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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마지막 문장 조선조 500년 글쓰기의 완성 이건창
  • 지은이 | 이건창 송희준
  • 옮긴이 | 송희준
  • 발행일 | 2008년 05월 23일
  • 쪽   수 | 408p
  • 책   값 | 16,000 원
  • 판   형 | 152*223
  • ISBN  | 9788954605472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이건창 문집, 국내 최초로 번역되다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1852~1898)은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생몰연대에서 보듯 그는 19세기의 절반이 꺾어진 무렵 태어나 20세기를 2년 앞두고 죽은 구한말의 지식인이다. 4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건창은 19세기 후반에 정확히 갇혀 있다. 살아서도 그랬고 죽어서도 그랬다. 그는 고종高宗이 인정한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알지 못한다. 글 쓰는 문인들도 이건창이라는 존재를 별로 접해보지 못했다. 그가 남긴 방대한 [명미당집]이 아직 한글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조선의 19세기가 잊혀진 치욕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저술 [당의통략黨議通略]이 번역돼 당쟁사를 연구하는 데 참조가 되기는 했지만 관심이 이건창 개인에게로 뻗치지는 못했다. 이것은 꽤나 비극인데, 왜냐하면 이건창의 삶이 사람을 울리고 때리는 묵직한 문장을 만드는 데 바쳐진 장인의 세월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500년의 글쓰기 전통은 이건창이라는 한 개인의 붓을 빌어 비로소 완성되었다. 현실의 모순과 타협하지 않고 싸우고 싸운 흔적이 역사를 상고하고 문예를 비평하고 정책을 논하고 취미를 완상하고 삶을 철학하는 과정에 순고정대하게 녹아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이건창의 문장이 갖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의 표정이다. 그가 글쓰기의 온갖 요소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전개한 그 귀하고 아까운 현장이 아직 우리의 현재와 접속하지 못했고, 이 시대의 문장론 속으로 갈무리되지 못했다.
그런 안타까움 끝에 [조선의 마지막 문장](송희준 엮어 옮김)이라는 책이 이번에 선보이게 됐다. 이 책은 이건창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는 책이다. 아직 이건창 평전이나 전기가 쓰여질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우선 그가 남긴 글을 번역하는 순서를 밟았다. 대구지역 젊은 학자들에게 “훈장 선생님”으로 통하는 재야 한학자 덕암德庵 송희준宋熹準 선생이 지난 몇 년간 어렵기로 소문난 [명미당집] 전체를 완역했고 특히 뛰어난 명편들과 당대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을 선별해서 보여주고 해설을 붙였다. 시에서부터 다양한 종류의 산문까지 골고루 만나볼 수 있게 했다.

 

이건창은 누구인가? – 1 호랑이 암행어사
이건창의 문장은 그 자체로도 뛰어난 작품이지만, 그의 불꽃같은 삶과 이중주를 이루면 더욱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는 조선의 양명학적 실천을 대표하는 강화학파의 전통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19세기 중엽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에서 당시 이조판서이던 이시원李是遠(1790~1866)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명문가로 손꼽힌다. 직계만 따져봐도 이경직李景稷(1577~1640), 이정영李正英(1616~1686), 이대성李大成(1651~?), 고조부 이충익李忠翊(1744~1816), 증조부 이면백李勉伯(1767~1830), 조부 이시원이 모두 우뚝한 인물이며, 방계로 이경석李景奭, 이광려李匡呂, 이광사李匡師, 이긍익李肯翊 등 수없이 많다. 이처럼 화려한 문벌을 자랑하던 소론 가문은 영조 때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몰락하고 만다.
이건창은 조부 이시원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10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통독했다. 1886년 병인양요 때 장군들이 창칼을 버리고 도망가자 조부 이시원이 이를 한탄하며 양잿물을 마시고 자결하는 것을 목도했다. 그해 이건창은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합격해 최연소 과거 합격자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19세에 옥당에 들어가면서 환로가 시작됐고 23세에는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충청우도 안렴사(암행어사)가 되었을 때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의 은닉 재물을 찾아내고 숱한 비행을 밝혀냈으며 그의 행동을 과민하다고 의심하는 국왕 고종 앞에서 탐관의 만행을 조목조목 낱낱이 알렸다.
서른두 살에 경기도 안렴사가 되었을 때는 연안 13개 고을을 진휼賑恤하고 광주·수원·개성의 세금을 실정에 맞게 덜어주었다. 서울 부시장격인 한성소윤으로 있을 때는 외국 사람이 가옥과 토지를 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그 때문에 청나라 공사의 간섭으로 자리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함경도 안핵사로 나가서는 그곳 감사의 비행을 낱낱이 밝혀 파면시켰다. “지방관이 올바른 행정을 하지 않으면 이건창이 찾아간다”는 말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이건창이 암행어사로 활동하던 시절 송파 마을에 들러 신분을 속인 채 장터의 장사꾼들을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면서 용기를 북돋아준 적이 있었다. 백성들은 그가 누구인 줄 몰랐으나 그가 떠나고 난 뒤에야 그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이에 감동한 백성들이 1883년 5월 그가 머물렀던 장터 입구에 이 은혜를 영영 잊지 않겠다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워 그를 기렸다. 아마 그 당시 이미 힘든 백성들의 대변자로 명성이 높았던 그가 다녀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송파 주민들은 감동을 받았으리라.

 

이건창은 누구인가? – 2 당대 최고의 리얼리스트 문인
이건창은 법률의 문구만을 좇는 도필리刀筆吏(아전을 얕잡아 일컫는 말)가 아니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글귀나 아로새기는 조고가(문필가)로 그치지 않았다. ‘참된 도리’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참된 일’을 실천하려는 강화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남의 아픔을 내 고통으로 느끼는 그의 마음가짐은 양명학자 하곡 정제두 이후로 강화학이 지켜왔던 실천 내용이었다. 또한 일의 성패보다는 동기의 순수성이 문제일 따름이라는 것은 조부 이시원의 가르침이었다.
이건창의 이런 치열한 현실 탐색은 불멸의 현실주의 문학을 낳았다. 충청우도를 암행할 때 죄인을 신문하고 쓴 시 [녹수작錄囚作]에서 이건창은 “피맺히는 고통을 모르고 돈 먹는 달콤함만 말하다니 너희들도 사람이거늘 살가죽이 어찌 견디랴” 하고 “채찍 하나 회초리 하나에도 혹 상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차라리 관대하다는 잘못이 있을망정 내 마음은 본디 이와 같도다”라고 하여 탐욕에 눈먼 인간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고 측은해하였다.
또한 그 시기에 태안반도의 안흥에서 수군水軍과 어촌의 실상을 기술한 시와 모진 흉년에 관교들의 횡포로 초주검이 된 산골 사람을 그린 시, 경기도 안렴사로 있으면서 환곡의 문란과 농민의 고통을 목도하고 쓴 시, 황해도 관찰사로 가다가 연평도 조기잡이의 삶을 노래한 시 등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문학의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흉년이 들어 거둘 것이 없는 텅 빈 밭에 찾아온 가을을 노래한 [전가추석田家秋夕]이다.
삶의 순리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백성들과 같은 눈높이로 세상을 바라보고 분석했던 이건창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그 열렬한 지지와 공감의 눈빛을 수렴해 목숨을 걸고 부패 관료들을 탄핵하고 절명의 문장들을 남겼다.

 

이건창은 누구인가? – 3 여한구가와 [당의통략] 저술
그의 문학적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1850~1927),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과 함께 구한말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일찍이 김택영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수한 고문가 9명을 뽑았던 가운데 들어가 여한구가麗韓九家에 속했을 정도다. 그는 문장 중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세속의 글[俗文]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옛날 순수하고 강건한 체를 가진 선진의 문장[古文]을 애써 추구했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 병사들이 대원군을 잡아가자 고종은 이건창을 애타게 찾았다. 청나라 황제에게 바칠 주문奏文을 작성해 대원군을 모시고 청나라에 다녀오라는 얘기였다. 그때 고종은 “대원군을 위하여 명백하게 사실을 밝혀 이 글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글자를 볼 때마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 대목을 보면 이건창의 문장실력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던 이건창은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그는 당파 싸움이 당파 간에 깊은 원한의 골을 만들어 나라 전체를 병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바로잡아보려는 의식에서 편찬한 것이 최초의 당쟁사인 [당의통략]이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조선시대 당쟁사를 서술한 중요한 사료로 지금도 널리 인용되는 저술이다.
이건창은 물밀듯이 밀려오는 개화의 압박 앞에서 깊은 고뇌에 잠겼다. [당의통략]을 저술하기 전 개인적으로는 모친상과 부친상을 연이어 당하는 바람에 실의에 잠길 만도 했다. 이 시점에서 당쟁의 역사를 되돌보고자 한 이건창의 결단은 개화를 무조건 반대하거나 편승하는 게 아니라 참된 도리를 내심에서 파악하여 참된 일을 실천하려는 강화학의 전통을 충실하게 잇는 것이었다. 단순히 척화하거나 개화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조선의 몰락을 막는 일보다 우선이었다. 거기엔 몰락하는 전통과 몰려오는 새로운 사상이 부딪쳐 소용돌이치는 현실, 나도 모르는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잠시라도 멈추게 하려는 지식인의 윤리가 현명한 비극성으로 스며들어 있다.

 

이 책의 구성과 주요 대목들
이 책은 이건창의 여러 면모 중에서 ‘문장가’로서의 측면과 백성들의 생활에 대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총 7부로 구성됐는데 제1부에서는 이건창이 남긴 문장 이론을 모았다.
맨 처음에 나오는 [작문이론에 답하는 편지]는 이건창의 대표적 문장론이다. 문장이란 뜻을 얽는 것이기에 뜻이 연속하고 관통하게 하는 것을 가장 우선해야 하고 뜻을 통하게 하려다보면 “어조사 따위의 쓸데없는 말을 구사할 겨를이 없으며, 속어 사용을 꺼릴 겨를이 없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 부분이 이건창의 문장을 여는 가장 큰 열쇠다. 이어서 ‘언어를 다듬는 법’, ‘敵意로 主意를 공격케 하는 법’ ‘말과 뜻이 서로 넘침이 없게 하는 법’ ‘소리와 리듬을 울리는 법’ 등 문장을 만들어나가는 구체적인 방법이 전개되고 있다.
[정매하과록서]에서는 “쉽고 단순해져야 정밀한 것이 온다”는 문장관을 피력하고 있으며, [자하시초발]에서는 당시 칭송이 자자했던 자하 신위의 시가 화려한 꽃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가하고 [김우림의 시론에 대한 글을 지어 임유서에게 주다]에서는 창강 김택영의 시를 극찬함으로써 자하의 시와 대비시키고 있다. [영모재기]에서는 당대 사대부들이 비문과 제문 등의 글 청탁을 받고 이름만 바꿔 똑같은 형식으로 글을 찍어내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제2부에서는 논설과 평론을 모았다. 특히 송골매[鷹]의 속성을 논한 [응설鷹說]과 [증자고가 양웅을 논한 글 뒤에 쓰다]는 사물에 본질에 대한 뛰어난 통찰과 전해 내려오는 고전류를 비판하고 교정하는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응설]은 어떤 매가 사냥감을 보고도 점잖게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누가 칭찬하자, 매의 본성을 모르는 말이라며 “매란 것은 원래가 인자한 동물이 아니라 매에게는 인자함과 지혜로움이 덕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3부는 사육신에 대한 전기, 김시습과 김인후에 대한 전기 등을 통해 충성과 절의를 논한 글을 모았다. 특히 이건창은 [육신사략]에서 세종의 은혜를 가장 두텁게 입은 신숙주가 단종을 배신하고 세조를 도운 것을 눈에 띄게 강조했다. [청은전]에서는 김시습을 재평가했는데 이건창은 그가 “기본적으로 유교를 지향했으며 불교는 처세상 가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내렸다. 이런 주장은 요즘의 연구경향과 배치되는 부분이라 논쟁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도학자로 널리 알려진 김인후에 대해서도 “인종·명종 사이의 밝힐 수 없는 정국과 관련해서” 그의 삶을 포착하고자 했다. 이런 것은 모두 이건창이 기존의 주류적 관점과 맞서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글들이다.
제4부는 이건창이 자신의 가족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쓴 에세이성이 가득한 글들을 모았다. 4부의 핵심은 [녹언鹿言]과 동생과 아내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녹언]에서 이건창은 사슴의 녹용이라는 알레고리를 활용해서 마음과 육신이 병든 지식인에게 올바른 정신 상태를 회복하라고 주문한다. “포악하며 방자하고 탐욕스러운 짓을 해놓고 다만 녹용을 먹음으로써 병을 낫게 하려는가?”라는 질문에 잘 나타나듯 이건창 자신이 몸이 허약해 녹용을 구해 먹으려다가 자책감에 빠져 자기반성으로 이어진 형국을 보여준다. [망처에게 올리는 제문]은 부부의 정이 때론 은은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드러나 슬픔이 자욱해진다. “아 슬프다. 봄바람이 때맞춰 불어와 만물이 생기가 나는데, 어찌하여 반짝반짝하던 눈동자는 다시 볼 수 없고 다정한 말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는가?” [막내 동생 수경에게 올리는 제문]에서는 “殮牟?너를 위하여 상촌에 집 한 채를 지었다. 너의 중형이 밤낮으로 목수들을 감독하여 지금은 집이 완성되었다. 그곳에 장차 누가 사는가? 청상과부 제수씨 분이요, 외동딸뿐이요, 의자 하나와 탁자 하나 뿐이다.… 수경아 수경아! 너는 나를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가? 수경은 듣고 있는가? 듣고 있지 않는가? 애재라 통재라 원통하구나”라며 처절하게 울고 있다. 이건창이 짓는 제문은 상대방이 이 말을 들어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제문들에 비해 훨씬 말 걸기의 제스처가 두드러지며 간곡하게 부름이 많다.
제5부와 제6부는 백성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건창은 강화도 인근의 이름 모를 민초들 가운데 그 행실이 뛰어나고 기려져야 마땅한 경우를 빠짐없이 채록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수칙전]은 강화도에 서양군대가 몰려와 장수들이 모두 도망가고 백성들이 모두 피난 가는데 홀로 술을 마시고 군복까지 차려입고 길목을 막고 섰다가 죽임을 당한 이수칙에 대한 이야기며, [유씨 늙은이의 묘지명]은 이웃 윤여화의 집에서 짚신을 삼던 유씨 늙은이를 애도하는 글이다. 유씨 늙은이는 갈 곳 없이 윤여화의 집에 기탁해 살았는데 평생 짚신을 삼았다. 그는 짚신을 삼을 뿐 스스로 팔지 않고 윤여화에게 주면 그녀가 팔아 쌀을 사서 주면 늙은이가 밥을 해먹었다. 이건창은 비록 방 한 칸이 이 노인의 세상이지만 그의 짚신을 신은 사람들이 천지사방 다니지 않는 곳이 없으니 짚신 삼기에 모름지기 성인의 도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라고 갈파한다.

목차

들어가는 글

제1부 문장 이론 
글을 어떻게 지어야 훌륭한 문장이 될까?
뺨의 수염을 그려야 좋은 문장
질質과 문文이 조화를 이루는 글
쉽고 단순해져야 정밀한 것이 온다
순정한 고문의 추구
이 시대의 시인은 창강 하나로다
자하의 시는 화려한 꽃에 불과하다
글 찍어내는 세태를 비판함
사모의 정이 간절할 때 훌륭한 문학이 탄생한다
마음心을 떠난 학문은 논할 수가 없다
규방 여인이 풍아의 뒤를 잇는 아름다움

명미당 이야기: 여한십가란 무엇인가-변려한 세상의 문장을 꾸짖다

제2부 논설과 평론
허물을 고치기를 남에게 표시 나지 않게 하라
잔인하지 않으면 매가 아니다
그렇게 살면 인생 어려울 것이 없겠다
문장이 최고의 도는 아니다

명미당 이야기: 최연소 과거 급제와 『당의통략』 저술-조선은 도학을 너무 존숭하였구나

제3부 충성과 절의
신숙주는 들어라
김시습과 김인후에 대한 재평가
역사서를 잘못 읽어 죽지 못하다
허리에 찬 칼이 사람의 마음을 비추네
미국 군함대가 기가 질려 물러나다

명미당 이야기: 이건창의 피 끓는 상소문 읽기-“폐하, 빨리 러시아 공관에서 나와 궁을 지키소서”

제4부 가족과 나에 대하여 
모름지기 자기 마음속에 정해진 가치관이 있어야
마음과 육신이 병든 지식인에게 고함
깨끗함에 대한 변론
이제 누구의 가르침을 얻을까
가장 불행한 자가 나의 처 아니겠는가
다정한 말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는가
눈물을 닦으며 술잔을 권하네
천 장의 종이에 만 자를 써도
진실로 슬퍼할 만한 일

명미당 이야기: 18~19세기 제망실문의 경향-죽은 아내를 어떻게 감동시킬 것인가

제5부 백성들의 삶을 논하다
누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말렸던가?
도적질도 할 수 없고 살아갈 방법도 없다
불효자를 참회하게 만든 대국민 담화문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사람
짚신 삼기에 담긴 성인의 도
받아들임이 부끄럽지 않으리
모든 면이 어른 같았던 친구
나라를 지킨다는 것의 어려움
효행과 열부는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라

제6부 효부와 열녀
위대한 사랑의 표현
누가 백상월을 기생이라 말하는가
일기장을 양손에 쥐고 죽다
한칼에 두 유방을 잘라낸 여인
남편의 도포를 입고 죽다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다

명미당 이야기: 인물 기사와 이건창의 글쓰기-산택이나 초야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포착하려는 욕구

제7부 생활과 성찰
그대는 장차 어디를 수리하려는가?
개성 사람들의 세상에 전할 만한 것
제가 말을 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호랑이를 잡고자 하는 수령의 고민
가렴주구가 되기는 얼마나 쉬운가
사찰은 집이 아닌가
부모 삼년상을 치른 스님을 기림
수승대는 자연의 개울가에 있는 것
오직 칡만은 향기도 없고 무성하지도 않네

명미당시문집서전

옮긴이의 말

 

미리보기

이건창은 이범진의 추천으로 해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1895년 민비 시해 사건 이후에 이미 벼슬에 나가지 않으려고 굳게 마음으로 결단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지금 상황에서는 조정에 벼슬을 해도 어떠한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신들의 권위의시고가 당파로 점철된 당시 조정의 풍조는 이미 고질화되어 도저히 고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풍조 때문에 이건창은 이미 두 차례나 귀양살이를 다녀와야만 했다. 1차는 1877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찰사 조병식의 탐학을 고발하다가 도리어 그다음해에 벽동으로 귀양을 간 것이고, 2차는 1893년 나라와 임금을 위해 상소문을 올렸다가 보성으로 귀양을 간 것이다.
이처럼 정의에 의거한 처신과 곧은 언사는 당시 조정에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해를 입을 뿐이었다. 1896년에 임명한 해주 관찰사에 대하여 세 차례에 걸쳐 사직서를 올리면서 결국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_199~201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이건창

강화 출생으로 본관 전주,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다.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했으며, 김택영·황현과 함께 한말삼재로 불렸다. 고종 3년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역대 최연소 과거급제자이다. 1870년 벼슬을 시작했으나 1875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을 탄핵했다가 벽동으로 유배돼 벼슬생활을 접었다. 이후 고종의 부를 때 어사로 나가 비리를 고발하며 민폐를 해결했으나, 갑오개혁 이후에는 일체 응하지 않다가 왕의 미움을 사고 고군산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병인양요 때 조부의 자결을 목도하면서 현실과 역사에 눈뜬 후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했고, 양명학자로서 정치·경제의 기반을 심학心學에 두고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했다. 무엇보다 이건창은 김택영에 의해 여한구가麗韓九家에 꼽힐 정도로 천재적인 문장가였다. 문집으로 『명미당집明美堂集』, 저술로 『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옮긴이

송희준

1958년 대구시 달성에서 태어났다. 경북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문학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한학촌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한국고전번역원 권역별거점연구소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역서로는 《사미헌집(四未軒集)》 1권~3권과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1~권20(공역)이 있고, 편저로는 《심경주해총편(心經註解叢編)》 10권과 《근사록주해총편(近思錄註解叢編)》 10권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조선의 마지막 문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