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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궁궐 저주 사건
  • 지은이 | 유승훈
  • 옮긴이 |
  • 발행일 | 2016년 09월 05일
  • 쪽   수 | 316p
  • 책   값 | 16,000 원
  • 판   형 | 139*209
  • ISBN  | 9788967353810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수고하지 않고 성공하는 길로는 저주가 최고다!”

조선 왕조의 참혹한 흑역사이자 궁궐의 치욕스런 민낯,
드러나지 않았던 궁궐의 음지陰地,
권력과 암투 속 궁궐 저주 사건을 낱낱이 밝히다

‘저주 사건’을 중심으로 조선 역사를 돌아보는 이 책은 궁궐에서 발생한 아홉 건의 저주 사건을 선별해 그 흐름과 의미를 집중적으로 되짚는다. 저자는 이능화의 『조선무속고』를 통해 조선시대의 저주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중 특히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사건들을 이 책에서 다룬다. 성종 대 저주상자 배달 사건, 중종 대 작서 사건과 목패 저주 사건, 광해군 대 무녀 옥사 사건, 인조 대 저주 사건과 번침, 효종 대 조귀인의 뼈 저주 사건, 숙종 대 장희빈의 저주 사건, 영조 대 무신당의 저주 사건, 정조 대 존현각 자객 침입 사건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조선 역사는 궁궐을 주요 무대로 삼아 왕과 권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중심인물로 조명되어왔다. 이 책 역시 궁궐을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일지 모르나, 그 핵심에 저주 사건이 있고 또 역사에서 배제되었던 무속인들과 권력에서 밀려났던 이들이 사건의 주동자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역사를 쓰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늘지고 음습한 조선 왕실의 한편에서 나라를 뒤흔드는 저주 사건이 끊임없이, 그것도 광범위하게 발생했다는 점이다. 온갖 동물 사체와 뼈가 몰래 궁궐에 묻혔다. 효종 대에는 궐내 저주물을 청소하기 위해 3개월에 걸쳐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당당하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저주 사건은, 말하자면 욕망과 감정의 산물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쟁취의 이면은 혼탁하고 불순하다. 특히 왕권사회였던 조선에서는 왕에게 기대어 권력을 좇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웠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저주’였다. 그리하여 은밀한 정치와 악의적 저주는 한 몸으로 결합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처럼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조선 궁궐의 은밀한 저주 사건을 밝히는 일은 역사의 밝은 면만이 아닌 어두운 면까지 드러내며 ‘성찰하는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줄 것이다.

 

저주의 방법: 벌레를 넣는 것에서부터 사람 뼈와 동물 사체까지

주술적 믿음이 강했던 전근대 시기에는 저주가 반드시 주술적 행위를 동반했다. ‘고蠱’는 그릇 속에 벌레를 여러 마리 넣어두고 서로 잡아먹다가 최후까지 살아남은 벌레를 뜻하는데, 사람들은 이 벌레에 상대를 해칠 힘이 있다고 여겨 이를 갈아서 저주물로 만들었다. 이것이 고독蠱毒이다. 이 고독을 몰래 음식이나 음료에 넣어 먹게 하면 그 사람은 병들거나 죽음에 이른다고 믿었는데, 이러한 저주를 ‘무고巫蠱’라 한다. 도마뱀, 쥐, 고양이, 개, 돼지 등 동물의 사체를 이용하여 저주하는 방식 모두 무고에 해당된다. 이처럼 사람의 뼈나 동물 사체 등을 묻는 방식의 저주를 ‘감염주술’이라 하는데, 이는 머리카락, 손톱, 이빨 등 신체 일부가 사람과 분리된 이후에도 그 사람과 관계가 지속된다는 믿음에서 기반한다. ‘염매厭魅’는 염승과 귀매가 합쳐진 말로, ‘염’은 인형과 화상을 만들어 저주하는 흑주술, ‘매’는 죽은 영혼을 유도하여 해를 끼치는 저주다. 상대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눈과 심장 등을 뾰족한 것으로 찌르거나 그림을 그려 해를 가하는 것으로, ‘동종주술’이라 부른다. 조선시대에 무고나 귀매 등의 저주 행위는 극악무도한 짓으로 처벌받았다. 『대명률직해』는 “고독을 하여 타인을 살인하거나 이를 사주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했으며, 그 실정을 모르는 처자 및 가족들까지 멀리 유배 보냈다. 저주 사건을 획책한 이들도 저주가 참형에 해당되는 죄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주의 유혹에 빠지는 이유는 아무도 모르게 상대를 해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로 저주는 자신의 발등을 찍는 일로 업보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을 때도 많았다. 오히려 가해자가 손해를 보고 피해자는 어떠한 해도 입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저주 사건의 근원에는 항상 ‘권력’이 존재한다. 궐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 왕비와 후궁 간의 암투, 왕에 대한 반역 등이 ‘무고’나 ‘염’과 같은 방식의 저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 책에서 다루는 아홉 건의 저주 사건이다.

 

조선 궁궐의 저주 사건을 들여다보다

· 성종 대 저주상자 배달 사건

왕이 여러 명의 후궁을 두었던 조선 궁궐에서 왕비와 후궁 간의 암투가 끊이지 않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왕에게 총애를 받아야 궁궐 내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 대에는 유달리 왕비와 후궁들 간에 시기와 질투로 인한 다툼이 많았다. 성종은 후궁을 9명 두었고, 그 자식만 해도 28명에 달했다. 1477년, 덕종(성종의 부친)의 후궁이었던 권숙의의 집에 의문의 상자가 하나 배달되었다. 상자에는 엄숙의와 정소용이 꾀를 내어 중궁(왕비 윤씨)과 원자(훗날의 연산군)를 해치려 한다는 내용의 편지와 비상砒霜, 방양서方禳書가 들어 있었다. 비상은 치명적인 맹독성 약품으로 사약을 제조하는 데 쓰였다. 정희왕후(성종의 할머니)는 이 사건의 배후로 후궁 가운데 특히 질투가 심했던 정소용을 의심했다. 게다가 정소용은 임신 중이었다. 궁궐 사람들도 정소용이 왕비를 몰아내기 위해 가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씨가 스스로 꾸민 일이란 게 들통났다. 신하들은 윤씨의 죄를 용서해줄 것을 청했으나, 성종은 윤씨를 빈으로 강등시키고 자수궁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사건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윤씨의 행실은 점점 나빠졌으며 결국 궁궐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윤씨에 대한 앙금이 풀리지 않던 차에 신하들이 윤씨를 감싸고돌자, 성종은 화근을 없애버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비상으로 저주를 계획하다가 도리어 비상으로 만든 사약을 먹고 자신이 죽게 된 것이다. 윤씨의 죽음은 ‘갑자사화’를 일으키는 발단이 되었다. 어미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연산군은 윤씨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을 싹쓸이하여 잡아 죽였다. 저주가 잉태한 거대한 폭력이었다.

· 숙종 대 장희빈의 저주 사건

왕비와 후궁 간의 암투에서 비롯된 궁궐 내 저주 사건에서 ‘장희빈’이라는 이름을 빼놓을 수 없다. 숙종 대 갑술환국(1694)이 단행되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등용되는 바람에 왕비가 되었던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고 인현왕후가 복위했다. 그러나 인현왕후의 삶은 순조롭지 못했다.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숨지고 말았다. 숙종은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저주한 탓에 인현왕후가 숨졌다며 장씨 세력을 국문했다. 무녀 오례가 저주의 화살을 쏘았다는 진술이 확보됐다. “굿을 할 때마다 오례가 활과 화살을 차고 풍악을 울리며 ‘내가 장차 민 중전을 잡아서 쇠그물에 넣겠다’고 했습니다.”(『숙종실록』)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인현왕후는 늘 어질고 착한 왕비, 장희빈은 표독스러운 악녀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실제로 악독한 패륜녀였을까?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의 측근이 그녀의 생애를 소설로 풀어쓴 궁중 서사문학이다. 인현왕후의 생애를 집중 조명함으로써 그녀를 가장 어진 왕후로 받들고 이상화하는 『인현왕후전』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갖가지 저주를 내린 끝에 인현왕후가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못 박고 있지만, 인현왕후의 사망과 장희빈의 저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주 때문이라기보다는 장기간 앓았던 종기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한 기사환국의 여파로 서인은 쫓겨난 반면, 장희빈은 원자를 출산하고 숙종의 총애를 얻어 왕비가 되는 것을 본 인현왕후가 받았을 스트레스도 영향을 주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렇다고 장희빈이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장희빈은 궁궐 저주의 관습에 따라 인현왕후의 거처에 저주물을 묻는 방식으로 인현왕후를 저주했고, 이는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 인조의 후궁 조귀인의 뼈 저주 사건

인조는 맏며느리인 세자빈 강씨를 미워했다. 남편인 소현세자가 숨지자 강씨는 더욱 고립되었다. 게다가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귀인이 강씨를 모함하고 이간질했다. 누군가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온 전복구이에 독을 넣은 사건과 궁궐에서 더러운 저주물이 발견되는 등 저주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자 용의자로 강씨가 지목됐다. 조귀인은 별다른 증거도 없이 강씨가 꾸민 일이라 모함했고, 결국 강씨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인조가 세상을 뜨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국에는 변화가 생겼다. 효종과 발맞춘 산림 세력이 등용된 반면, 조귀인과 김자점은 궁지에 몰렸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효종과 대비를 뼈로 저주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국문하니 조귀인이 저주를 위해 무당을 두었고, 안으로는 여종들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승려들과 왕래하며 왕을 해치려 처소에 저주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귀인의 수법은 엽기적이었다. “종들을 시켜 죽은 사람의 두골, 수족, 치아, 손톱, 발톱, 머리카락과 벼락 맞은 나무, 무덤 위의 나무 등을 몰래 구해오게 했습니다. 또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살점을 떼어오고, 관의 나무 조각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물을 적신 솜, 마른 뼈를 갈아 만든 가루, 심지어는 햇볕에 바짝 말린 닭, 개, 고양이, 쥐 등 저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라면 모아서 들이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효종실록』에 기록된 이와 같은 방식은 영조 대 세자빈 강씨가 저질렀다던 수법과 일치한다. 즉 조귀인이 강씨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웠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산림의 등용으로 위기에 몰린 김자점 일파는 다시 정권을 잡으려고 역모를 꾀하고 있었다. 조귀인과 김자점은 함께 나라를 뒤집고자 안에서는 조귀인이 저주를 벌여 효종과 대비를 죽이고, 밖으로는 김자점이 군사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무산되고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범인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졌지만 궁궐에는 여전히 저주의 뼛가루가 남아 있었다. 효종 대에는 저주물을 치우기 위해 수리도감이 설치되고 2000여 명의 승려가 3개월간 동원되어 조귀인의 저주물을 비롯한 궐내 각종 오물과 흉물들의 대대적인 색출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궁궐 내 저주 사건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특이하게도 인조는 궁궐에서 저주물이 발견되자 이를 치료하고자 번침에 의존하기도 했다. 또한 조선은 유교사회였지만 문화 저변에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불교와 무속이 자리잡고 있었고, 내적으로 무속의 힘이 아주 셌다. 저주 사건 역시 무당이 개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궁궐 여성들은 무속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았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국가 의례를 치르는 나랏무당을 두기도 했고, 전염병 치료를 위해 무당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궁궐 여성들은 평안을 기원하고 저주를 벌이기 위해 궁중 안까지 무당을 불러들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주 사건이 발각되기라도 하면 무당들도 함께 환란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광해군 대에는 유릉 저주 사건을 밝히기 위해 무당 한 명을 붙잡아와 심한 고문을 하자, 장안의 무당을 전부 고발했고, 이로 인해 죄 없는 무당들까지 끌려나와 죽임을 당하거나 옥고를 치르는 대대적인 무당 숙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외에도 영조 대에는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살아남은 잔당들이 궁궐에서 저주를 하고 방화를 일으키려 했으며, 정조 대에는 정조의 즉위로 위기를 맞은 외척 세력들이 존현각에 자객을 보내고 홍국영과 정조를 저주하는 굿을 하며 반정을 모의하는 등 왕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는 궁궐 저주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목차

서문 / 조선의 흑역사, 궁궐 저주 사건

제1부 익명의 저주
1장 성종 대 저주상자 배달 사건
2장 중종 대 작서 사건은 저주인가, 액땜인가
3장 중종 대 목패 저주 사건

제2부 궁궐의 그늘
4장 광해군 대 무녀 옥사의 진실
5장 인조 대 저주 사건과 번침
6장 효종 대 조귀인의 뼈 저주 사건

제3부 역모의 끈
7장 숙종 대 장희빈의 저주 사건: 저주의 화살과 당의
8장 영조 대 무신당의 저주 사건: 독살과 매흉 그리고 방화
9장 정조 대 존현각 자객 침입 사건

보론 / 조선 궁궐 저주 사건의 흐름과 의미

미리보기

‘역사는 오늘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진부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말이 오늘날까지 힘 있게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가치가 여전히 소중한 까닭이며, 역설적으로는 역사가 오늘의 거울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오늘날에도 한편에서 바라본 역사만을 가르치거나, 좋은 역사를 선택하여 보여주려는 식의 일방적 태도가 팽배해 있다. 이렇게 해서는 역사가 오늘의 거울이기는커녕 왜곡과 오류의 드라마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밝은 면뿐만 아니라 어두운 면까지 보여주고 성찰하여 반성하는 역사야말로 진정한 역사다. 그런 점에서 저주에 대한 조명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도ㅠ 엄연히 ‘저주의 시대’가 있어왔고, 암울하고 지긋한 ‘폭정의 시대’에서 숱한 인명이 죽어나갔다. 역사적 인물들이 권력에 낙인찍혀 저주를 당하다가 이슬로 사라진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아니던가. _「서문」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유승훈

낮에는 부산박물관에서 전시기획을 하는 학예연구사이며, 밤에는 역사 속 민중의 풍속을 연구하는 역사민속학자다. 17년째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느라 머리에 백설이 내렸지만 형설지공의 기쁨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낙동강 하구의 염전을 조사해 2007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12년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을 펴내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저술 교양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10년 전 부산에 내려온 뒤 기장군의 동해안별신굿을 보고 매료되어 부산 문화 연구에 뛰어들었다. 부산구술사연구회 연구자들과 함께 부산 산동네를 조사한 뒤에는 부산 사람들의 거칠지만 너그러운 멋에 푹 빠져 있다. 민중생활사와 관련된 20여 편의 논문을 썼으며, 신문과 잡지 등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지은 책으로는『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우리나라의 제염업과 소금민속』(2009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아니 놀지는 못하리라-우리놀이의 문화사』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현장 속의 문화재 정책』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