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원
2021.01.27
생애를 이야기한다는 것: 『억척의 기원』과 『절박한 삶』

 

 

공교롭게도, 비슷한 성격의 책 두 권을 거의 동시에 작업하게 됐다. 하나는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 선생님의 『억척의 기원』으로, 나주의 여성농민 이야기다. 연구자 전주람, 곽상인 선생님의 탈북 여성 인터뷰집 『절박한 삶』이 다른 하나다. 교정을 보는 내내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면 과장일까. 일곱 사람의 회고는 이따금은 비문에 가까웠다.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은 쓰기보다 말해야 한다.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구술생애사 혹은 인터뷰(간편하게 묶을 수는 없지만)가 꽤 독특한 장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생애를 옮겨놓기에 이보다 원형적인 형식이 있을까 싶기도 했다.

 

뒷표지, 보도자료 등에 들어갈 카피와 인용구를 뽑기가 어려웠던 게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문장을 골라도, 어떤 대목을 골라도 이들의 삶을 이렇게 정리해도 될까 찜찜했다. 한 에피소드를 옮겨 놓고 나니 앞뒤로 엮인 목소리가 줄줄이 이어져 지면을 넘어가버렸다. 나로서는 발화자들의 삶이 가진 산문성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고, 여러 번 속으로 타협하면서 작업을 마쳤다. 좋은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느낌을 오래 기억해야겠다는 예감만 남았다.

 

*

 

 

이를테면 『절박한 삶』의 책소개로 이런 부분을 올려뒀다:

한 번도 안 돌아보고 갔어요. 정말 열 번 백 번 돌아보고 싶은데 이 마음이 ‘하면 안 돼. 하면 안 돼. 내가 쟤한테 피해 줄 수 있어. 안 돼. 그러면 안 돼’ 속으로 그랬어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미칠 것 같았어요. 돌아보고 싶어서. 그래도 속으로 계속 ‘안 돼, 그러면 안 돼’ 했죠. 그리고 말없이 철도길을, 그 길을 그대로 걷는데…… (348p)

5장 김미숙님의 회고다. 그런데 이 회고에는 탈북에 대한 두려움, 딸을 비롯한 가족을 놓고 떠나야 한다는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온갖 감정이 얽혀 있었다. 그걸 온전히 소개하려면 두세 페이지를 전부 옮겨도 부족할 정도였다.

 

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이: (…) 나는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만 가졌어요. 교회 있잖아요. 그 지붕 같은 거, 뾰족한 모양으로 돼 있는 거. 힘드니까 그게 자꾸자꾸 창살 너머로 환상처럼 보이더라고요.

전: 북한에서 교회 다니셨어요?

이: 아니, 북한에서는 몰랐죠. 잠깐 하얼빈에 살 때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 한 분이 와서 자꾸 교회를 다니라고 하더라고. 그때 두 번인가 세 번인가 갔다 왔어요. 교회 찬양가 이런 것도 몰라. 나는 자꾸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만 있는데 자꾸 그런 집들이 눈앞에 떠오르더라고. 더 높이, 높이, 높이, 높이, 높이 하늘을 찌를 것처럼 더 높이 그 지붕이 환상으로 떠오르더라고. 뭔 소린지 모르갔지요? 어쨌든 그 안에서 상상한 것이 현실이 되었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28p)

1장 이수린님의 이야기다. 횡설수설로까지 보이는 이 대목에서 나는 자꾸 멈칫거렸다. 자꾸자꾸, 높이 높이 높이, 믿거나 말거나. 저자가 덧붙여놓았듯 극한 상황에서 본 환시 정도겠지만, 그렇다고 환시라는 간단한 단어로 정리할 수만은 없는 경험일 것이다. 수용소에서 종일 ‘올방다리’로 앉아 있어야 했던 그의 14개월은 이런 뜻모를 말로밖에 요약될 수 없다. 그 속에서 ‘상상한 것은 현실이 된다’고 굳게 믿게 되었고, 어쩌면 이는 그의 경험을 거의 놓치고 있는 동시에도 어떤 말보다 힘이 센 요약일 것이다.

 

『절박한 삶』에는 재밌는 점이 하나 있다. 저자는 ‘탈북 여성들을 버티게 하는 자질’을 발견하기 위해, ‘스스로의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혹은 ‘자기 내면에 어떤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을 반복적으로 던지는데, 인터뷰이들은 매번 간단하게만 대답한 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대화는 자꾸만 인터뷰이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이들에게 삶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은 아마 몇 단어 몇 문장으로는 정리될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있다면, 이들 안에 있는 이야기 덩어리 자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리되지 않는 사연 전체에 그 삶의 힘과 이유가 알알이 박혀 있을 것이다.

 

*

 

 

‘억척’이라는 단어를 발견한 건 그런 의미에서 행운이었다. 『억척의 기원』의 원래 제목은 『땅 파먹고 살다』였다. 나름대로 좋지 않나 하고 있었지만 제목을 바꾸게 됐다. 며칠 고민했다. 『절박한 삶』과 마찬가지로, 한두 마디로 정리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민하던 차에 이들의 삶은 ‘억척스러움’을 대표하다시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농민 여성의 이미지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어휘인 데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래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구나’ 비슷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들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아직 청산하지 못한 억압의 고리와도 엮여 있었다. 그래서 ‘억척’과 ‘기원’을 조합했고 그럴듯한 제목이 됐다.

 

그러나 여전히, 괜찮은지 잘 모르겠다. 어쩐지 많은 것들을 빠져나가게 내버려뒀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이를테면 당신들의 절절한 아픔을 이야기하는 대목에는 ‘억척’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갖다 붙이기가 아직 망설여진다. 혹시 이 제목은 두 분의 삶을 ‘사회를 비추는 거울’ 같은 것으로 소비시켜버리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로 이 삶은 그런 뜻인가. 사람의 일생 자체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가능하긴 한가.

 

물론 이게 그렇게까지 거창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책의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부각시킬 수는 없고,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될 것이고, 그것밖에는 길이 없을 것이다. 편집자의 일을 대단한 걸로 생각하는 직업적 자의식 과잉에 가깝기도 하다. 완벽한 제목이나 카피 같은 건 없다. 다만 구술생애사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까지는 아마 안 했을 거라는 이야기, 그 정도겠다. 혹은 이런 대목이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는 이야기 정도겠다:

그날은 눈알라(까지) 펄펄 왔네. 잊어묵도 안 혀. 겨울인디…… 버스를 타러 가려면 우리 집 앞에서 보면 구불구불 긴 논둑을 걸어가야 혀. 논둑을 한참 가다 방죽 두럭을 걸어가서 버스를 타야 돼요. 가라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그런 말까지 막 하고…… 논둑 걸어가다 돌아보는 애한티다 가라고 가라고…… [어느새 삐죽삐죽하던 울음이 끝내 터져나온다.] 돈이라고 차비만 딱 주고 내쫓았거든요. 그러고는 이제 1~2년 안 오더라고. (김순애, 24p)

이 대목은 네 페이지가량을 채우고 있다. 남들 보기에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옥죄다가, 가족에게까지 그 압박감을 전이시켜버린 사람. 마음 좀 독하게 먹고 잘 살라고, 동네 어르신들께 술 한잔 대접할 수 있을 때에나 돌아오라고, 쫓아내다시피 보낸 동생은 지금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저자 최현숙 선생님이 지적했듯, 이들의 열정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었지만 반대로 자타를 찌르고 소모하는 칼이기도 했다. 자기가 찌른 타인의 상처를 계속해서 돌이켜보는 인터뷰이의 이야기와 ‘억척’이라는 단어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억척의 ‘뒷면’ 정도겠다. 나는 어쩐지 이 뒷면이야말로 『억척의 기원』에서 가장 절절한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그날은 눈알라 펄펄 왔네. 잊어묵도 안혀. 겨울인디……’ 책에서 이 문장을 가장 오래 담아두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