등과 자유를 함께 추구했으나, 10년 뒤에는 더 이상 자유를 사랑하지 않고 단지 세계 지배자의 평등한 노예가 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유럽의 민주주의가 미국의 그것에 뒤떨어지는 핵심적인 이유다. 토크빌에게 자유란 단순한 물질적 이익이 아니라, 그리고 도덕적 의지만이 아니라, 인간이 전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정치적으로 추구해야 할 권리이고, 적극적인 정치적 개념이다. 그 기본은 마을자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직접민주주의 차원의 정치적 권리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강정인 교수의 토크빌 이해를 비판한다.

“1990년 영미에서 돌아와 1993년 강정인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적 초상』이라는 책의 ‘토크빌과 현대’라는 글에서 토크빌을 보수주의자나 자유주의자로 보기 어려운 복잡한 사상가로 해석한 것을 읽고 그를 민주주의자라고 보아온 나는 실망했다. 특히 강정인이 토크빌은 자유를 개인에게 도덕적 행위를 가능하게 한다고 보았음을 강조한 점에, 토크빌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로 이해한 나는 찬성하지 못했다. 1993년의 한국현실에서 자유를 도덕적 행위로 보는 강정인의 토크빌해석은 크게 설득적이지 못했고,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적 자유를 자치의 차원에서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60쪽)

토크빌이 보기에 유럽은 노예 상태의 평등이었다. 자유 없는 평등, 직접민주주의적 요소와 지방분권적 요소를 결여한 민주주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혁명이후 프랑스 사회를 민주적 전제주의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마을자치, 사회적 결사자치, 재판자치인 배심제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크빌은 19세기 프랑스를 지겹게 경험했다. 적대적인 귀족 세력을 파괴하는 데 전념했던 그 독립적인 사람들이 정녕 자유의 도움을 받아 평등이 실현되자 자유를 도외시한 채 기꺼이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협력하고 중앙집권화가 도래되게 하고, 그로써 사회가 무력화되게 만드는 것을 말이다.
또하나 토크빌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모럴’이다. 모럴은 ‘사람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개념과 견해, 그리고 심성을 구성하는 사상의 총체, 사회의 관습, 풍속, 도덕까지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단순히 관습이나 습속, 마음의 습속 등으로 번역하기가 마땅치 않아 저자는 그냥 모럴로 사용하고 있다.
토크빌은 모럴이 미국의 민주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민주권의 원칙이 모럴로 인정되며, 그것들에 근거해서 법이 운용되고 있었다. 반면 유럽에서는 나라의 지리적 위치와 법이 미치는 영향이 모럴에 비해 과장되어 왔다. 하지만 토크빌은 모럴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유리한 자연환경과 훌륭한 법이 있다고 해도 그 나라의 모럴이 알맞지 않으면 어떤 제도도 유지될 수 없다. 반면 어느 나라의 모럴은 가장 불리한 자연환경과 가장 열악한 법을 어느 정도 유리하게 전환시킬 수 있다. 내가 독자에게 미국인의 실천적인 경험, 습관, 사고법, 간단히 말해서 민주 제도의 유지에 미친 모럴의 중요한 영향력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면, 나는 나의 작업의 주요한 목적에 실패한 것이다.”(121쪽)

토크빌이 관찰한 미국인의 모럴은 동부 마을의 주들에서 살펴졌다. 여기에선 주민들에 대한 공공 교육과 실제적인 학습이 완비되어 있었고, 종교는 아주 철저하게 자유와 결합되어 왔다. 이런 환경에서 민주정치가 주민들의 관행, 견해, 법적 절차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것이 미국인의 모럴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토크빌의 이론을 빌어 한국을 본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방분권적 민주주의의 모럴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토크빌의 아래와 같은 말이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라며 인용한다.

“국민들을 정부에 참여시키는 일도 어렵지만 국민들에게 경험을 제공하고 국민들에게 그들이 더 잘 통치하는 데 필요한 감정들을 불어넣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민주정치가 지향하는 바는 변덕스럽고 그 법은 불완전하며 그 통치 도구도 엉성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다만 전제와 민주정의 중간단계가 없다면, 그리고 완전한 평등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전제자 쪽보다는 자유로운 제도에 의해서 평등화가 이뤄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122쪽)

토크빌의 기본 개념을 살핀 뒤 박홍규 교수는 『미국의 민주주의』라는 방대한 책을 총 5장에 걸쳐 서평식으로 꼼꼼히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의 ‘에세’식 글쓰기에 의해 비체계적으로 쓰여진 책을 한국 독자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의 제 1요인인 ‘자연환경’, 제2요인인 ‘법’, 제3요인인 ‘민주적 모럴’로 나누어 풀이하고, 토크빌의 민주주의 이론의 문제점과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문제점, 그리고 토크빌이 본 미국과 지금의 미국이 무엇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를 짚어보면서 토크빌에 대한 글을 마무리한다. 요약하면 19세기의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가 그 독특한 자연환경과 법제도, 그리고 모럴이 형성한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로서 사회의 전반적인 평등을 이뤘는데, 그 평등이 지나쳐 자유 없는 평등이 되면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져 전제주의로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래는 토크빌에 대한 저자의 맺음말이다.

“나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토크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이미 지적했다. 특히 알제리 문제를 비롯한 19세기 당시의 유럽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침략을 지지한 점에서 그가 주장한 민주주의가 의심스럽다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을 주의하면서도, 따라서 당연히 그를 위대한 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로 찬양하는 점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점을 유의하면서도 그가 주장한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에는 경청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토크빌은 인간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제도적 고안을 제시했다. 즉 자유로운 민주주의의 학교로서 마을자치, 결사, 배심 등을 제안했다. 반면 그는 인간의 경제를 수호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기커녕 그것이 자유롭지 못한 민주주의를 초래한다고 우려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토크빌과 달랐다. 마르크스와 토크빌은 모두 19세기 사회를 계급과 혁명의 그것으로 보았으나 그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토크빌은 사회의 평등화를 필연으로 보았으나 마르크스처럼 계급 없는 사회나 국가가 없는 사회가 오리라고 보지는 않았고, 도리어 권력의 확대에 따라 개인이 획일화되어 자유를 상실한다고 보고 그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학을 고민했다. 마르크스에게 계급 없는 사회란 자유와 평등의 나라를 뜻했으나, 토크빌에게 계급 없는 사회란 자유가 없는 평등사회일 뿐이다.
토크빌은 도리어 니체나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생각이었다. 토크빌의 영향을 받은 부르크하르트도 전제의 출현을 예언했다. “군사국가는 대제조업자가 되기 마련이다. 대공장에 집결된 인간들은 가난과 탐욕의 상태에 마물러 있지 않을 운명을 지니고 있다. 각자의 승진이 보장되고 모두 제복을 입고 북소리로 하루가 시작되고 끝나는, 어느 정도 한정되고 감독받는 빈곤-이것이 논리적으로 닥쳐올 일이다.”(메이어190) 토크빌과 니체 그리고 부르크하르트는 대중사회에 대한 순응을 거부한 새로운 문화적 불순응주의자(a new cultural nonconformism)의 원형이었다. 또한 이 책의 제1장에서 말했듯이 그는 당대 사회에 대한 반역아였다. 즉 평등을 자유보다 우선한 당대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평등보다 자유를 앞세웠고, 의회민주주의보다도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토크빌의 현대적 의의를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대해 토크빌 연구의 분수령이었다고 평가되는 메이어는 토크빌의 목표란 권리와 의무가 충분히 관련되는 정치철학이라고 하며, 이는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복지국가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메이어 202-203). 그러나 과연 토크빌이 그런 주장을 했을까? 토크빌은 자유 없는 평등을 비판한 점에서 도리어 복지국가의 이념과는 상반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앞 제2장의 토크빌의 생애에서도 보았듯이 토크빌은 당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현대의 복지주의에 대한 선구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그 복지=평등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자유를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슈5 토크빌과 아렌트의 공통점과 차이점
이 책은 절반은 토크빌, 나머지 절반은 아렌트에 할애되어 있다. 아렌트에 대한 이야기는 그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명확히 밝히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렌트는 토크빌이 우려한 전제주의가 20세기에 들어와 전체주의를 낳았다고 분석하고, 전체주의를 벗어나는 길이 미국 민주주의인데, 그것마저 이제는 전체주의에 빠졌다고 보았다. 아렌트와 토크빌은 기본적으로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많이 다르다.
우선 아렌트는 미국 민주주의의 형성 요인으로 자연환경과 법제도는 중시하지만, 모럴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렌트는 양심이나 도덕, 윤리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는데, 이것은 비교적 낙관주의적이었던 토크빌과 달리 그녀는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더욱 큰 차이는 토크빌이 미국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가 평등에서 나온다고 본 데 비해 아렌트는 그 평등이라는 계기를 상당히 무시하고, 주로 자유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토크빌이 자유와 평등의 일치 내지는 조화를 주장한 반면, 아렌트는 자유와 평등을 철저히 구분한다. 자유는 공적인 것이고 평등은 사적인 것이라고 아렌트는 구분한다.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문제점으로 본 평등은 아렌트의 경우 자유를 파괴하는 기술문명이 낳은 문제점이지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본 요소가 아니다.
두 사람은 역사관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토크빌은 그리스.로마 문명도 자유와 평등을 부정한 귀족주의로 보고 현대 민주주의와 대립시킨다. 반면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이상향으로 삼는다. 공과 사에 대한 아렌트의 구분, 행동과 노동에 대한 구분도 모두 여기서 빌려왔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토크빌이 평등의 민주주의 시대라고 본 19세기의 현대란 아렌트의 경우 20세기 전체주의를 낳는 기원이 된다. 아렌트는 19세기 국민국가가 제국주의에 의해 해체되어 전체주의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렌트의 전체주의는 그 자체로 독보적인 새로움을 지니는 관점이다. 그것은 어떤 역사적인 인과관계 끝에 도출된 개념이 아니다. 그 새로움을 아렌트는 ‘근원적 악’ 또는 ‘절대악’이라 부르는 테러로 본다. 아렌트는 테러(홀로코스트)를 역사적인 인과관계를 단절시키는, 아니 인간성을 바꾸는 극단적인 악으로 묘사해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극적인 묘사를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이 절대악이 사실은 굉장히 평범한 사람에 의해 자행됐다며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다. 전체주의에서 살든 민주주의에서 살든 대부분의 사람은 평범하고 노동하여 생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아렌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같은 상황이라도 모든 사람이 아이히만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로마의 민주주의에 대한 아렌트의 관점에서도 저자는 의문을 표한다.

 

이슈6 미국 정치제도에 대한 아렌트의 분석과 문제점
하지만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크빌의 입장에서 그를 이해했듯, 아렌트의 입장에서 그의 시대에서 아렌트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렌트의 전기를 따라가면서 아렌트의 마지막 저서인 『공화국의 위기』(1972)를 맨 처음 언급한다. 아렌트의 마지막 저서가 국내에 가장 먼저 번역 소개된 것이다.(1979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불복종’의 개념이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나 소로가 말하는 시민불복종과 같은 주관적인 양심에 근거한 개인의 저항과, 자신이 말하는 시민불복종을 구별했다. 그리고 권력을 발생시킨 약속, 원초의 계약, 동의가 파기될 때에만 시민불복종이 정당화된다고 보았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분명 정당하지 않은 것은 아닐진대 아렌트는 왜 굳이 그런 구분을 하는가. 저자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었다.
아렌트는 시민불복종을 토크빌이 말한 자발적 결사, 즉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하는 결사가 아니라, 특별한 윤리적인 동기에 의한 한정된 구체적 목표를 위해 만들어지고, 그 참가 자체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정치적 경험의 새로운 형태라고 보았다. 아렌트는 시민불복종과 자발적 결사는 미국에서는 볼 수 있으며,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조종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시민적 불복종이 아니라고 보았다.
저자는 아렌트의 이러한 좁은 결사 개념보다, 일시적인 학생운동 조직은 물론 항구적인 시민단체나 정당, 심지어 지방자치단체나 교회도 포함되는 대단히 광범위한 토크빌의 결사 개념이 한국 민주주의에서 더욱 유용하다고 평가하면서 본인에게 ‘최초’의 인상을 주었던 아렌트의 ‘시민불복종’ 개념을 정리하고 있다. 물론 시민불복종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토크빌이 말한 결사에서 아렌트가 빌려와서 변형시킨 것이다.
그것은 저자가 민주주의적 관심을 가지고 아렌트에게 나아간 첫걸음이다. 『혁명론』에서도 아렌트는 토크빌과 같은 논지에 선다. 여기서 아렌트는 “혁명의 목적인 자유의 창설이다”라고 선언한다. 혁명에서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중시한 마르크스주의의 혁명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렌트는 정치 형태의 변혁이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그런 점에서 미국 혁명은 성공적이라고 분석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혁명은 공포정치로 타락했다. 반면 미국은 독립선언 중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에서 행복이란 프랑스 혁명 당시의 ‘재산’을 바꾼 말로, 이는 ‘재산’으로 상징되는 경제활동 등의 사적 행복의 추구가 아니라, 공적행복의 추구, 즉 정치참가의 권리를 뜻한다고 아렌트가 보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계속 이러한 정치적 혁명이 어떻게 제도화되는지 아렌트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아렌트는 미국 혁명의 목적인 자유의 제도화가 미국 헌법이라고 보았다. 그것의 본질적 의의는 시민적 자유의 보장이 아니라, 인민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화하는 행위로서의 자유 창설을 위한 새로운 권력 시스템의 수립에 있다. 식민지 시대에 이미 수립된 지방자치체가 미국 권력의 원천이었고, 이것이 혁명 후 여러 차원의 자치체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연방이나 주의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 제정권력의 근거는 언제나 하위 차원의 자치체 조직이었다. 이 점도 토크빌과 아렌트가 유사한 대목이다.
아렌트는 미국 정치체의 특색을 네 가지로 보았다. 첫째, “권력은 인민에게 있다”는 공화정의 기본원칙을 구현하는 것이다. 둘째, 주권 없는 권력의 존재를 구현하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상호적이고 수평적인 약속에 따라 정치체를 만든다는 발상은 정치체가 서로 연합하여 확대된다는 연방제를 향하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넷째, 그러한 원칙에서 정치체를 만들었으므로 정치체의 기초로 국민이나 민족, 또는 역사와 기원의 동질성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구성원의 균질성 대신 정치체를 공동으로 이룬다는 결의만이 요구되었다.
아렌트는 나아가 미국의 정치체가 로마 공화정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보았다. 로마 공화정의 본질은 키케로의 “권력은 인민에 있고, 권위는 원로원에 있다”는 말에 집약되어 있는데, 미국 헌법에서도 “권력은 인민에 있다”고 규정됨과 동시에 그 권위는 로마의 원로원에 해당하는 상원이 아니라 헌법과 연방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사법제도와 미국 특유의 위헌입법심사권에 의한 ‘연속적 헌법 제정’이라는 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저자는 이러한 아렌트의 미국 헌정질서에 대한 분석도 토크빌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아렌트는 미국혁명이 완전히 성공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행복의 추구”가 공적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적 이익의 옹호가 아니라 공적 이익의 옹호를 위한 시민의 자치적 정치 참가는 실패했으며, 정당제에 의한 과두정으로 타락했다고 평가했다. 이 점에서 아렌트의 분석은 토크빌의 그것과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렌트는 토크빌과 마찬가지로 경제적 부를 미국 혁명을 성공시킨 또 하나의 예외라고 보면서도 노예제와 흑인 노동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결국은 그러한 번영이 자유의 정신을 상실케 하여 전체주의를 초래했다고 봤다.
아렌트는 점점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회의했으며, 지역평의회 등에서 행동 중심의 정치상과 연결되는 희망을 보았으나, 이러한 아렌트의 평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자발적 참여’에 기초하기 때문에 결국 엘리트들만의 잔치가 될 수 있다는 우려와 비판을 낳았다.
마지막으로 아렌트는 미국의 풍요는 빈민들에게 하나의 이상이 되었고, 그것이 결국 미국의 자유정신을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현대 미국의 막대한 부는 정치적 자유의 제도화, 정치적 자유의 정신, 공적 행복의 추구, 공적 생활에 대한 열의라고 하는 공화제 정신의 전제가 되는 물질적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파괴하여 미국 헌법 체제와 모순을 야기하며 결국은 전체주의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같은 아렌트의 미국사회에 대한 분석의 궤적이 토크빌의 연장이자 발전이었다고 말한다. 즉 시민자치의 민주주의만이 참된 민주주의고, 경제적 이기주의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는 결코 참된 민주주의가 아니며 도리어 그것을 타락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정당을 비롯한 기성 조직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이들이 주도가 되는 참여민주주의를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아렌트의 직접민주주의는 자치민주주의에 가깝다고 본다. 아렌트는 결국 정당제하에서는 시민이 공적 문제에 참여할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의회제는 과두정이라고 보고, 평의회제 자치민주주의를 주장한 것이었다.

 

이슈7 “현재 한국은 자본과 정부가 ‘결혼’을 감행했던 19세기 서양과 유사한 상황이다.
이상 맛보기로 아렌트와 토크빌을 비교한 저자는 이어 본격적으로 아렌트에 대한 깊이있는 탐사에 들어간다. 아렌트의 삶, 『전체주의의 기원』의 기본개념(제국주의, 전체주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점, 아렌트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아렌트의 서양 정치사상 비판 등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결론으로 토크빌과 아렌트를 비교하고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밝힘으로써 책 전체를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전에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아렌트와 한국’이라는 주제를 간단히 환기시키고 있다. 길게 이어질 이론적 논의에 파묻혀 우리가 왜 지금 아렌트를 읽고자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흐려지지나 않을까 하는 저자의 우려가 여기에 듬뿍 묻어난다.
첫째, 현재 한국의 상황은 서양에서 19세기 말 사업가가 정치가가 되는 제국주의 시대와 유사하다. 그 전에 부자 사업가들은 경제적 지배에만 혈안이 되었고 성가신 정치는 강력한 독재에 위임했으나 19세기 말의 경제적 위기가 부자들을 정치로 몰아갔다고 본 아렌트에 의하면, 부자들의 경제가 정치를 정복한 결과 정부는 사적 이익을 위한 겉치레로서만 봉사하게 되어 정치의 타락과 시민의 몰락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사적인 이해관계와 책략이 공적인 문제의 처리를 위한 원리로 변형되었고 사생활의 무분별성이 공적으로 존중된 정치적 원리로 고양되어 정치와 정부가 집단적 가정 관리 및 부의 관리와 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탈바꿈했다. 아렌트는 이것이 탐욕과 자만, 아첨과 위선, 사회의 원자화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를 낳아 결국 20세기의 전체주의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저자는 CEO 출신 대통령이 사적 이윤추구를 극대화하는 기업 총수의 전략을 그대로 국가라는 공적 이익의 공간에 도입하여 대기업 중심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 현재의 한국이라고 본다. 19세기와는 또다른 새로운 사적 권력정치와 대기업 중심의 금권정치를 결과하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고 말한다. 심각한 도덕성 시비에 휘말렸던 부자 사업가 출신 대통령을 비롯하여 총리나 장관 내정자 또는 청와대 수석 후보자들이 모두 부자로 그 부의 축적이나 여타의 도덕성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나, 특히 청와대 사회수석이 표절이나 노동문제나 사회정책 때문이 아닌 가정관리 전공자이기에 문제라는 점도 아렌트가 본 서양 근대사의 문제점과 일치한다.
둘째, 더욱 심각한 것은 아렌트가 소위 엘리트들이 서양의 전체주의화 과정에 기꺼이 동조했다고 본 점이 우리의 대학가나 언론계 등에서도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아울러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반으로 분석한 원자화한 대중, 특히 폭민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모브(mob)의 출현을 최근의 숭례문 방화범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볼 수 있는 점도 서양 근대의 세기말 현상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이슈8 아렌트에 대한 저자의 문제제기(아래는 본문인용)

아렌트 ‘노동’ 개념의 문제점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렌트는 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나 농업, 어업, 축산이나 빵굽기나 사냥, 또는 청소나 설거지 등을 그 보기로 볼 수 있으리라. 만일 그렇다면 이러한 노동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련 없는 것이라든가, 뒤에 남기는 영속적인 것이 없다고 하든가, 내구성과 영속성이 없다고 보는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농업은 식사를 위한 곡물을 만들뿐만 아니라, 그 기술이나 농원과 시골이라는 공간을 남기며, 내구성과 영속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
물론 아렌트는 이런 농업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에 의해 직인의 기술이 노동으로 바꾸어져 본질적으로 소비되는 것에 그 특징이 있는 현대적인 노동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나 아렌트가 그런 노동을 중심으로 논의한다고 해도 전통적인 노동을 그런 현대적 노동으로 이해하는 점에는 문제가 있다.
도리어 아렌트가 말하는 ‘노동’ 개념으로는 현대 농업의 산업화라고 하는 ‘노동’ 자체의 변화에 의한 농민의 ‘부자유’ 강화를 설명할 수도 없다. 아렌트가 말하는 공동의 정치행동이 초래하는 자유라는 의미에서 보면 전통적 노동이 반드시 자유였다고 할 수도 없고, 부자유였다고도 할 수 없다. 전통적 노동이 농노나 노예에 의한 경우는 물론 ‘자유’롭다고 할 수 없으나 자영농민이 누린 ‘자유’도 어느 정도로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반면 아렌트는 ‘노동’의 경우 본질적으로 ‘자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노동관은 노예소유자였던 전통적 지배계급의 ‘노동’관과 무엇이 다른가? 사실 아렌트의 ‘노동’관은 그의 ‘제작’이나 ‘행위’ 개념과 마찬가지로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그리스 도시국가를 모델로 하여 구상된 것임은 분명하다.

아렌트의 ‘판단력’ 개념에 대한 검토
위에서 보았듯이 아렌트 연구자들 중에는 “아렌트가 정치행동 중심으로 판단을 하다가 사유중심의 판단이론으로 전환한 것은 자기모순을 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아렌트의 이론 가운데 삼투된 칸트의 ‘인류의 연합’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보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 등이 있다.(빌라173이하;김선득101)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칸트만이 아니라, 모든 서양정치사상을 부정하고 그러한 ‘인류의 연합’ 등의 추상적 관념을 거부한 아렌트의 기본입장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특히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로 삼는 아렌트 만년의 [정신의 삶]에서도 아렌트는 여전히 행동과 판단력을 구별하면서 그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일에 회의하고 심지어 그 통일의 위험성을 지적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이데올로기를 분석한 바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란, 인종차별이라든가 계급투쟁이라고 하는 하나의 사고를 진리로 단정하는 것인데, 그 최대의 특징은 처음부터 그것만으로 역사 전체를 완벽하고도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연역함에 있었고, 동시에 그것에 완벽하게 복종하도록 요구하고 관철함에 있었다. 그러한 이데올로기 하에서 행동은 판단력은 없어진다. 아렌트는 이어 그것이 뒤에서 보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정치사상의 전통에서 비롯된다고 보아 그것을 철저히 비판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아렌트의 판단력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아렌트가 말하는 판단력은 어디까지나 판단의 문제, 즉 사고의 문제이지, 행동의 문제는 아니다. 또한 아렌트는 반드시 나무꾼의 판단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고, 관련자와 관찰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판단력에 의한다고도 보지 않으며, 도리어 자립한 판단력이라고 하는 더욱 포괄적인 현상에 따르는 양극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렌트에 의하면 각자가 사고하여 판단하는 것과, 타인과 함께 행동하는 것은 서로 견제하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아렌트의 판단력이 정치이론과 정치실천 사이의 괴리를 매워주는 다리라고 보는 것은 아렌트의 사상에 대한 중대한 오류다. 특히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경험으로부터 가정된 진리 따위에 의한 판단을 철저히 경계하는데, 칸트가 말하는 ‘인류의 연합’ 도 그런 것일 수 있다고 본다. 아렌트는 그런 의미에서만 판단력이 “인간의 정신능력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그야말로 앞에서 말한 ‘경쟁적 정신’에 의해 판단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아렌트가 판단력이란 개념에 의해 정치행동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세웠다고 보지 않는다. 그녀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는 자유로운 자치의 인간이 갖추어야 할 판단력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아렌트의 본심이니, 이를 대단한 정치이론으로 볼 필요가 없다. 아렌트는 그것으로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고자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갈등이란 아렌트가 보기에 민주주의에 당연한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소위 ‘문화정치시대’에 대단히 유용한 개념이라고 볼 수 없다.

아렌트 행동 개념의 문제점
아렌트는 소크라테스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이 활동적 삶보다 관조적 삶을 중시했는데, 이를 키에르케고르, 마르크스, 니체가 전복시켰으나, 활동적 삶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본다.(과거41)
아렌트의 행동 개념은 정치를 시민에 의한 지속적이고 직접적인 개입이라는 맥락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아렌트는 자유주의가 정치의 중심으로 보는 법과 제도란 행동을 위한 틀의 제공에 불과하다고 본다. 또한 자유주의는 정치를 ‘사익들의 시녀’인 도구라고 보는 반면 아렌트는 정치라는 ‘공적인 것’은 경제라는 ‘사적인 것’과 별개라고 보고 정치의 독자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아렌트의 주장이 참여민주주의론이나 분권민주주의론은 물론 비판이론에서 당연히 수용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하버마스 등의 비판이론은 그 선구자들인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을 필연적으로 전지구적 지배라는 특성을 담지한 이성을 위한 가면이라고 비판한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들의 이성의 총체적 비판은 거부하고 합의적 합리성을 밝히려고 했다. 마르크스의 노동은 행동과 제작을 혼동하였고 베버의 합리성도 행동을 부정하므로 그들은 아렌트의 행동 개념에 의존하여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빌라29)
한편 공동체주의자들은 정의를 하나의 원리에 의해 독립적으로 설명하는 보편주의적인 계몽주의, 특히 칸트나 롤즈를 비판하고 공동체에서 발견하고자 하는데, 이는 아렌트의 ‘공적인 것’도 공동체를 전제한다는 점과 일치한다.
아렌트의 논의는 플라톤을 비판하는 것에 시작하지만 그녀의 기본개념들이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비시킨 ‘실천’과 ‘제작’이라는 개념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아렌트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해는 그를 소크라테스학파의 철학자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폴리스인들의 상식과 실천을 전하는 입장에서 보는 것이었다. 아렌트는 그런 그리스 전통의 계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그녀의 ‘행동’에는 지극히 근대적인 개인주의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아렌트에게 가장 호의적인 논평가들조차도 아렌트가 칸트 이래 독일 철학계의 직업적 모험이었던 희랍복고주의에 편승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아렌트가 “이론틀로서 폴리스를 포기하면서도 호머나 니체의 영웅적 행위 찬미로 돌아서는 데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고 지적”한다.(빌라23)
심지어 아렌트의 행동 개념은 파시즘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파시즘의 비합리주의가 사고와 발언을, 행동을 저해하는 방해물로 보는 반면, 아렌트는 사고와 행동, 발언과 행동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김비환112) 또한 아렌트가 행동을 자율성의 현시로 봄에 반해 파시즘은 “민족, 인종 및 생 자체의 비합리적 힘에 따라 조종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한다.(김비환109-110)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아렌트의 ‘행동’ 개념은 더욱 더 본질적인 의미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즉 낭만적, 비실제적, 미학적, 연극적, 공상적, 개인주의적, 영웅주의적, 경쟁지향적, 전체주의적, 표현주의적이라는 등등의 비판이나 그것이 비공리주의적, 무목적적, 비전략적이므로 “전략적·도구적 측면을 결여하고 있어서 그 점이 보완되어야만 빈틈없는 개념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비판 등이다.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아렌트의 문장을 인용하여 반박하면서 가령 행동은 동기와 목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아렌트가 주장했다는 비판이 있다.(김비환112) 그러나 이런 비판으로 앞의 비판을 다 극복할 수 있는가?

아렌트의 서양정치사상 비판의 문제점
아렌트는 서양 정치사상이 20세기의 정치인 전체주의는 물론 민주주의를 고찰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보았다.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본 아렌트의 ‘활동적 삶’의 세 가지를 아렌트 서양정치사상 비판의 준거로 삼을 수 있다. 그 세 가지 중에서 아렌트는 ‘행동’이 바로 본래의 정치적인 것이고, 나머지 둘은 그렇지 않은데 정치를 그 두 가지로 혼동함에 의해 문제가 생겼다고 본다.
첫째, 정치를 ‘제작’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것이다. 즉 정치를 미리 준비된 모형에 따라 사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으로, 이는 정치를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보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것이 플라톤에서 비롯되는 정치와 철학의 대립에서 나왔다고 본다.
둘째, 정치를 ‘노동’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것이다. 즉 정치란 ‘생명의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지만, 고전경제학의 공리주의적인 인간관을 전제로 하는 자유주의도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아렌트는 본다.
한편 아렌트는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 창시한 우리 정치사상의 철학적 전통은 폴리스와 시민 사이의 극명한 대립 속에서 수립되었다”(과거215)고 하면서 그런 정치사상가들과 정치이론가들을 구별한다. 아렌트는 정치적 경험을 통하여 정치를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한 후자로 마키아벨리, 토크빌, 몽테스키외, 제퍼슨, 페인 등을 들고 있다.
아렌트는 서양정치사상은 대부분 ‘정치로부터의 탈출’이었다고 말한다.
(……)
서양정치사상에 대한 아렌트의 결론은 공적 영역은 ‘자유의 영역’이고, 그 ‘자유의 조건’이 사적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서양정치사상 비판에는 문제도 많다. 우선 아렌트의 비판 자체의 문제가 있다. 가령 아렌트는 “정치행위는 노동활동의 연장이 아니며,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했다고 한다.(김선욱) 그러나 과연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가 과연 그러했는가?
다음 아렌트가 정치이론가로 분류하는 마키아벨리, 토크빌, 몽테스키외, 제퍼슨, 페인 등의 경우 마키아벨리에 대한 설명 외에 다른 이론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보는 지가 명확하지 않고, 그들과 대립된다고 하는 정치철학자들과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특히 플라톤을 비롯한 정치철학자들이 과연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이론가로서의 성격이 전혀 없는지도 의문이다. 즉 아렌트는 모든 이론가나 철학자들을 부분적으로 다루고 그 각자의 전모를 보고 있지 못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현대의 정치사상가들 중에는 아렌트와 달리 플라톤 이래의 본질주의적인 입장을 계승하는 학자들도 많다는 점이다. 가령 현재 미국 우익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한 레오 슈트라우스나 그와 같은 입장의 가톨릭 정치철학자인 뵈겔린의 입장이다. 뵈겔린에 대해서는 뒤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비판하는 자로 언급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만 아렌트와 관련하여 간단히 살펴보자. 아렌트가 정치와 철학이 반복하게 된 계기로 본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슈트라우스는 도시의 한계로 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의 정치’(the politics of philosophy)를 제기한다. 물론 이에 대해 아렌트적 입장에서는 정치를 철학에 종속시켰다는 아렌트의 플라톤 비판을 그대로 비판의 근거로 삼을 수도 있으나(김비환316-317) 우리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입장이 여전히 대세임을 주의해야 한다. 특히 우익적인 슈트라우스와는 전혀 다른 좌익적인 견해들도 정치에 대한 철학의 우월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가령 마르쿠제나 하버마스가 그렇다.
그럼에도 아렌트가 정치와 철학의 왜곡된 결합을 비판한 점은 그 뒤의 학자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고 있다. 가령 플라톤의 ‘진리’를 비롯한 홉스나 로크 등의 자연법론이나 자연권론, 칸트의 ‘정언명령’, 롤즈의 ‘정의의 원칙’,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의 합리성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절대적인 명제들은 도리어 정치를 끝내는 것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된다.

 

목차

머리말

인용 범례와 독서 안내

서론- 왜 토크빌이고 아렌트인가?
왜 토크빌과 아렌트를 읽는가?| 예언자로서의 토크빌과 아렌트| 아렌트에 대한 오해와 이해| 토크빌, 마르크스, 아렌트| ‘민족’과 ‘민중’| 토크빌, 아렌트와 한국

제1부 토크빌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01 나의 토크빌 경험 57
토크빌에 대한 추억과 악몽| 토크빌은 도덕주의자인가?| 민주주의 문화론?| 토크빌 방황| 미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토크빌 독서의 문제점| 토크비로가 한국
02 토크빌의 삶 79
귀족의 성장| 판사생활| 귀족적 자유주의자인가, 자유로운 민주주의자인가?| 토크빌 시대의 미국| 미국여행| 『미국의 민주주의』| 의회활동| 외교활동|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
03 토크빌의 기본 개념 107
평등의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요인| 평등| 사회 상태| 모럴| 자유| 정치적 자유| 자유와 평등의 구별| 자유와 평등의 관계| 역사관
04 민주주의의 제1요인 – 자연환경 142
자연환경| 인디언| 흑인| 동부와 서부
05 민주주의의 제2요인 – 법 153
(1) 인민주권과 마을자치 153
민주공화국 성립요인으로서의 법| 인민주권의 원리| 미국의 마을자치-직접민주주의| 마을자치의 섭리성| 마을의 자치생활| 분권형 민주주의와 집권형 민주주의| 맹목적 애국심과 이성적 애국심| 마을자치의 세 형태
(2) 재판자치 – 배심 170
법률가 토크빌이 본 미국 법률가와 사법| 법률가의 보수적 민주성| 영미법의 민주성| 법정신의 학교로서의 배심| 연방헌법
(3) 결사-공동정신의 학교 184
결사의 긍정| 사적 결사 | 미국 결사와 프랑스 결사의 차이| 결사의 강조와 왜곡| 평등화의 파멸적 효과
06 민주주의의 제3요인 – 민주적 모럴 198
토크빌과 모럴에 대한 기존 논의| 민주주의 사고방식| 종교와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문화| 물질주의의 극복| 민주주의와 모럴의 관계| 민주주의와 상하관계| 민주주의와 여성 및 성| 민주주의와 공적·사적 생활| 민주주의와 군대
07 민주주의의 문제점 225
개인주의 비판| 민주사회의 개인| 전제를 이기기 위한 결사| ‘올바르게 이해된 자기 이익’| 귀족적 인격의 민주적 시민화| 다수의 폭정| 민주적 전제| 전제정치
08 토크빌이 본 미국, 지금의 미국 244
토크빌이 본 미국과 실제의 미국| 기 소르망의 2004년 미국|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 토크빌에 대한 맺음말

제2부 아렌트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01 토크빌과 아렌트 263
토크빌과 아렌트의 공통점과 차이점 | 아렌트를 이해한다는 것| 시민불복종| 미국에 대한 아렌트의 꿈과 악몽 |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 정치적 혁명의 제도화| 혁명에 앞선 빈곤의 해방| 아렌트와 한국
02 아렌트의 삶 288
유대인의 성장 | 베를린과 파리 시절| 미국에서의 초기 사상| 하이데거와의 재회| 『전체주의의 기원』| 1950년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0~1970년대 | 보수주의자인가 진보주의자인가?
03 『전체주의의 기원』의 기본 개념과 독서 안내 310
아렌트 이전의 전체주의론| 『전체주의의 기원』을 준비한 아렌트의 초기 글들| 국민국가냐 민족국가냐?| 아렌트의 전체주의 | 아렌트의 모브와 대중| 『전체주의의 기원』 독서의 문제점
04 아렌트의 제국주의론 322
(1) 아렌트의 19세기 질서론
국민국가| 정당제| 계급사회
(2) 아렌트의 제국주의
제국주의의 성립| 제국주의의 정치관| 제국주의의 과정적 사고| 모브와 자본의 동맹| 국민주의와 제국주의| 인종과 관료제| 인종| 관료제| 대륙 제국주의와 범민족운동| 대륙제국주의와 민족(인종)| 대륙 제국주의와 관료제
(3) 아렌트의 반유대주의
반유대주의| 사회적 반유대주의| 정치적 반유대주의
(4) 19세기 질서의 해체
민족자결권과 ‘소수민족’ 및 ‘무국적자’ 문제| 19세기 계급사회의 해체
05 아렌트의 전체주의론 356
(1) 아렌트의 전체주의론
전체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중의 정치화| 전체주의 운동
(2) 아렌트의 강제수용소
국가기구, 비밀경찰, 강제수용소| 프리모 레비의 경험| 권리, 도덕, 개성의 파괴| 그래도 인간인가? | 새로운 통치 형태로서의 전체주의|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
(3) 아렌트 전체주의론에 대한 검토
『전체주의의 기원』 구성의 문제점| 아렌트의 전체주의 분석에 대한 비판
06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85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재판 ‘쇼’| 양심 문제| ‘근원적 악’과 ‘악의 평범성’
07 미국 민주주의의 문제점 394
전체주의로서의 현대 미국| 인종차별에 대한 아렌트의 ‘이상한’ 주장| 아렌트의 교육관| 대중사회와 문화| 정치와 진리| 정치와 거짓| 아렌트의 폭력론| 평의회제 자치민주주의
08 아렌트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417
(1) 아렌트의 자유와 자치의 인간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전체주의의 기원』과 『인간의 조건』| 공적인 것, 사적인 것, 사회적인 것|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 ‘노동’ ‘제작’ ‘행동’ | 노동, 제작, 행동의 차이| 아렌트 ‘노동’ 개념의 문제점| 제작의 유용성과 영속성| 행동과 제작의 결합이 정치에 초래하는 것| 행동의 동기와 기억의 전달| 행동| 도덕과 ‘위대성’| 판단력| 판단력 개념에 대한 검토| 행동 개념의 문제점
(2) 아렌트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아렌트의 정치 개념| 지배와 권위 | 정치·행동·자유| 아렌트의 경제관
09 아렌트의 서양 정치사상 비판
아렌트는 왜 서양 정치사상을 비판하는가? | 철학과 정치의 대립| 고대 그리스와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중세 기독교 정치사상| 마키아벨리| 프로테스탄티즘| 데카르트 | 홉스| 로크와 루소| 마르크스| 서양 정치사상 비판의 문제점 | 아렌트에 대한 맺음말

결론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
자유와 자치의 민주주의에 대한 토크빌과 아렌트 사상의 비교| 민주주의| 토크빌과 링컨과 카네기| 민주주의와 이기주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미리보기

21세기에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는 것은 토크빌이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본 전제가 아닌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본 마을자치와 결사자치가 이제야 비로소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었고, 재판자치인 배심제는 이제야 겨우 운영되는 단계이며, 기복적인 종교나 출세주의를 지향하는 교육을 비롯하여 모럴은 여전히 천박하기 때문이다. 토크빌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20세기 말에 시작된 한국의 민주화라는 것이 사실은 다수의 압제나 민주적 전제가 될 수 있는 사이비로 흐를 위험성을 너무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한국에서 토크빌은 다시 음미될 필요가 있다.

_75쪽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목적은 권력이나 부의 취득도 아니고 도리어 그것이 가정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완전하게 지배하는 가능성인 ‘전체적 지배‘라고 본다. 그 결과 인간은 더이상 자연이나 역사의 ‘운동의 법칙‘에 저항할 수도, 간섭할 수도 없게 된다. 그 법칙이야말로 전체주의운동이 진행을 가속화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으로서, 전체주의 진전의 이데올로기상 ‘초의식‘을 제공한다. 전체주의의 목표는 그 초의식이 진리라는 것을 주장하여 인류와 세계를 개조하려고 한다. 즉 다윈적 생존 경쟁에서 아리아 인종이 우월하다든가, 계급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필연적으로 승리한다는 ‘진리‘다. 전체주의가 이 계획에 성공하는 것은 테러의 정도에 의한다.

_356쪽

지은이/옮긴이 추천의 글
토크빌과 아렌트가 말하는 민주주의
_고명섭, 『한겨레』 문화부장,『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