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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종의 흥기 이중톈 중국사 14
  • 지은이 | 이중톈
  • 옮긴이 | 김택규
  • 발행일 | 2021년 08월 27일
  • 쪽   수 | 264p
  • 책   값 | 14,000 원
  • 판   형 | 145*205 | 무선
  • ISBN  | 978-89-6735-943-0 03900
책소개 목차 미리보기 지은이/옮긴이
책소개

중국사에서 선종禪宗은 어떤 의미인가

 

선종이 중국에서 탄생한 것은 본래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

선종이 명백한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아무리 사람들이 강조해도

그것이 불교의 한 종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중톈 중국사 14: 선종의 흥기』가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의 ‘제3부 세계문명권’의 두 번째 바통을 이어받았다. 수양제가 남북 대운하를 개통했을 때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고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티움의 황제가 됐다. 이때부터 짜인 새판의 세계는 위풍당당한 3대 제국의 무대가 되었고 동시에 종교와는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 전 지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중국의 수·당 시기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꽃을 피우면서 인류가 문화적인 대약진을 할 수 있던 시대였다. 중국에도 종교라는 꽃이 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들어온 불교라는 외국의 종교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비잔티움의 기독교, 무함마드의 이슬람, 당나라의 불교는 어떻게 세계의 종교가 된 것일까? 이중톈의 생생한 가이드에 사유를 맡기고 세계 종교의 시대에 빠져보자.

목차

제1장 비잔티움

흔들리는 제국

예수를 둘러싼 고민

유배된 교황

하느님의 분노

야만인에게 황관을 씌워주다

 

제2장 아랍

반도

선지자

이슬람

제국

바그다드와의 이별

 

제3장 선

진경과 정토

선종 이야기

육조 혜능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가 되다

부정의 부정

 

제4장 불교의 중국화

법난과 개혁

세상 속의 불법

시대정신

자유로 통하는 길

중국을 바꾸다

 

제5장 새판을 짜다

훼방

지중해

세계로 향하다

왕권과 교권

좋은 기회를 놓치다

 

 

옮긴이의 말│‘번체자 회복론’에 대한 이중톈의 입장

부록│『선종의 흥기』에 언급된 사건의 연표

미리보기

기독교예수라는 골칫덩이

동로마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로마의 오랜 골칫덩이인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이교도와의 씨름은 잠잠해졌다. 하지만 기독교는 계속 시끄러웠다.

 

“그렇다면 예수는 대체 인간인가, 신인가? 아니면 인간이면서 신인가? 그의 본성은 또 무엇인가? 신성인가, 인성인가? 신성만 있거나 인성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온전한 인성도 있고 온전한 신성도 있는 것인가? 예수는 정말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22쪽

 

보이지도 않는 하느님이 평범한 인간을 임신시켜 탄생한 ‘예수의 정체성’ 논쟁이 시작됐다. 하느님이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학설인 ‘삼위일체론’이 제시됐고 그래서 하느님이 육신으로 화한 구세주, 즉 예수는 곧 성자라는 결론으로 논쟁은 마무리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완벽하게 설명이 불가능했다. 만약 예수(성자) 또한 그렇게 하느님이 된다면 하느님은 유일해지지 않아 기독교는 다신교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 모두 공존한다고 주장하는 쪽과 예수의 본성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두 계파로 갈라졌다.

 

교권과 황권, 서방과 동방

페르시아인에게서 어렵게 수복한 동로마의 예루살렘과 시리아를 이제는 이슬람군이 함락하고 있으니 황제 헤라클리우스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헤라클리우스가 죽은 지 9개월 만에 기독교의 수도 격이었던 알렉산드리아까지 함락됐다. 동로마는 예수의 정체성으로 시끄러운데 엄격한 일신교인 이슬람교는 신의 본성에 관해 논쟁할 이유가 애초에 없었다. 상황이 이랬으니 당시 황제 콘스탄스는 급기야 ‘그리스도 본성에 관한 논쟁’을 금지하게 된다. 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1세가 교회를 대표하여 이에 반발하면서 황제의 금지령은 오히려 기름을 더 붓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마르티노는 결국 반역죄를 쓰고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마르티노가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하고 죽어간 데에는 교회의 속사정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면서 로마는 폐허가 되어 이전의 명성을 잃었지만 그나마 교회만은 로마에 남아 종교의 수도라는 지위와 명분이라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부와 대립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로마의 권위를 수호해야 하는 눈치 싸움이 필요했다. 게다가 교회는 로마의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로 사분오열되었다.

 

성상 파괴 운동

비잔티움은 아랍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에 도시는 폐허가 되어갔고 설상가상으로 에게해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당시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의 관습에 패배와 재난의 이유가 있던 것이라고 트집 잡기 시작했다. 예수, 성모, 성인, 천사, 조각상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하는, 기독교를 다신교로 만들고 있는 성상 숭배가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으니 성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다. 성상은 철거됐고 황제는 만족했다. 하지만 성상 파괴 운동은 오히려 성상에 대고 기도를 해왔던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로마 교회는 급기야 성상 파괴 운동을 이단으로 간주했다. 더 나아가 성상 파괴 운동에 찬성한 이들을 교적에서 제명하기까지 했다. 교회는 더는 마르티노 때처럼 양보할 수 없었고 황제는 교황의 토지까지 몰수하는 방법으로 맞불을 놓았다. 교권과 황권의 줄다리기는 계속되었다.

 

야만인에게 황관을 씌워주다

황제에게 실망한 교황은 황폐한 도시 로마에서 홀로 자신의 세력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롬바르드인도 비잔티움 황제도 아무 도움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프랑크 왕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마침 프랑크의 피핀에게도 합당한 명분과 하느님의 축복이 필요했던 터라 교황은 피핀을 추대했고 그에 감응한 피핀이 교황에게 땅을 아낌없이 선물했다. 그렇게 정교일치의 교황령이 탄생하게 됐다.

이어서 카롤루스 제국이 등장한다.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는 아랍인과 색슨인을 정복하고 뒤이어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까지 정복하게 되면서 제국이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영토를 확장했다. 때마침 폐위됐던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으로 달려가 카롤루스에게 몸을 의탁했다. 교황이 폐위된 이유 중 하나가 자신과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던 카롤루스는 군대를 이끌어 교황을 다시 로마에 호송해주고 다시 성좌에 앉게 도와주었다. 이에 감동한 교황이 카롤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카롤루스 아우구스투스, 하느님이 정하신 위대하고 온유한 황제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이것은 프랑크인이 로마 문명권에 속하며 또한 로마 세계의 리더가 될 수 있음을 뜻했다. 교회의 선택을 시작으로 하나였던 로마 제국은 둘로 나뉘었다. 카롤루스 제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라는 세 개의 국가가 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부흥을 이루었다.

 

이슬람선지자 무함마드

고아였던 무함마드는 쿠라이시 귀족의 과부인 하디자와 결혼하면서 하디자가 넘겨준 회사를 경영하게 된다. 그렇게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 무함마드는 비로소 사유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보기에 그의 고향 메카는 신성한 곳에서도 잡상인이 드나들 정도로 이미 부패로 타락한 상태였다. 그는 이런 현상은 신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해 9월 라마단만 되면 동굴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그때 마침내 천사 지브릴이 강림해 하늘의 계시를 내리면서부터 무함마드는 선지자가 되었다. 알라의 사도인 선지자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교리를 받아들이고 알라를 숭배하는 ‘무슬림’이 이때 처음 생긴 것이다. 하지만 선지자와 무슬림은 메카의 쿠라이시 귀족의 배척과 박해를 받았고 이들은 결국 야스립 지역 사람들의 초청을 받아 메카에서 야스립(메디나)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과도 같았다. 그것은 기존에 속했던 부락과 혈연 관계라는 전통 관습을 끊는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무함마드는 이 모험을 좋은 일로 만들었다. 기존의 전통과 생활 방식을 바꿔야만 한다면 신앙에 의지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움마’라는 이슬람 공동체가 세워졌다. 이주한 무슬림이 군사를 맡고 현지 출신의 무슬림은 호적과 세수를 책임졌다. 무함마드는 스승이자 리더였다. 그렇게 움마는 무함마드의 지휘 아래 국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정교합일의 조직이 되었다.

무함마드는 대군을 이끌고 고향인 메카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나기 반 년 전인 632년 초, 전례 없는 규모의 순례 의식을 거행하면서 알라의 마지막 계시를 전했다. 하늘의 계시에 따라 그 종교는 ‘이슬람Islam’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혁명이 시작, 바그다드의 시대

제4대 칼리파 알리를 제치고 칼리파가 된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는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정하고 세습제를 수립했다. 무아위야가 자신의 가문에게 칼리파를 세습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의 역사는 완벽하게 왕조 시대로 전환됐다. 우마이야 왕조는 아시아부터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하게 됐다. 뒤이어 이슬람은 바그다드를 새 수도로 한 아바스 왕조의 시대를 거쳐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다. 우마이야의 다마스쿠스나 아바스의 바그다드는 모두 메디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바그다드로의 천도는 어떻게 일종의 혁명으로 여겨질까?

바그다드는 페르시아 사산 왕조의 옛 수도였던 크테시폰과 매우 가까웠다. 아바스 왕조는 옛 정권을 전복한 과거의 소수 세력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우마이야 왕조에게 의지할 순 없었다. 또한 그들 스스로 집정 능력도 없어 현지에서 인재를 구해 페르시아 관료제를 활용해야만 했다. 통치 집단이 아랍 귀족과 무사에서 직업 문관, 상인, 학자로 변했고 문화는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의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바스 왕조에서 정권의 성격이 변한 것이다. 그러나 문화가 융합되고 시대가 풍부해지고 관용과 문화가 꽃 피면서 제국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자연스럽게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바그다드의 천도는 다른 민족과의 접점을 늘렸기 때문에 왕조는 쇠퇴했지만 이슬람교의 전파는 계속되는 효과를 낳았다. 사실상 페르시아인, 튀르크인, 몽골인이 주요 세력이 되어 이슬람교를 퍼뜨린 것이다. 바그다드로의 천도는 혁명과도 같았으며 왕조는 없어져도 무슬림은 점점 많아졌다.

 

외래문화로서의 불교

당태종의 환대를 받아 서역으로 떠난 삼장법사 현장은 서역으로 나가 전통 경전을 들여왔지만 얼마 안 가 모두에게서 까맣게 잊히고 말았다. 그 이론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려워서 흥미를 느끼기 힘들었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민중에게서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정토종과 선종이 번창했다. 정토종의 이치는 통속적이었고 이해하기 쉬웠으며 방법도 간단해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는다 해도 불교와 유가 윤리 사이에는 절대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정토(부처님이 계신 땅)와 극락세계에서는 황제는 특별한 지위를 가질 수 없어 정부는 자연스럽게 그 이론이 정권의 전복을 꾀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됐다. 게다가 불교의 교리인 ‘금욕’이 개인의 수행에 그치면 다행이겠지만 금욕이라는 것은 아이를 낳지 않는 효과까지 따라오기 마련이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민족은 유지될 수 없고 노동력도 없어진다. 정토종이 계속 번창한다면 나라에 위기가 닥칠 게 분명했다. 중국은 유가 윤리와 전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종파가 필요했다. 이에 선종이 탄생한다.

 

선종의 육조, 혜능惠能은 “불법은 세상 속에 있다”고 명확히 말했다. 이는 곧 생활 자체가 불법이라는 이론으로 선진 시대 제자백가의 사상과 부합했다. 회해懷海는 보시와 공양에 의존하는 승려의 생활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백장청규百丈淸規라는 계율을 만들어 선종의 승려가 공양과 보시 없이 직접 스스로 처음부터 생산해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그래야 선승을 다른 승려들과 차별화할 수 있었고 또 선원을 일반 사원과 구분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선종은 비로소 널리 인정받는 독립적인 종파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가 되고(돈오頓悟) 몸소 힘껏 실천해야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의 교리가 점점 설득력을 얻었다. 무엇보다 불성과 인성을 구분한 소승불교와 달리 ‘모든 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는 대승불교의 관점을 혜능이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키면서 선종은 비로소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물며 선종은 사람들에게 입세入世와 출세, 관직의 추구와 부처의 추구는 서로 결코 모순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부처가 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생각에 달렸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과거에서 떨어졌거나 면직당해 평민이 된 사람도 물러나 참선을 해도 무방했다. 선종은 어려운 조건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사람, 관리가 되는 데 실패한 사람, 벼슬길에서 부침이 심한 사람 등에게 잘나갈 때는 휴식처를, 힘들 때는 피난처를 제공했다.” _177~178쪽

 

선종, 중국을 바꾸다

선종의 영향 아래 중국의 사유와 생활 방식이 바뀌었다. 모든 사람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좌선하는 승려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약으로만 여겨졌던 차가 일종의 문화가 된 것이다. 격앙되고 자유분방한 시를 썼던 작가도 선종의 담백한 분위기와도 같은 작품을 쓰게 되었다.이처럼 선종은 ‘집착하거나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제공하면서 중국의 지혜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외국의 불교였던 선종이 중국으로 들어와 자리 잡은 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외래 문화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그것의 유익한 부분만을 취해 이용할 수 있다는 모델을 중국 민족에게 보여준 것이다. 선종은 중국의 종교로 자리 잡았고 또 중국 민족에게 모범 케이스로 거듭났다. 하지만 그로 인해 중국은 좋은 기회를 놓쳤고 또 사상 문화와 정신적 소질의 영역에서 선종은 중국에게 거대한 빚을 졌다.

 

선종, 기회를 놓치게 만들다

놓쳐버린 기회는 불교가 가져왔다. 너무 어려워 모두에게 잊힌 현장의 불경에는 사실 중국 문명에서 부족한 점이 있었다. 당시 중국 사회에 부족했던 인명因明(논리학, 인식론)이 당시 현장이 가지고 온 불경에 쓰여 있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돈오는 선종의 핵심 교리였으니 구태여 이치를 따지고 논리적으로 추리하는 것은 불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종으로 인해 과학의 진보와 지혜와 포용의 문화까지 놓치게 돼 이 기회를 흘려보낸 것은 중국 민족 천추의 한이 되었다.

 

“심지어 아큐阿Q의 이른바 ‘정신승리법’도 일정 정도는 선종에 책임이 있다. 본래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 불가피하게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식의 전형적인 아큐의 발상에는 선적인 의미가 듬뿍 담겨 있다.” _244쪽

 

지은이/옮긴이

지은이 이중톈易中天

중국 대륙 최고의 역사 고전 해설가.

1947년 후난성 창사長沙에서 태어나 1981년 우한武漢대학을 졸업하고, 우한대학, 샤먼廈門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현대적 시각으로 역사와 고전을 풀어내 중국인의 자화상을 그리는 역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로 문학, 예술,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저술에 힘쓰고 있다.

2006년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의 「백가강단」이라는 인문 강연 프로그램에서 ‘한나라 시대의 풍운아들’을 강연하고 같은 해 『삼국지 강의』를 펴내면서 ‘이중톈 현상’이라는 말을 유행시킬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는 전36권 규모의 『이중톈 중국사』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2011년 그간 펴낸 책들이 16권에 달하는 『이중톈 문집』으로 묶였다. 국내에 번역된 저서로는 『삼국지 강의』(전2권) 『독성기』 『품인록』 『제국의 슬픔』 『백가쟁명』 『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 『이중톈 국가를 말하다』 『이중톈 미학강의』 『이중톈, 정치를 말하다』 등이 있다.

 

옮긴이 김택규

1971년 인천 출생. 중국 현대문학 박사. 한국출판산업진흥원 중국 저작권 수출 분야 자문위원. 출판 번역과 기획에 종사하며 숭실대 대학원에서 번역을 가르치고 있다.

『번역가 되는 법』 『번역가 K가 사는 법』 『매우 혼자인 사람들의 일하기』(공저) 등을 썼으며, 옮긴 책으로는 『죽은 불 다시 살아나』 『암호해독자』 『자비』 『책물고기』 『명예, 부, 권력에 관한 사색』 『도톰한 계란말이』 『포스트 라이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