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우정
2019.03.15
중국? 정치? 사상사?
제목만 들어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책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책의 쪽수를 듣고는 다시 한번 놀라 자빠졌다. 흠, 1300쪽이 넘는 애가 세 권이란 말이지? 쌓여 있는 교정지 산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서는 절대 한번에 들고 갈 수 없는 교정지의 무게. 심지어 교정지를 다 못 버리고 아직도 자리 아래에 쌓여 있다. 그것은 내가 게으른 탓이지만… 오늘 이 글을 다 쓰고 나서 버려야겠다.
앞서 다른 편집자의 손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내게 온 원고. 어쨌든 누군가는 원고를 책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 누군가는 나였으니까. 솔직히 내가 이 원고를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장정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지만, 내게 의외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진秦나라 이전 시대(1권)부터, 진한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쳐(2권), 수당송원명청 시기(3권)까지, 아무리 중국 고전을 많이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한다고 해도 중국 전 시기를 관통해서 읽어볼 기회가 있을까? 인물 위주로 소개되면서, 그 중간중간에는 중국의 역사가 켜켜이 들어차 있었다. 너무나 많이 들어왔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공자, 맹자 등의 사상에서부터 시작해 이름’만’ 아는 중국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이 다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대한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이렇게나 많은 인물과 사상에 다시 한번 놀라 자빠졌다. 어느 순간 설거지를 하며 선진-진한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 중국 역사시대를 줄줄 외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건 내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완전한 ‘책’이 되도록 돕자.
이 책의 저자는 중국 톈진의 난카이대학 교수인 류쩌화 선생님. 한국어판 출간을 준비 중이던 2018년 5월, 미국 시애틀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한국어판 출간을 못 보고 떠나신 게 너무나 아쉬웠다. 출간을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이 책이 중국에서 출간된 건 사실 되게 오래전이다. 1996년(!) 류쩌화 선생님을 필두로 그의 제자인 장펀톈, 거취안 등의 학자들이 모두 이 책의 공동 필자다.
그러면 이 방대한 저작을 우리말로 번역한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지독하게 궁금해졌다. 용인대 중국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장현근 선생님. 선생님을 만난 날, 골방에 틀어박힌 학자의 이미지를 상상해왔는데, 생각보다 너무 외향적이셔서 놀랐다.(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이 책은 2002년에 도서출판 동과서에서 선진시대를 다룬 1권만 먼저 출간이 됐었다. 그리고 무슨 사연인지 더 이어가지를 못했다.
장현근 선생님이 이 책을 처음 입수하여 보기 시작한 건 1997년이다. 한국 학계에 소개할 생각으로, 1998년부터 조금씩 꾸준히 번역했다. 2001년부터는 저자들과 연락이 닿아 계속해서 교류하며 수없이 많은 질의응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내가 특히 이 책에서 감동을 느낀 건, 그 내용 자체도 자체이지만 바로 옮긴이의 말 때문이었다. 이 책과의 첫 만남, 류쩌화 선생님과의 만남, 번역에서의 어려웠던 점들, 무엇보다도 번역하면서 당시 느낀 점을 일기 형식으로 써두었고 그중 몇 개를 추려 옮긴이의 말에 그대로 실었는데, 사실은 ‘이 책 번역 힘들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그 글들에서 번역자의 진심을 느꼈다. 그 누구도 이 힘든 대장정의 번역을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20년을 이 책 연구에 쏟아부은 삶이란 무엇일까… 연구자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말, 다시금, 생각해본다.
자, 이제 교정지를 버리러 가야겠다.